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반드시 역사로부터 망각당할 것이며, 현실을 외면하는 자 역시 현실로 부터 소외당하게 된다는 사실은 인류의 경험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아픈 상처인 6·25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역사적 인식과 함께 '아직도 우리는 종전(終戰)이 아닌 휴전(休戰) 상태에 있다'는 현실을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1950년 6.25 전쟁발발부터 1953.7.27 군사정전협정이 체결 되어 휴전상태로 한 반도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2008.6.25로 한국전쟁 58주년이 됩니다.
6.25노래 박두진 작사/김동진 작곡
북한군의 남침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 9 5 0년 6월 2 5일 새벽, 38선을따라 배치되어있던 북한군의 야포가 남쪽을 향해 일제히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어서
북한군기동부대가 서쪽의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이르는3 8선 전역에서공격을시작했다. 또한유격대와 육전대가 동해안을따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상륙했다. 그때부터 정적에 휩싸여있던 3 8선과 동해안일대가단숨에 아비규환의 전쟁터로변했다. 우리민족의 최대비극이었던6·2 5전쟁은이렇게시작됐다.
북한군의 남침과 국군의 대응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3 8선으로부터 불과 4 0㎞ 남쪽에 위치한 서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사전에 치밀한 남침계획을 수립했던 북한군도 남한의 그같은 약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그들은 서울 북쪽에 주공인 제1군단을 투입해 서울을 목표로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중부전선의 춘천과 동부전선의 강릉 북쪽에서도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이 동시에 시작됐다.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3 8선 일대의 국군 장병들은 즉시 전투태세
에 돌입했으며, 주둔지에서 새벽잠을 깬 부대원들은 출동준비를 하기에 바빴다.
6·2 5전쟁개시초기
그 동안 지속되었던 비상경계령이 불과 하루 전인 6월 2 4일(토요일) 0 0시부로 해제되었으며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출·외박을 나갔기 때문에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3 8선의 국군 방어진지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부대와 치열한 접전이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국군 부대들이 미처 준비태세를 갖추기도전에 방어진지를 기습한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소련제T - 3 4전차와 S U - 7 6자주포였다.그들의 전차와 자주포가 국군의 방어진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도 갖지 못했다. T-34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대전차무기도 없었다. 따라서 북한군의 전차는 무적의 괴물이었다.전차의 위력을 보고 있는 국군 용사들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장병들이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포탄전쟁 발발과 초기전투남침 선봉에 선북한군 전차대.그들은 전차를 앞세우고 포병의 지원을받으며 조직적인공격을 감행했다. 일부 부대는 자주포를전면에 내세워 전차처럼 운용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전방사단으로부터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자택에서 상황보고를 받은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곧 비상을 발령하고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직접 찾아가 전쟁 발발 상황을 보고했다.
북한군의 남침상황이 전파되면서 비상소집이 시작되었지만 장병들의부대 복귀는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거리에는 방송 차량이 장병들의 부대 복귀를 독촉했고, 모인 극장과 운동장에도 비상사태를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적과 맞서 싸울 병력이 부족한 대부분의 전방진지는 장병들이 투입되기도 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1시 국방부는 전쟁 발발에 관한 공식 담화문을 발표했다.그 사실이 신문 호외로 전국에 뿌려지자 국민들은 충격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북한측의 남침 사실 은폐와 북침 주장
남침 전쟁의 기습 달성이 확실해진 것을 확인한 북한 정권은 오전 1 1시경 평양방송을 통해“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조치로서 반격을 가해 전쟁을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어서 오후에는 김일성이 직접 방송을 통해“리승만 괴뢰정부의 군대가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공화국 경비대와 인민군대에게 반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북한측의 주장은“대한민국이 북침했으므로 그들이 반격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사전 치밀한 계획에 따라 도발한 침략전쟁의 실상을 은폐하고 그 책임을 한국측에 전가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이 공간사로 펴낸『조선전사』에도 그런 내용들이 상당히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다.그 후 일부 인사들이 북한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해“남측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였고, 북측이 이를 반격함으로써 전쟁이 확대되었다.”는 소위‘북침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을 비롯해 북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군의 해주 진입설을 그증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그것은 오보임이 판명되었고 사실적인 증거는발견되지 않았다. 실전에서 국군의 어느 부대도 3 8선 이북으로 공격 또는 진입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군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방어전을 실시했거나 후퇴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3 8선을 넘어 공격을 계속했을 뿐이다.
