서울 성곽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요? 위키백과사전에 9,970보(59,820척)라 적혀 있으니 미터법으로 18km를 조금 웃도는 거리입니다. 젊은이라 하드래도 하루에 모두 둘러보기에는 조금 벅차겠지요? 이 성곽을 누가 지었는지는 알고 계시죠? 그렇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태조 4년(1395년)에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기 위하여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기구를 만들고 개국공신 정도전에게 성터의 조사 측정을 명하였습니다. 이듬해 봄과 가을 두 차례 농사일이 덜 바쁜 시기를 택하여 총 98일 만에 성곽을 모두 쌓았는데 이때 징집된 장정 수가 연인원 20만 명에 이르렀다 하니 매일 2,000명 정도가 동원된 셈입니다. 성을 쌓는 동안 태조가 현장에 나와 보지 않은 날은 왕후 강비가 죽어 장례를 치르기 위한 열흘뿐이었고 가끔은 현장에서 밤새 머문 적도 있다 하니 태조가 성 쌓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서울의 성곽을 왜 도성이라 부르는지 알고 계시죠? 읍에 쌓으면 읍성이요 산에 쌓으면 산성이니 도읍지에 쌓아 도성이 된 것입니다. 서울 성곽은 한양에 쌓았다 하여 한성(漢城)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은 흥인지문(동대문)에서 출발하여 오간수문, 동대문역사박물관(동대문운동장 터), 광희문(시구문), 신당동 성곽 둘레길, 신라호텔 영빈관 윗길, 장충단을 거쳐 남산 봉수대, 숭례문(남대문)까지 대략 6.3km를 한국전통문화원 이성남 전문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3시간 40분 정도 답사하였습니다.
성(城)을 한자로 흙 토(土)변에 이룰 성(成)으로 쓰는 것으로 보아 성(城)이 원래는 토성이었을 것입니다. 서울 성곽 역시 태조가 처음 지을 때는 토성 부분과 석성부분이 섞여 있었습니다. 4대 세종대왕이 성곽을 크게 개축하면서 토성을 모두 석성으로 바꾸었습니다. 16대 인조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청나라와 맺은 굴욕적인 약조 때문에 부서져 가는 성곽에 70년 동안이나 손을 대지 못하고 방치하다가 19대 숙종 대 말에 이르러서야 큰 규모로 개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울 도성은 태조 이성계가 처음 성을 쌓고 이를 세종과 숙종이 마무리한 셈입니다. 서울 성곽을 따라 걸으며 성곽을 올려다보면 누구라도 이 부분은 태조 성곽, 저 부분은 세종 성곽, 또 이 부분은 숙종 대의 성곽이라고 쉽게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손가락에 각기 다른 지문이 있듯 성곽에도 성문(城紋)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메주만한 잡석을 건성으로 다듬듯 하여 맨 아랫돌 성기(城基)부분부터 맨 위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형태는 태조 시대의 성곽이고, 밑으로부터 큰 돌을 얼마간 쌓아 올리다가 위쪽으로 갈수록 돌이 작아지는 형태는 세종 시대의 성곽입니다. 숙종은 장정 네 명이 들 수 있을 정도의 일정 크기 정사각형 돌을 징발하여 성곽 개축에 사용했습니다. 숙종 대의 성곽이 가장 깨끗하고 견고해 보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처음 도성을 쌓을 때 작업 공구(工區)를 97개로 나누고 공구별로 600척(약 180m) 씩을 할당하여 쌓도록 하였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공구 이름에 제1조, 제2조와 같이 아라비아 숫자를 쓰거나 ‘가’조입네 ‘나’조입네 이름을 붙였겠지만, 당시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훈민정음 역시 반포되기 전의 시기라서 당시 초등교육의 교재로 널리 쓰이던 천자문을 이용하여 작업 공구 이름을 정하였습니다. 하늘 천(天), 따 지(地), 검을 현(玄), 누루 황(黃)하는 식의 천자문의 글자 순서대로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성기(城基) 바로 윗돌의 석면(石面) 부분에 관심을 두고 걷다보면 가끔 비뚤비뚤 새긴 글이 희미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황시차(黃始此)’라 하였다면 ‘황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라는 뜻일 터이니 성곽을 부실하게 쌓아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공구별로 책임 추궁을 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궁리한 조선조 실명제였습니다.
