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하자 !!

참되고 바르게

좋은글·감동이야기

6.25의 진상/참상

碧空 2008. 7. 2. 12:11


6·25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반드시 역사로부터 망각당할 것이며, 현실을 외면하는 자 역시 현실로 부터 소외당하게 된다는 사실은 인류의 경험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아픈 상처인 6·25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역사적 인식과 함께 '아직도 우리는 종전(終戰)이 아닌 휴전(休戰) 상태에 있다'는 현실을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1950년 6.25 전쟁발발부터 1953.7.27 군사정전협정이 체결 되어 휴전상태로 한 반도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2008.6.25로 한국전쟁 58주년이 됩니다.
 
 
 

 
                          
 
 
 
                               6.25노래 박두진 작사/김동진 작곡
 
북한군의 남침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 9 5 0년 6월 2 5일 새벽, 38선을따라 배치되어있던 북한군의 야포가 남쪽을 향해 일제히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어서
북한군기동부대가 서쪽의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이르는3 8선 전역에서공격을시작했다. 또한유격대와 육전대가 동해안을따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상륙했다. 그때부터 정적에 휩싸여있던 3 8선과 동해안일대가단숨에 아비규환의 전쟁터로변했다. 우리민족의 최대비극이었던6·2 5전쟁은이렇게시작됐다.

북한군의 남침과 국군의 대응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3 8선으로부터 불과 4 0㎞ 남쪽에 위치한 서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사전에 치밀한 남침계획을 수립했던 북한군도 남한의 그같은 약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그들은 서울 북쪽에 주공인 제1군단을 투입해 서울을 목표로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중부전선의 춘천과 동부전선의 강릉 북쪽에서도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이 동시에 시작됐다.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3 8선 일대의 국군 장병들은 즉시 전투태세
에 돌입했으며, 주둔지에서 새벽잠을 깬 부대원들은 출동준비를 하기에 바빴다.
 
6·2 5전쟁개시초기

그 동안 지속되었던 비상경계령이 불과 하루 전인 6월 2 4일(토요일) 0 0시부로 해제되었으며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출·외박을 나갔기 때문에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3 8선의 국군 방어진지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부대와 치열한 접전이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국군 부대들이 미처 준비태세를 갖추기도전에 방어진지를 기습한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소련제T - 3 4전차와 S U - 7 6자주포였다.그들의 전차와 자주포가 국군의 방어진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도 갖지 못했다. T-34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대전차무기도 없었다. 따라서 북한군의 전차는 무적의 괴물이었다.전차의 위력을 보고 있는 국군 용사들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장병들이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포탄전쟁 발발과 초기전투남침 선봉에 선북한군 전차대.그들은 전차를 앞세우고 포병의 지원을받으며 조직적인공격을 감행했다. 일부 부대는 자주포를전면에 내세워 전차처럼 운용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전방사단으로부터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자택에서 상황보고를 받은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곧 비상을 발령하고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직접 찾아가 전쟁 발발 상황을 보고했다.
북한군의 남침상황이 전파되면서 비상소집이 시작되었지만 장병들의부대 복귀는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거리에는 방송 차량이 장병들의 부대 복귀를 독촉했고, 모인 극장과 운동장에도 비상사태를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적과 맞서 싸울 병력이 부족한 대부분의 전방진지는 장병들이 투입되기도 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1시 국방부는 전쟁 발발에 관한 공식 담화문을 발표했다.그 사실이 신문 호외로 전국에 뿌려지자 국민들은 충격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북한측의 남침 사실 은폐와 북침 주장

