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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통신에 남긴 체신고 발자취

碧空 2008. 2. 6. 13:51

전력회사에 남긴 체신고 발자취

                                              전6 김 창기(金 暢冀)

 1. KIT 광장수신소에 첫발

  우선 나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동문들과의 교류와 일했던 흔적들을 하나하나 더듬어보려고한다.
61년3월7일이 졸업인데 바로전에 배치될 곳을 발표해 주었다. 3월16일 부터 출근이라는데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다들 어디로 가는지 웅성대며 설레임과 기대가 교차하였고 아~ 이제 사회 첫발 이구나 생각하며 커다란 짐을 진 느낌으로 착잡했다.
우리반 이항준, 기계과 양용부,나 이렇게 셋이서 국제전신전화국(KIT)광장수신소에 첫 출근을 하였다.
성동구 구의동 한강기슭에 위치한 야산과 전답 그리고 몇 안되는 민가가 고작인 조용한 마을에 수신소
가 있었다. 교통은 동대문-광나루간 협괴도 전철이 땡땡 소리를 내면서 한시간 간격쯤으로 다녔고 서울역-천호동간 버스가 2,30분간격으로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만해도 국제간의 통신은 지금처럼 인공위성이나 광케이불 같은것이 없었기 때문에 단파무선방식에 의존하였다. SSB방식이라고 하나의 주파수를 다중화해서 여러회선을 만드는 기술이고 이런방식으로 전화, 전신, 모사전송등의 통신이 이루어졌다. 광화문 KIT본국, 부평송신소, 광장수신소의 3개국간에 이루어지는 시스템으로 샌프란시스코, 도쿄,
함부르그, 오크랜드, 마니라, 홍콩, 싱가포르간 직접통신이 이루어지고 여타 나라 들은 중계에의한 간접통신으로 할수밖에 없었다. 단파통신은 초단파(VHF),극초단파(M/W)와 달리 파장이길어서 중계없이도 지구의 반대편까지 전리층 반사 원리를 이용하여 전송 할수있는 특징이 있어서 국제통신이 가능하다.
그때만해도 송수신기는 모두 진공관식이었고 송신기 출력관은 사람 머리통만 하였다. 무선통신은 송신기의 출력이나 수신기의 감도도 중요하지만 안테나의 이득(GAIN)이 결정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옛날
경인선 부평 연변이나 구의동 들판에 높고 큰 철탑과 다이아몬드형 안테나들을 볼수 있었는데 바로 이것들이 롬빅 안테나 설비이었다.

    어린양 3형제가 교복바지에 잠바하나씩 걸치고 아침일찍 늦을세라 도착하니 학교선배들이 반갑게 맞아주었고 이로부터 6년간의 공무원생활이 시작되었다.
근무시작 2개월만에 5.16혁명이 일어나고 군인들이 외곽경비에 돌입하고 몇몇 선배들은 군 미필에걸려 사직하는등 어수선하기 짝이없었다. 근무 분위기가 삭막한데도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 이듬해 진학을 결심하였고 가까운 행당동에있는 한양대학에 입학하여 야경주독이라는 고된
생활속에 중간에 휴학까지 하면서 67년2월 졸업하였고 졸업전인 66년에 한국전력 입사시험에 합격하
여 67년3월에 체신부 공무원 5급갑으로 체신부를 떠나 전력회사 사원이되었다.
6년간 록을먹고 나오려니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고 선배들의 조언도 많이 참작하였다. 어린나이 시작한 생활에서 성장한시점에 장래의 비젼이나 전망 같은것에 대한 판단이 쉽진않았다.
당시 계셨던 상사로는 소장 통신기정 최윤식 신언모 이해운씨였고 기술계장 기좌는 이응효 박종화씨였다. 체신고 선배로는 1회김영운 전하도 노판구 2회이성우 노순구  3회이중식  4회장근수 선배등이었다.  후배는 양종식 김순 박보현 김상배 권오성 등이었다.
업무적으로나 사적으로 특히 학교 나가는일 등으로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인간적으로 사회 초년생인 우리들에게 참 좋은 선후배들이었다. 뭐든지 모르면 가르쳐주고 부족한점은 알려서 고쳐 주셨다.
장근수형과의 자취생활이나 관사에서 여러 선후배들과 합숙하며 지내던 일들이 기억에 새롭게 떠오른다.
KIT는 국제국 이라서 특별수당도 얼마인가 받기도 하였으나 근로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늘 시간과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기억이 많이난다. 그때 직원수는 50명정도였는데 나이드신분들도 모두 형같이 아저씨같이 따뜻하게 대해주어서 즐거운일 도 많았다. 국제간의 통신은 야간에 일이 더 많았기에 매일 야근만하던 우리에겐 편리하고 이로운 일이었다.
야간근무 하면서 당시 격변하던 시국에 국가의 운명이나 정치 돌아가는 얘기며 인생에 대한 어줍잖은 개똥철학 하면서 날밤을 패던 일들 하며 젊은날의 낭만같은 아련한 추억이 서려있는 광장수신소, 얼마전에 그곳을 지나다 일부러  들려보니 지금은 장거리통신의 무슨 국소로 쓰는 모양이고 한구석엔 재경 독신자 숙소도 있었다.