성곽 답사를 하다 보면 옹성, 곡장, 치성, 여장, 암문과 같은 낱말을 듣게 됩니다. 옹성(甕城)은 대문에 몰려 온 적군을 공격하기 쉽도록 대문 양 옆에서 앞쪽으로 항아리 모양으로 쌓은 작은 성벽을 말합니다. 흥인지문(동대문)이나 수원성의 장안문에 아직도 이것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곡장(曲墻)과 치성(雉城)은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앞으로 조금 불룩하게 튀어 나오게 한 성벽 부분을 말하는데 그 모양이 반원형이면 곡장, 사각형이면 치성입니다. 여장(女薔)은 성곽 위의 총구가 설치된 얕은 담장인데 멀리 쏠 수 있는 원총안과 가까운 적을 쏠 수 있는 근총안이 일정 간격으로 뚫려 있습니다. 여자 키만큼 낮은 담장이라 하여 여장이라 했다던가. 암문(暗門)은 우리 편 인원의 성 안팎 출입을 편하게 하려고 성곽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성곽 쪽문입니다. 적의 눈에 쉽게 띄지 않도록 암문 위에는 문루를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서울 도성의 4대문 이름은 유학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덕목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차례로 한 글자씩 차용하여 지었습니다. 동쪽으로부터 차례로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 돈의문(敦義門), 남쪽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숙청문(肅淸門)이라 하였습니다. 숙청문은 위의 덕목 순에 따라 숙지문이라 해야 할 것이나 지(智)와 청(淸)은 일맥이라 하여 숙청문으로 하였다 하며 이것은 훗날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홍지문(弘智門)은 19대 숙종이 도성의 북쪽 방어시설 보완 차원에서 숙정문 서쪽 지점에 세운 또 하나의 문으로서 도성 4대문과는 별개의 문입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맨 마지막 글자 신(信)은 동서남북(仁義禮智) 4대문 안에 자리 잡은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에 들어가 있습니다.
동대문인 흥인지문은 그 이름이 다른 대문처럼 본래는 석자로 된 '흥인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대가 지대가 낮고 물이 많아 풍수상으로 약점을 지닌 곳이라 하여 고종 대에 문루를 수리할 때 비보(裨補)차원으로 글자를 하나 보태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짐(仁)을 흥(興)하게 한다는 흥인문(興仁門)을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글자 하나를 덧붙였으되 의미는 변치 않고 그대로 있으니 실로 절묘한 아이디어가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 아들 대를 거치며 나라가 완전히 망하였으니 풍수는 무엇이며 비보는 또 무엇입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답사팀의 어느 누구도 그 점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삼국시대 이후 천 몇 백 년 동안을 면면히 내려온 풍수사상의 끈질긴 생명력을 곱씹어 보느라 모두 생각이 바빠서였을 것입니다.
흥인지문에 가까운 청계천 다리 밑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대로 재현하기가 어려웠는지 다리 아래 한쪽에 원래보다 작은 크기로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동대문 운동장 터를 파내다가 발견한 이간수문(二間水門)은 다행히도 실물이 땅 밑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원형으로 복원된 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다리 위에서 오간수문 모형을 내려다 본 느낌을 가벼운 관심이라 한다면 이간수문 앞에 서서 실물을 올려다 본 느낌은 실로 감동이었습니다. 이간수문은 서울 도심에 청계천 아닌 다른 큰 내(川)가 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역사적 시설물이었습니다.
남소문인 광희문(光熙門)은 동소문인 혜화문, 서소문 소의문, 북소문 창의문과 함께 한양 4소문의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왕족이라 해도 4대문 안에는 묘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4대문 안의 시신은 모두 성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남쪽의 광희문은 서쪽의 소의문과 함께 장례행렬이 지나갈 수 있는 문으로서 그래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시구문의 뜻을 부드럽게 눙치기 위하여 그 후에 생겨난 또 다른 별칭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광희문 바로 옆 광희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구길이란 푯말이 달려있었다 합니다. 아마도 동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름이라서 바꾸자 한 건 아닌지··
