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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회고록2

碧空 2023. 10. 5. 22:42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내가 처음 만난 건 2004년이다. 일본의 공동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의 간사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그는 자민당의 간사장으로서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꼽히는 정치인이었다. 후유시바 데쓰조(冬紫鐵三) 공명당 간사장과 8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그는 9월 1일 한나라당 대표인 나를 만나기 위해 서울 염창동 당사를 방문했다.

당시 우파 색채가 강한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가 양국 관계에서 큰 이슈였다. 나는 “역사 교과서 문제는 양국 간 해결해야 할 큰 문제다. 미래세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봐 제기하는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자 아베 간사장은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검정 교과서를 합리적으로 선택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2004년 9월 1일 한나라당 당사를 예방한 일본 자민당 아베 간사장(왼쪽 둘째), 후유시바 공명당 간사장(왼쪽)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중앙포토

커터칼 테러 뒤 “깊은 슬픔” 고베산 쇠고기 보낸 아베

2년 뒤인 2006년 3월 내가 일본을 방문하자, 관방장관이던 그는 친절히 맞아줬다. 내가 한·일 관계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자 그는 “생각이 서로 비슷하다. 우리는 호흡이 잘 맞는다”고 맞장구치기도 했다.

2006년 5월 20일 지방선거 직전에 서울 신촌에서 지원 유세를 하던 중 커터칼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그때 아베 관방장관은 편지와 함께 고베산 쇠고기, 고급 과자 마메겐 등을 보내줬다. 테러 후 11일이 지난 때였다. 그는 편지에서 “박 대표가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깊은 슬픔과 근심을 전하려 편지를 쓴다”며 “회복이 빨라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돼 기쁘며 안심하고 있다”는 위로의 말을 남겼다. 그는 당시 편지를 전달해 줬던 일본 프리랜서 언론인 와카미야 기요시씨를 통해 “일본에선 수술을 받은 사람에게 쇠고기를 먹게 해 빨리 건강을 회복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직접 드시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따뜻한 배려가 고마웠다. 나와 아베 총리는 개인적 인연으로만 본다면 좋은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7일 오전 인도네시아 발리 소피텔호텔에서 열린 APEC 기업인자문위원회 간담회에 참석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오른쪽은 아베 일본 총리. 중앙포토

하지만 대통령이 된 뒤 나와 아베 총리의 관계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입장 차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한·일 관계 발전을 위해선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좀처럼 호응하지 않고 회피하려 했다. 국가 차원의 사과와 보상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나는 ‘협조 좀 해주면 좋을 텐데…’라는 안타까우면서도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국제무대에서 마주쳐도 서로 간단히 인사만 하고 지나칠 때가 많았다. 결국 내가 해외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위안부 문제에 협조를 구하며 압박해 ‘백기’를 들게 됐으니, 그는 나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베 총리는 신사였다. 속이 쓰렸을 텐데 국제무대에서 만나면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고 웃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하며 매너를 잃지 않았다. 언젠가 국제회의에서 갈라 만찬이 있었을 때 ‘스키야키’라는 일본 노래가 나오자, 아베 총리는 나에게 “저게 실은 일본의 음식 이름인데, 노래 제목이 되니까 조금 이상하네요”라며 웃기도 했다.

2014년 3월 25일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는 네덜란드 헤이그 미국 대사관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세 번째로 발언한 아베 총리가 서툰 한국말로 박 대통령에게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중앙포토

“내 한국어가 어색했나요”…아베 외면? 진실은 

한때 내가 아베 총리를 싸늘하게 외면해 무안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일화도 있다. 2014년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정상회담 때 대통령 당선 뒤 처음으로 국제회의 석상에서 아베 총리를 만나게 됐다. 당시 아베 총리가 한국어로 나에게 인사했는데, 내가 고개를 돌리면서 외면한 듯한 사진이 공개됐다. 그 이후 아베 총리가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내 한국어가 어색했나요?”라고 물으며 난감해했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아베 총리를 외면했다는 건 오해였다. 헤이그에 오기 전 청와대에서 7시간 가까이 ‘규제개혁 장관회의’를 했고, 중국 측과 시간 조율이 어려워 도착한 날 저녁에 곧바로 한·중 정상회담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피로가 누적되는 바람에 한·중 회담이 끝난 뒤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주사를 맞았지만, 컨디션이 영 엉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중재해 한·미·일 정상회담이 잡혔다. 몸 상태야 어떻든 거기엔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천근만근이고 몸도 떨리는 상태에서 가방을 의자 오른쪽에 내려놓는데 왼편에서 얼핏 “~스무니다”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았다. 그런데 막 회담이 시작되려는 참이어서 되묻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중에야 그때 아베 총리가 한국어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베 총리가 무안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식사라도 같이 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전할까 했는데, 그것도 타이밍을 찾지 못한 채 일정이 끝나버렸다. 내가 일부러 기 싸움 하듯이 아베 총리를 무안하게 만든 것은 절대 아니었다.