  2. 우리나라 전기도입과 전기회사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것은 1887년3월의 일이었다. 참고삼아 이 과정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있다. 19세기중엽 조선사회가 세도정치에서 관료체제의 문란으로 농민운동이 전개되고 동양적 전통사회 체제의 전환기를 맞게되었다. 조선을 독점하려는 일본과 구미열강등 외세 진출세력에대한 배척이냐 문호개방이냐 하는 기로에서 먼저 일본의 무력앞에 개항하고 청나라의 종용으로 미국과 유럽나라들에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명치유신으로 군비 증강과 영토확장에 광분한 일본은 1876년 조.일 조약을 맺었으나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으로 청나라에 밀려났다. 그러나 재진출을 기도하던차 1894년 동학란을 틈타 청일전쟁을 벌려 다시 조선의 지배권을 되찾고 요동반도까지 진출하였다.
서구열강들은 보고만 있지않고 1895년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토록 하였는데 이틈에 조선정부는 친일세력을 몰아내고 친러파를 기용하니 이에 당황한 일본은 1895년10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을미사변이 있은지 4개월뒤1896년2월고종황제는 경복궁에서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하게된다.
1882년5월 조선-미국간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듬해인1883년9월 수교에 대한 보답으로 보빙사(報聘使)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일행은 발전소와 전등시설을 돌아보고 놀라면서 조선에 전기도입을 희망하였고 고종이 내탕금을 내주는등  적극적인 허락하에 급속하게 추진되었다. 초대 주한 미국공사 포드는 에디슨을 대신하여 조선에 전기 및 전화를 가설하는 독점권을 받았고 1884년 9월 전기시설이 발주 되었고 갑신정변으로 잠시 중단 되었다가 1886년7월에 인천항에 기자재가 도착되고 1887년3월 드디어 경복궁내 건천궁에 전등이 점화되었다.
이때 시설은 16촉광 전등 750개를 켤수있는 규모였고 이 싯점은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1880년으로부터 7년5개월만의 일이었다. 이 사업은 고종황제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모두 밤에 일어난것에착안하여 전기시설을 적극 추진하였던 결과이다. 1892년 추가사업으로 제2전등시설사업이 추진되어  1894년5월 경복궁의 모든 전각은 물론 1.6Km떨어진 창덕궁까지 점등되어 2차시설 규모는 보일러    240마력,엔진300마력,직류발전기 125볼트 250암페어짜리 4대로 16촉광 전등 2000개를 켤수있는것이었다.  황제의 뜻도 있었지만 원래 조선사람들은 궁중에서도 밤 늦게까지 일을 많이하기 때문에 궐내에 불을 환히 밝혔는데 나중에 정부 재정에 부담이되어 운영비 뿐만아니라 외국인 인건비를 체불하여
외교문제화 되기까지 하여 절전운동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고종황제가 전기생활에 익숙했고 전기문명에 대한 높은 인식과 관심으로 사업이 계속 진전되어 홍릉
능행에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1897년 서대문-홍릉간 전차궤도가 준공되고 동대문 발전소가 완공을
보면서 1895년4월 전차가 개통되었다.  (*1899.9 인천-노량진 철도개통)