광희문을 지나 완만한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깔끔하게 조성된 성곽 탐방 길을 만나게 됩니다. 석면에 새겨진 글씨를 찾으며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덧 신라호텔 경내, 저 아래로 영빈관이 보였습니다. 그곳이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거꾸러진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사당 자리랍니다. 일제 때는 물론 그 뒤 한동안까지 그래서 그 곳을 박문사(博文祀)라 불렀다는데 기와지붕과 그 바로 아래 장식들을 바라보노라니 그럴싸해서인지 사당에 어울리는 건축양식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십 년도 훨씬 더 되었습니까? 정주영 명예회장님 생전이었는데 그곳에서 현대그룹 송년회를 한 적이 있지요? 모두 한복 차림 부부동반으로 참석했었습니다. 얼마 전엔가는 인기 탤런트 권상우의 결혼식도 거기서 했었죠? 그곳이 바로 이등박문의 사당이었다니, 역사를 알아가다 보면 뭐라 표현키 어렵게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장충단(獎忠壇), 표창할 장, 충성 충, 터 단이니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친 이들의 충성을 기리는 곳입니다. 명성황후가 변을 당한 을미사변 때 황후를 지키려다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훈련대장 홍계훈의 충절을 기린 곳입니다. 고종의 명으로 당시 세자였던 순조가 쓴 글씨 獎忠壇(장충단)으로 비(碑)를 세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그 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으며 일본에 대항하다 순국한 충신들을 함께 배향토록 하였는데 당시 배일사상이 나라 안에 널리 펴져 있었던지 일반 대중들의 장충단에 대한 경모심 역시 대단했다 합니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배호의 노래 가사로만 얼추 알고 있던 장충단, 장충단의 내력을 설명하는 강사의 눈길을 피해 난 시선을 하늘로 돌렸습니다. 경내 입구에 들어서면서 그 노래가사에 빗대 “어? 오늘 여기 안개가 안 끼었네.”하며 일행에게 깜냥 농이랍시고 던진 한마디가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장충단 옆 마른 내에 걸쳐 있는 수표교, 세종 2년에 만들어져 수 백 년 간 청계천에서 수위 측정 구실을 하다가, 청계천 전면 복개공사를 할 때 이곳으로 이사 온 후 50년 동안 줄곧 이곳에 붙박혀 있습니다. 몇 년 전 청계천 복원공사를 할 때 이런저런 사정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지금은 청계천에 짝퉁 수표교까지 설치되어 있어 이제 자신은 쉽게는 귀향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알고나 있는 듯 거무스레하게 고색이 깃든 이 화강암 다리는 안쓰러운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습니다. “수표 다리야, 너무 실망 말거라. 나라 밖에 떠도는 지체 높은 문화재가 지금 수 백 수 천 점이 되겠거늘 넌 그래도 나라 안에 있질 않으냐?” 지금 어느 훌륭한 석공더러 다시 만들어 보라 해도 600년 전 만든 이 다리처럼 이렇게 예쁘게 만들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국립중앙극장을 향하여 오르막길을 15분 쯤 걸었을까 남산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나무 계단을 만났습니다. 여기가 정상까지 3-40분 걸리는 본격 성곽 탐방로의 시작점입니다. 태조 성곽, 세종 성곽, 숙종 성곽이 한 눈에 들어오며 ‘문화재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계단이 가팔라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하지만 몰랐던 걸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워 신이 납니다. 그저 막연히 성곽을 바라보며 이 계단을 올랐다면 이 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열락은 눈곱만큼도 없는 고해의 계단 길이었을 것입니다.
해발 262m 남산, 다른 이름이 많았습니다. 경사스런 일을 많이 끌어 들인다는 인경산(引慶山), 태조 이성계가 목멱대왕(木覓大王)을 산신으로 봉작하고 이곳에 사당을 지었다 하여 목멱산, 봉수대가 마지막으로 끝나는 곳이라 하여 종남산(終南山), 남산의 순 우리말 마뫼 등입니다. 남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지방기념물로 남아 있습니다. 전신전화의 발달로 봉수제도가 없어진 지 100년이 넘었지만 지금이라도 불을 지피면 하늘로 연기가 솟구칠 것만 같았습니다. 정상에는 또 n서울타워와 팔각정이 있습니다. 뉴스채널 YTN이 소유주인 n서울타워의 n은 남산의 첫 글자를 뜻하기도 하고 2005년 대대적 리모델링을 했다하여 새롭다(new)라는 의미도 있다 합니다. 아무래도 소유주 YTN의 n인 것만 같았습니다.
흥인지문을 출발한 지 3시간 40분, 답사팀 15명 전원 한 사람 낙오 없이 종착지 국보1호 숭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투명 가로막 안으로 작업장이 훤히 보입니다. POSCO가 비용을 지원한다는 대장간에서 몇 사람이 쇠를 벼르고 있고 노천 현장에는 수많은 석공들이 징으로 돌을 쪼고 있었습니다. 많은 일을 조상들이 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하고자 하는 문화적 노력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2012년 연말이 준공 목표라 하니 공기가 5년 가까이 되는 엄청난 공사입니다. 3년 전, 화마에 휩싸인 숭례문을 TV화면으로 지켜보며 국민 모두가 안타까움으로 어쩔 줄 몰라 했던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