남침 전쟁의 기습 달성이 확실해진 것을 확인한 북한 정권은 오전 1 1시경 평양방송을 통해“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조치로서 반격을 가해 전쟁을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어서 오후에는 김일성이 직접 방송을 통해“리승만 괴뢰정부의 군대가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공화국 경비대와 인민군대에게 반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북한측의 주장은“대한민국이 북침했으므로 그들이 반격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사전 치밀한 계획에 따라 도발한 침략전쟁의 실상을 은폐하고 그 책임을 한국측에 전가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이 공간사로 펴낸『조선전사』에도 그런 내용들이 상당히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다.그 후 일부 인사들이 북한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해“남측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였고, 북측이 이를 반격함으로써 전쟁이 확대되었다.”는 소위‘북침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을 비롯해 북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군의 해주 진입설을 그증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그것은 오보임이 판명되었고 사실적인 증거는발견되지 않았다. 실전에서 국군의 어느 부대도 3 8선 이북으로 공격 또는 진입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군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방어전을 실시했거나 후퇴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3 8선을 넘어 공격을 계속했을 뿐이다.
 
북침설의 허구

북한측의 사실 은폐 기도는 많은 증거 자료를 통해서도 허구임이 드러났다. 전쟁 중에 노획된 북한군의‘선제타격작전계획’에는 그들의 남침 기도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또한 전쟁 이후 공산권 특히 러시아에서 발표된 관련 자료는 소련·중국·북한이 사전에 모의해 전쟁을 준비하고 남침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많은 공산측 인사들도 북한의 남침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특히 1 9 9 4년 러시아를 방문한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에게 러시아 옐친(Boris N. Yel’t s i n ) 대통령이 제공한 6·2 5전쟁 관련 비밀문서에는“김일성의 요청을 스탈린(Joseph V. Stalin)이 승인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어 북침설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한편“어느 편이 먼저 총을 쏘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거나,“미국과 남한이 북한으로 하여 남침하도록 유도했다.”는‘남침유도설’등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북한의 전쟁 도발사실과 그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의 인적 재산피해

6·2 5전쟁은 한민족의 유구한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피해를주었다. 58년전그날 이 땅위에서는 한민족5천년 역사 이래 가장 많은 국가인25개국 약 1 5 0만 명의 군인이 한국전쟁을치렀다. 그 결과한국군62만명, 유엔군16만명,북한군93만 명, 중공군1 0 0만명, 민간인피해 2 5 0만 명, 이재민3 7 0만명, 전쟁미망인3 0만명, 전쟁고아10만명, 이산가족1,000만명 등 당시남북한인구 3,000만명의 절반을넘는 1,800여 만명이 피해를입었다. 이러한 천문학적인 숫자는 미국이 5년간 치른 남북전쟁에서도인구 3%에 해당하는100여 만명이었고, 제2차대전시 최대의 피해를 입었던 유럽도 인구의10%인 3,000만 명이 인명손실을 입었을뿐이다. 또한 물적피해도 전국토가 초토화 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못지  자못컸다.

  6·2 5전쟁의‘노블레스 오블리쥬’