  이땅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1898년 한성전기(주)가 발족되고 1915년 경성전기(주)로 변천하였고
조선수력,조선송전,부평수력,강계수력,한강수력,남선수력,조선전력등이 1943.9 조선전업(주)로 되었으며 대흥전기(대구.함흥),남선한동전기가 남선전기(주)로 운영되다가 1961.7.1 한국전력(주)로 3사 통합되
면서 100%국가소유가 되었다. 2004.4.2 전력사업 합리화조치로 6개의 발전회사와 1개의 전력거래소가 한전에서 분리되고 한전은 모회사로서 총괄과 송전 배전만 담당 하게되었다. 1961년 3사통합 당시367,000Kw이던 전력(발전)설비는 2007년8월현재  67,196,000Kw로 약 200배가 되었으니 그간 국가 산업경제 규모가 얼마나 커졌는지 가히 짐작할수있다. 전력생산 원별 설비용량은 수력6.8%,기력37.2%  복합17.2%, 내연0.5%, 원자력27%이고  발전전력량은 수력2%,기력59%, 원자력 39%이다. 전력소비
분야로 보면 가정16%, 공공37%, 생산47%로 구성되었다.  송전설비는 765Kv선로가 755Km,  345Kv가8,275Km, 154Kv가 19,515Km, 180Kv가 232Km, 66Kv가 496Km, 배전선 긍장은 총 398,304 Km이다.


 3.   전력사업용 통신과 체신고 동문

    전력사업은 국가 기간사업으로서 특히 생산 수송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특수성을 가지고있다.
전기는 저장이 불가능 하기 때문에 생산된 전기를 소비자에게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공급 해야하는데 이는 수요자의 시시각각 변하는 요구량에 일치하게 생산해야 한다는데 어려움이 있는것이다.
그래서 고신뢰도의 통신수단과 제어수단을 필수요건으로 한다. 따라서 전기통신기본법에 전력용 자가
통신설비를 의무화 하는것이다. 전기소요가 많지않던 5.60년대에는 전력선반송(PLC)통신방식이라고
송전선로를 전송로로 이용하는 특수한 기술을 주로 사용하였다.
많은 통신량과 고품질이 요구됨에 다라 1964.4 국내 최초로 마이크로웨이브 시스템을 명동본사-남산
반사판-부평변전소간 300회선용량을 개통한 바 있다. 곧 이어1968년에 명동본사-백봉반사판-덕소변
전소간 300회선을 개통하여 동쪽과 서쪽으로 지방에 내려가는 간선 루트를 시작으로  1970년 부평-
대전-대구-부산간, 1971년에는 대전-이리, 1974년에 이리-광주간이 준공되면서 회선용량과 품질면
에서 손색없는 전국적인 자가통신망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로 나라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 함에따라 전원개발도 이에 맞추어 수력위주에서 기력,원자력
발전소가 해안 벽지에 건설되고 초고압 송전을 위한 변전소가 산간 오지에 신설되어 기간 통신망에서 분기되는 마이크로웨이브 및 UHF 다중무선통신시설을  확장하였다. 내가 화천발전소를 떠나 본사로
 온것이 1970년2월이었으니 이때부터 크고작은 전력 통신의 일들을 골고루 다루면서 여러선배들의 지도와 협력에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전력회사가 이런 사업들을 추진하는데는 통신주관부서인 체신부의 인허가가 필요하므로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방대한 사업들을 성공리에 추진 할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 체신고 출신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체신부나  한국통신에 계셨던 많은 선 후배 동문들의 파격적인 이해와 협조가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 했을것이 분명하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기회를 빌어 머리숙여 감사드린다. 배전설비운영 및 보수용 이동통신망으로 VHF 시스템을 전국적으로 운영 하였는데 인허가나 무선국
시설검사등 하루도 끊일날 없이 관의 신세를 져야 할때에도 언제나 우리 동문들이 계서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한편 전국각지의 지역내 통신으로는 배전선로 첨가 통신케이불방식을 많이 사용 하였는바 전력선에 첨가되어 있어서 전력유도에 의한 피해가 많았고 잡음등의 영향으로 신뢰성이 떨어지며
특히 전력선에 인접한 체신부나 철도청등의 통신케이불에 유도 피해를 주어서 설비보상등 협조사항이 많았을때도 체신부출신의 우리 동문들이 앞에서서 협의하고 완결하곤 하였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국가통신망 통합이 진행되었으나 전력통신특수성으로 한차례 유예도했으나 결국은 한전의 장거리 무선통신망은 KT로 이관하고 소요회선은  임대사용하게되니 자가망은 종래의 PLC망과 지역적인 케이불망만 남게되었다.  이무렵 광통신 기술이 개발되어 1979년부터 부산지점-남부산변전소간 2Km에 실증시험을거치고 1983년에 부산전력-서면변전소간 9.4Km에 최초로 광케이불을 시설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초고압송전선로 가공지선에 광코아를 내장.제조하는 기술이 일본에서 개발 되었음을 확인하고 즉각 도입하여 덕소-청평구간에 시험함과 동시 국내 전선메이커에 기술지도 및 개발을 유도하여 국산개발을 성공시켰다. 1985년 국가통신조정위원회 승인을 득한 전국 광통신망시설 계획을 착착 실행하여 광대역 고신뢰 고품질의 전국 간선통신망을 다시 확보 할수있었다. 이것이 이름하여 광섬유복합가공지선(OPGW) 라는것이다. 이당시 정통부와 KT에서는 한전의 장거리 광통신망계획을 승인 할것인지 여부를 놓고 많은 검토와 논의가 있었으나 국가위기시 측방통신망으로의 가치를 고려하여 승인 하였던것으로 알고있고 그 와중에서도 우리 동문들의 이해와 협조가 큰 몫을 했던게 사실이다.
 이들 통신망이 후일 우리나라 초고속 인터넷과 PCS휴대통신망의 급속한 발전에 기여 한 바가 크다고 본다. 직접적으로 사용된것도 중요하지만 경쟁을 유발하는 촉매역할이 있었다고 판단하는것이다.
한전의 사업장 내 또는 사업장간의 통신망인 구내통신 분야에서는 초기 수동방식의 자석 및공전 사설
교환기로부터 시작하여 발전소 턴기 외자도입시 일괄도입된 기계식 자동교환기인 스트로져와 크로스바가 산발적으로 시설 운영되었고 다음에 EMD방식이 주종을 이루는 시기가 있었다.
1978년 전국 사업장간 DDD망을 완성 하였는데 이때는 EMD와 X-bar방식이 각각 반반 정도이었다.
이후 80년대 초부터 전전자식 교환기를 도입하였고 점차 전전자 디지탈교환시대로 진전하였다.