북침설의 허구
북한측의 사실 은폐 기도는 많은 증거 자료를 통해서도 허구임이 드러났다. 전쟁 중에 노획된 북한군의‘선제타격작전계획’에는 그들의 남침 기도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또한 전쟁 이후 공산권 특히 러시아에서 발표된 관련 자료는 소련·중국·북한이 사전에 모의해 전쟁을 준비하고 남침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많은 공산측 인사들도 북한의 남침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특히 1 9 9 4년 러시아를 방문한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에게 러시아 옐친(Boris N. Yel’t s i n ) 대통령이 제공한 6·2 5전쟁 관련 비밀문서에는“김일성의 요청을 스탈린(Joseph V. Stalin)이 승인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어 북침설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한편“어느 편이 먼저 총을 쏘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거나,“미국과 남한이 북한으로 하여 남침하도록 유도했다.”는‘남침유도설’등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북한의 전쟁 도발사실과 그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의 인적 재산피해
6·2 5전쟁은 한민족의 유구한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피해를주었다. 58년전그날 이 땅위에서는 한민족5천년 역사 이래 가장 많은 국가인25개국 약 1 5 0만 명의 군인이 한국전쟁을치렀다. 그 결과한국군62만명, 유엔군16만명,북한군93만 명, 중공군1 0 0만명, 민간인피해 2 5 0만 명, 이재민3 7 0만명, 전쟁미망인3 0만명, 전쟁고아10만명, 이산가족1,000만명 등 당시남북한인구 3,000만명의 절반을넘는 1,800여 만명이 피해를입었다. 이러한 천문학적인 숫자는 미국이 5년간 치른 남북전쟁에서도인구 3%에 해당하는100여 만명이었고, 제2차대전시 최대의 피해를 입었던 유럽도 인구의10%인 3,000만 명이 인명손실을 입었을뿐이다. 또한 물적피해도 전국토가 초토화 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못지 자못컸다.
6·2 5전쟁의‘노블레스 오블리쥬’
6·2 5전쟁시 한국군의 고위 장교들 중에는 부자(父子), 장인과 사위,형제가 전쟁에 참전한 경우가 많았다. 부자로는 전쟁 초기 제3사단장인유승열 대령과 제7사단장인 유재흥 준장, 전쟁초기 청년방위대 수도서울 고문단장인 안병범 대령과 안광수 대령, 장인과 사위로는 제5사단장인 이응준 소장과 전쟁 초기 제2사단장인 이형근 준장, 전쟁초기 육군총참모장인 채병덕 소장과 백홍석 대령, 형제로는 전쟁 초기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과 제1 7연대장인 백인엽 대령, 이형근 준장과이상근 중령 등이 있다.
전쟁 중 희생자로는 육군총참모장을 지낸 채병덕 육군 소장을 포함,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 이용문 준장, 박범집 준장 등이 전사 및 순직했다. 대령으로 전사하여 준장으로 추서된 분으로는 제7사단 제1연대장함준호 대령, 김현수 대령, 이형근 장군의 실제인 이상근 대령, 권태순대령, 박노규 대령, 안병범 대령, 김용배 대령, 전성호 대령, 권동찬 대령,이근석 공군대령 등이 그들이다.또한 미국에서도 유명 인사들의 자제들이 참전했다. 특히 미군 장성아들 1 4 2명이 참전 해 3 5명이 전사 또는 부상했다. 이들중 미국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 J o h n )육군소령,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아들 샘( S a m )대위, 유엔군총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아들 빌( B i l l )대위,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의 아들 밴플리트 2세 공군 중위, 해병 제1항공사단장 해리스 해병소장의 아들 해리스 해병소령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1 9 4 8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공군을 선택했던 밴플리트 2세는 한국전쟁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야간 폭격임무 수행 중 실종됐고, 미 해병제1사단 제7연대 제3대대장이었던 해리스 소령은 장진호 철수작전시 전사!! 杉. 전투 중 전사자 및 순직자로는 제3 4연대장마틴 대령, 해군 참모총장 셔먼 제독, 워커 미8군사령관, 무어 제9군단장이 있고, 제2 4사단장 딘 소장은 실종되어 포로가 됐다가 귀환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6·2 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왔다. 수많은 자식 잃은 부모, 부모 잃은 고아, 남편 잃은 여인, 파괴된 고향산천, 그리고 고향을 떠난 온 실향민들, 이 많은 민족적 고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때 우리 민족의 아픔은 점차 희석되고또 망각되어 가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반세기란 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6·2 5전쟁의 후유증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세상에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이자 중무장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에서 분쟁의 위험이 가장 큰 지역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철교를 폭파시켰다. AP통신 종군기자 막스 데스포가 촬영해 1951년도 퓰리처상을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의 大후퇴가 시작될 때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南(남)으로 향하고 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대동강 수상했다.
(출처: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