6·2 5전쟁시 한국군의 고위 장교들 중에는 부자(父子), 장인과 사위,형제가 전쟁에 참전한 경우가 많았다. 부자로는 전쟁 초기 제3사단장인유승열 대령과 제7사단장인 유재흥 준장, 전쟁초기 청년방위대 수도서울 고문단장인 안병범 대령과 안광수 대령, 장인과 사위로는 제5사단장인 이응준 소장과 전쟁 초기 제2사단장인 이형근 준장, 전쟁초기 육군총참모장인 채병덕 소장과 백홍석 대령, 형제로는 전쟁 초기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과 제1 7연대장인 백인엽 대령, 이형근 준장과이상근 중령 등이 있다.
전쟁 중 희생자로는 육군총참모장을 지낸 채병덕 육군 소장을 포함,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 이용문 준장, 박범집 준장 등이 전사 및 순직했다. 대령으로 전사하여 준장으로 추서된 분으로는 제7사단 제1연대장함준호 대령, 김현수 대령, 이형근 장군의 실제인 이상근 대령, 권태순대령, 박노규 대령, 안병범 대령, 김용배 대령, 전성호 대령, 권동찬 대령,이근석 공군대령 등이 그들이다.또한 미국에서도 유명 인사들의 자제들이 참전했다. 특히 미군 장성아들 1 4 2명이 참전 해 3 5명이 전사 또는 부상했다. 이들중 미국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 J o h n )육군소령,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아들 샘( S a m )대위, 유엔군총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아들 빌( B i l l )대위,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의 아들 밴플리트 2세 공군 중위, 해병 제1항공사단장 해리스 해병소장의 아들 해리스 해병소령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1 9 4 8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공군을 선택했던 밴플리트 2세는 한국전쟁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야간 폭격임무 수행 중 실종됐고, 미 해병제1사단 제7연대 제3대대장이었던 해리스 소령은 장진호 철수작전시 전사!! 杉. 전투 중 전사자 및 순직자로는 제3 4연대장마틴 대령, 해군 참모총장 셔먼 제독, 워커 미8군사령관, 무어 제9군단장이 있고, 제2 4사단장 딘 소장은 실종되어 포로가 됐다가 귀환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6·2 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왔다. 수많은 자식 잃은 부모, 부모 잃은 고아, 남편 잃은 여인, 파괴된 고향산천, 그리고 고향을 떠난 온 실향민들, 이 많은 민족적 고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때 우리 민족의 아픔은 점차 희석되고또 망각되어 가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반세기란 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6·2 5전쟁의 후유증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세상에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이자 중무장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에서 분쟁의 위험이 가장 큰 지역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철교를 폭파시켰다. AP통신 종군기자 막스 데스포가 촬영해 1951년도 퓰리처상을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의 大후퇴가 시작될 때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南(남)으로 향하고 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대동강 수상했다.
 (출처: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25관련 사진들 

▲ 투항하고 있는 인민군 병사들.

 

▲ 원산으로 돌진하는 상륙정들.

 

▲ 임진강 부교를 정비하고 있는 국군병사.

 

▲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들.

 

▲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중인 유엔군 병사들이

강추위속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움막에 살고있는 다섯 어린이.

 

 

▲ 사람인가? 멧돼지인가?

총구 앞에서는 사람도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인민군 전사가 짐승처럼 기어오면서 투항하고 있다.

 

 

▲ 인천상륙작전 때 유엔군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인민군 병사들

 

▲ 전란의 상흔으로,

탱크도 사람도 망가진 채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도로.

 

 

▲ 종전 후 전선에 배치된 미군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내한한 인기 여배우 마릴린 먼로.

 

 

▲ 종전 후인 1954년 2월 전선에 배치된 미군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내한한 인기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군복입은 모습.

 

 

▲ 1951년 7월 30일

미 해군 전투기에서 내려다 본 파괴된 철교의 모습.

 

▲ 1952년 10월 2일 인천의 모습.

 

▲ 1952년 10월2일 촬영한 남대문 전차역의 모습.

 

▲ 1951년 1월 촬영한 인천의 모습.

 

 

▲ 1950년 9월16일 상륙작전 직후

불타고 있는 인천 시가지의 모습.

 

 

▲ 1950년 10월21일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하고 있는

미 해군 함정의 모습.

 

▲ 1950년 12월19일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가기 위해

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의 모습.

 

▲ 1952년 부산 국군병원에서 퇴원하는 상이군인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

 
▲ 1952년 3월3일 야전에서 부식을 준비중인 국군 취사병의 모습.
 

▲ 1950년 9월17일 탱크를 가로막은 시신들의 모습.

 

▲ 1950년 8월22일 면도중인 미군 병사와

거울을 들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

 

▲ 1950년 8월18일 벌거벗겨진 인민군 포로가

유엔군 작전에 협조하고 있는 모습.

 

▲ 1953년 8월5일 억류중 당한 부당한 처우를

혈서로 써 항의하고 있는 귀환 국군 포로의 모습.

 

▲ 1951년 2월 추위에 떨고 있는 중국군 포로들의 모습.

 

▲ 1951년 5월24일 터널을 폭파하려는 영국군의 인솔하에

 터널 밖으로 대피중인 피란민들.

 

▲ 1951년 2월8일 부산에서 동생을 업은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

 

▲ 1951년 2월8일 부산에서 촬영한 한 가족의 모습.