      전력회사에는 전송 및 교환등의 일반적인 통신보다는 전력자동화 분야가  중요한 업무인바 그중에서도  전기생산과 소비의 균형문제가 기술적으로나  전력의 경제적 운용면에서 필수적이다.  67년도 입사하여 초임으로 화천발전소에 배치되어  최초로 도입된 자동주파수조절장치(AFC)를 운용하였는데 당시는 화천수력발전소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전기를 많이(81,000Kw) 생산하였고 수력이 수요에 즉시
응동 할수있어서  그러한 시스템을 도입 시설 하였던 것이다. 그때는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그리고 저항과 콘덴서들의 소자에 셀신 방식의 구동장치들로 구성된 자동제어 회로였었다. 전기생산이 부하보다 적으면 60HZ가 안되고 계통이 무너지며 갑자기 부하가 적어지면 주파수는 60HZ보다 높아지면서
 전력이 낭비되니 60헬쯔로 맞추는게 핵심이다.
그 이후로 전력계통 규모가 방대 하여 지면서 수퍼급 컴퓨터에 의해 자동급전(ALD,ELD)시스템이 전국 발전소를 네트워크화하고 그 하부에는 각 지역별로SCADA(원방감시제어)시스템이 시설되어 발전단가가 각기 상이하고 송전거리가 각각 다른 발전과 소비간에 고도로 복잡한 망 분석하에 안정되고 경제적이며 효율적인 전력계통 운용이 이루어 지고있다.
그뿐만 아니라 전력망은 전국이 하나로 묶여 있어서 한순간 한지점에서의 사고발생은 순간적 대전류
또는 고전압등의 이상상태가 되고  파급되어 종국에는 광역 또는 전국 정전사태까지도 확산될수있는바 실제로 미국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러한 사고가 발생한 예가있다. 이런 상황을 예방하고 조기 조치하기위해 감시하고 신호전송하고 구간 분리차단하는 일련의 계통보호시스템이 필수적이며 이런일
들도 정보통신 분야의 몫이다.
이뿐만 아니라 회사 경영전반에 걸친 사무자동화 경영정보화 시스템에서의 하드웨어나 네트워크를
설계하고 시설하여 유지보수하는 역할도 맏고있다.

   전력회사의 싸이드 업무인 통신으로 입사하여 손색 없이 타의 모범이되고 수월성을 발휘하여 모교의
명예를 높였다. 어떤 동문은 정보통신이 아닌 발전 송배전 토건 연구직 심지어 일반사무 직군에까지 영역을넓혀 나름대로 소신것 활약하고 전력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다. 몇 분들은 재직중에 사법고시 공인회계사 시험등에 합격 하기도 하고  박사학위 받아 교수가 되신분 또 일찍나가 사업하여 성공한분 그리고 몇분은 아깝게 먼저 작고한 분들도있다.  인원수는 체신고 58명과 체신대 10명이었고 체고58명중 1기4명, 2기5명, 3기8명, 4기6명, 5기1명, 6기7명, 7기7명, 8기4명이고 9기 막내 대부분은 체신부
취업 않고 16명이나 막바로 한전에 입사하였다.
1회 김범철선배가 동문들의 지주가 되어 퇴직 하실때까지 후배들을 사랑으로 이끌어 주셨기에 낮선 땅에서 서로들 의지하고 밀어주고 땡겨주면서 3,40년의 긴 여정을 마칠수 있었다..