위안부 합의 뒤 日서 맹비난 휩싸인 아베

2015년 11월 1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6차 한·중·일 정상회담에 앞서 3국 정상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아베 일본 총리, 박 대통령, 리커창 중국 총리. 중앙포토

하지만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나와 아베 총리의 관계도 그랬다. 처음에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고 양자 회담도 못 한 채로 내 임기 절반이 지나갔다. 하지만 2015년 말 위안부 합의를 거치며 우리 사이에는 점차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안보와 직결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국제무대에서 대북 제재를 논의할 때 아베 총리는 우리와 철저히 한목소리를 내는 중요한 파트너였다. 또 그는 나에게 납북된 일본인들이 빨리 송환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수시로 부탁하곤 했다. 그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우리도 그 문제만큼은 일본을 지지할 수 있었고, 반대로 나는 아베 총리에게 남북 이산가족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나는 한·일 양국이 서로 돕고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또 아베 총리가 위안부 합의 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와 국가 차원의 배상에 동의한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고, 한·일 관계가 새로 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일본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그것에 대해 변명하거나 말을 바꾸지 않고, “한·일 양국을 위해 우리가 이 합의를 잘 지켜 나가자”고 노력한 것을 나는 진심으로 높이 평가한다. 그랬기에 나 역시 국제무대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것을 중단했다. 사실 그간 일본 입장에서는 듣기 거북했을 얘기를 내가 많이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와 나는 위안부 합의 이후 약속을 정확히 지켰다.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한번은 일본 언론인이 주한 일본대사를 만났을 때 ‘한국 측이 합의 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식으로 비난하자, 일본대사가 ‘한국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양측의 신뢰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치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외교에서도 무엇보다 신뢰와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베 총리 불의의 피습 큰 충격…주마등 스쳤다

2015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취임 후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가졌다. 박 대통령이 회담에 앞서 청와대 본관에 도착한 아베 총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대통령 재임 중 일본을 방문하지 못했다. 2015년 11월 1일 서울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아베 총리는 이듬해 10월 말 일본에서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담에 꼭 와달라고 요청했고 나도 그러겠다고 화답했다. 아베 총리는 나의 방일을 무척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도 위안부 합의만 잘 처리되면 가벼운 마음으로 일본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2016.1.6) 때문에 아베 총리와 통화했을 때도 대화 내용은 심각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한·중·일 회담이 열릴 예정이던 2016년 10월이 되자 국내 정국이 매우 어지럽게 돌아갔다. 일본 측에서 내가 회담에 올 수 있는지 걱정을 하는 연락이 왔다. 결국 나는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회담도 취소됐다. 그리고 나는 이듬해 탄핵 결정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만약 내가 갑작스레 물러나지 않고 양국 관계가 지속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모처럼 한·일 양국이 걸림돌을 해결하고 공동 발전을 위해 손을 잡을 수 있는 시점이었는데 예기치 못한 나의 퇴진이 모든 것을 엉클어트렸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보니 더욱더 아쉬움이 커졌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불의의 피습을 당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며 "언젠가 유족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아키에 여사에게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하려 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2022년 7월 아베 총리가 불의의 피습을 당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당시 서로 어려운 결단을 통해 해결을 끌어낸 과정, 그리고 내가 커터칼 테러를 당했을 때 소고기를 보내줬던 아베 총리의 따뜻한 마음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유족인 아키에 여사께도 위로를 드리고 싶었다. 당시 아키에 여사에게 위로 편지를 드리고 싶었는데 여건이 맞지 않아 하지 못했다. 언젠가 유족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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