 

 

▲ 사진은 포항의 고아원에서 어린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고 있는 미군 병사의 모습.

 

▲ 1951년 2월16일 미군들이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어린이들에게 DDT 살충제를 살포하는 모습.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필자 주>

우감스럽게도 사진 제공자와
필자가 누구인지 알 수 가 없습니다.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그동안 성원해 주시고 애독해 주신 네티즌 여러분께 깊이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NARA에 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권중희 선생님, 그리고 사진 자료를 입수하는데 도와주신 재미동포 자원봉사자 여러분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곁에서 원문을 번역해 주신 박유종 선생님, 길잡이가 되신 이도영 박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스캐너를 빌려준 동포 주태상씨 그리고 이선옥씨, 권헌열씨, 정희수씨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기에 이 자료를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수한 사진 자료는 모두 480여 매이나 그중에서 중복되거나 비슷한 것, 그리고 사진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제외한 자료를 30회에 걸쳐 모두 공개하였습니다.

박도 기자는 서울에서 33년간의 교단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강원도 산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 회원으로 작품집에는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산문집 <샘물 같은 사람> <아버지의 목소리> <일본기행>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한국전쟁 사진첩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이 있다.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 1950. 8. 2. 금강철교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

▲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

▲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

▲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

▲ 1950. 8. 15. 피난민 행렬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

▲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

▲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

▲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

▲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

▲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

▲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

▲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

▲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

▲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

▲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

▲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

▲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

▲ 1950. 10. 1. 소공동 일대ⓒ

▲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

▲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

▲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

▲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

▲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

▲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



▲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함께 일하는 옛 전쟁터에서 다시 봄날이 왔다.




짚차를 타고 도주하던 미군 병사들

 

(차 양쪽의 손을 든 사람들) 사로잡은 중공군 병사들.



중국 인민지원군의 시각으로 기록한 한국전쟁 사진집이 나왔다.


<영광스런 중국 인민지원군>

(중국 해방군화보사, 1959)
사진과 사진설명을 따서 펴낸 [그들이 본 한국전쟁]

(눈빛출판사)이 그것.
원저는 중국 인민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그들의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홍보를 위한 시각이 다분하지만 압록강 도하,
그들에게 잡힌 미군포로, 인해전술때 불어제낀 날라리,
폭격을 피하기 위한 물밑다리 등 우리 쪽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전쟁의 나머지 반쪽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전쟁 끝 무렵 후방에서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에
뛰어들어 활동한 사실은 이채롭다.
전투가 없는 날 중공군 병사들이 민가 아낙네의 
봄 밭갈이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북한 위문단이 지원군 시공부대에 와서

화려한 공연을 펼쳤다.



전쟁이 끝난뒤 재건사업에 투입된 중국군 병사들이

 

북한주민들과 함께 포탄 구덩이들을 메우고 있다.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장면.



북한 주민들이 포화를 무릅쓰고

지원군을 위해 밥과 물을 나르고 있다.



1951년초 눈 덮힌 강원도 횡성지역에서

진군 나팔소리에 맞춰
돌진하는 중국군 병사들.




김일성이 직접 중공군 1차 귀국 부대를 송별하고 있다.





한 노인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갓을

지원군에게 작별 선물로 주고 있다.





1951년초 서울에 입성한 중공군과 북한군 병사들이

 

중앙청 앞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열차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중공군 귀국장병들을  

 

환송하는 북한주민들.



북한의 한 노인이 지원군에게 길 안내를 하고 있다.





군대와 함께 출정한 중국 민간인수송대의 우마차 행렬이 눈밭 속에서 전쟁물자를 실어나르고 있다

 

'좋은글·감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선자의 보화탕  (0) 2008.07.18
문자를 안 받는다 에미야-  (0) 2008.07.12
상기하자 6.25  (0) 2008.07.02
궁목수 이야기  (0) 2008.06.21
한발 멀리서 삶을 돌아보자  (0) 2008.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