                   

                   <  한전에 족적을 남긴 동문들  >

    * 1회(4)  :  김범철 문영식 윤금도 김병철
    * 2회(5)  :  이찬수 이명상 이규성 김도술 이성우
    * 3회(8)  :  노춘길 이홍기 문병연 김장한 홍성직 홍순학 이중식 김윤동
    * 4회(6)  :  임웅규 최승기 신대룡 김영환 장근수 윤희중
    * 5회(1)  :  김명진
    * 6회(7)  :  유태웅 김귀복 조봉제 김동수 양병택 남기철 김창기
    * 7회(7)  :  신창범 박원옥 남정열 김철복 한인철 이광수 천국성
    * 8회(4)  :  백태양 송인호 이주현 김영한
    * 9회(16) :  최수남 신동덕 전광일 신굉균 추청환 긴인영 김충부 이환기
                 최동환 박석순 윤덕중 김선계 조경근 정화모 김요희 박두석

 4.  한전의 통신사업 진출

    전력용 자가통신설비가 기술발전에 따라 한전의 전국 송전선을 따라 광통신으로 구축 되고보니 그 용량이 방대하고 품질면에서도 훌륭할 뿐만아니라 안정성 면에서는 그 어떤 통신망보다도 뛰어났다.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어지간해서는 피해를 보지 않았다. 특히 건설단가면에서도 비교 되지않을정도로 저렴했다. 정보화시대가 도래하며 국가적으로 초고속 광대역 정보통신망이 급속도로 필요한 싯점에 이를 활용 하자는 취지에서 관계요로에 건의하고 여론을 조성하여 우여곡절끝에 통신사업자에게 임대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1993년12월에는 종합유선방송(CATV)전송망에 사용토록 전송망 사업자로 지정되었다. 송전선 뿐만아니라 배전선로 에도 광케이불과 동축케이불을 혼합한 HFC(광.동축혼합)망을 보유할수있게 됨에따라 전국 각 가정에 전송망을 시설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난 일이지만 한전이 케이불TV 전송망사업자로 지정받고 지역방송사업자와 전송망 이용계약을 따내는 과정에서 격었던 수많은 고초와 에피소드는 한전 32년 근무기간중 가장 잊지못할 역사의 한페이지가
될것인데 이 대목에서도 한전내 동문들이나 정부측에 있는 동문들의 확고한 국가관이 두드러졌다.
배전선로에 시설한 HFC망은  단순한 방송이나통신 목적만이 아니라 초고속인터넷이가능하고 전기설비의 감시제어를 자동화하고 전력사용량을 원격검침 하는등 다양한 선진화 모델을 구현 할수있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된것이다. 1996년6월 국내최초 초고속 인터넷 시험성공하였고  PCS 이동통신에도 한전의 초고속망 시설들이 이용되는등 우리나라 초고속인터넷이나 휴대무선 통신의 발전에 큰몫을 하였다.
   그러나 한전의 전력사업 구조조정과 공기업 민영화 추진의 일환으로 2000년 1월에 한전에서 통신
사업분야를 분리하여 독립법인 자회사로 발족하므로서  (주)파워콤이 탄생하였던것이다. 뒤이어 LG그룹에 지분45.43%를 매각하면서 경영권을 넘겼고 지금은 LG파워콤으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한전43.13%
의 지분을 가지고 있있고 그간 통신사업 추진에 주역이었던 관계로 한전을 마치고 이 회사에서 더 일할 기회가 있었다.  이 회사는 회선망 임대사업, 케이불TV전송망사업, 초고속 인터넷사업자로서 광케이불 140,665Km, OPGW 12,863Km,  HFC 57,115Km의 설비를 보유하고 자본금 7,500억원 년간매출 8,600억원에  초고속 인터넷가입자 150만의 기간통신 사업자이다.
우리나라의 정보통신 전송망은 KT와 한전 두회사가 맡아서 경쟁적으로 발전 시켜나갔으면 좋았을것을
지금 지역SO등 너무많은 사업자가 난립하여 시설하므로 망체계가 혼란스러워서 언젠가는 정책적으로 국가초고속망의 재편이 검토되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