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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회고록1

碧空 2023. 10. 5. 19:14

내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게 된 것은 2007년 2월 15일 미국 국회의사당에서다. 그날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가 개최한 일본군 종군위안부 청문회에 이용수 할머니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이 할머니는 “16세 나이에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갔다. 강제 성(性)추행은 물론 온갖 폭행과 고문에 시달렸다. 일본군들은 개돼지보다도 더 추악했고, 한국말을 하면 폭행당하기 일쑤였다”며 울먹였다.

2014년 12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평생 모은 재산 1억여원을 기부한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씨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하고 있다. 중앙포토

당시 방미 중이었던 나는 청문회가 끝난 뒤 마련된 별도 만찬에 참석해 이 할머니와 고(故) 김군자 할머니를 만나 그간 겪었던 고초를 위로드리고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드렸다. 그때 나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상태였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 문제를 제대로 그리고 확실히 매듭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이 결심은 뒤로 미뤄야 했다. 그래도 6개월 후인 2007년 8월 1일 미국 하원이 ‘일본군 성노예 결의문’을 채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워싱턴을 방문 중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2007년 2월 15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미하원외무위에서 열린 위안부 청문회를 참관하고 있다. 중앙포토

“위안부 문제, 책임지는 자세 보이라”… 외면한 일본

6년 뒤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나는 비로소 그동안 가슴 한편에 담아뒀던 이 문제에 손을 댈 수 있었다. 취임 직후 관련 기관에 피해자 할머니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할머니 한 명 한 명을 직접 만나 작성한 보고서를 받아본 결과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어 했다. 또 고령이다 보니 진료비, 생계비 등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임기 중에 어떻게든 이 문제를 빨리 매듭짓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이것은 비단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한 몇 안 되는 나라다. 양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이기도 하다.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 더욱 협력해 공동 번영을 해야 하고, 문화적으로도 양국의 청년들이 매우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조성돼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 과거의 응어리가 남아 있으면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위안부 문제는 외면하거나 뒤로 늦출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역대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일본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냈다가도 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정권 말기가 되면 완전히 틀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0월 24일 청와대를 방문한 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대표단을 접견하며 인사말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 문제가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으면 설령 한·일 정상회담을 하고 어떤 결과를 내놓든 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가 없다고 봤다. 그러니 이 문제를 빨리 좀 해결하자, 이번에야말로 한·일의 지도자들이 결단을 내려서 임기 중에 이 문제를 꼭 풀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취임 직후인 2013년 3·1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자기성찰의 거울’이자 ‘희망의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역사에 대한 정직한 성찰이 이루어질 때, 공동 번영의 미래도 함께 열어갈 수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와 동반자가 되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세대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첫 국경일인 2013년 3·1절을 맞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하지만 일본 측에서는 기대했던 화답이 오지 않았다. 이듬해 2014년 3·1절 기념사와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전향적 자세를 촉구했고, 그해 10월 24일 한일의원연맹 일본 측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관계의 새 출발에 있어 첫 단추”라고 재차 강조했다.

“일본, 우리 여성 성노예 삼아” 메르켈, 화들짝 놀랐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나는 마음이 무척 무겁고 안타까웠다. 일본을 더욱 압박하기 위해 외교 무대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2014년 3월 26일(현지시간) 나는 독일 베를린을 방문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드레스덴 선언 때문에 통일 발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나는 메르켈 총리에게 일본의 과거사 문제도 얘기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독일은 철저한 과거사 인정과 반성을 통해 역내 주변국들의 신뢰를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EU의 핵심 국가로 부상했음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문을 연 뒤 위안부 문제를 거론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우리나라 여성들을 끌고 가 성노예(sexual slave)로 삼았습니다.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이 당연함에도 뻔뻔하게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화들짝 놀랐다.

2014년 3월 27일(한국시간) 박근혜 대통령과 앙겔 메르켈 독일 총리가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성노예’라는 표현을 고민 끝에 사용한 것은 서구 사회가 보다 이 문제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봐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서구인들에게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표현으로는 충분히 이해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내 의도는 제대로 전달됐다. 메르켈 총리는 이듬해 3월 10일 방일 기간 중 일본 민주당 대표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중요한데, 그러려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 기자회견을 할 때도 “화해의 전제는 반성”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마이니치신문이나 아사히신문 같은 일본의 주요 일간지에도 그대로 보도됐다. 일본 측은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나는 외교적 압박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후에도 해외 정상들, 특히 영국 여왕 같은 여성 지도자들을 만날 때마다 위안부 문제를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많은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아베 총리를 만나 위안부 문제를 거론했고, ‘일본이 잘못한 것이니 빨리 한국과 합의해 두 나라 관계가 잘 풀리도록 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일본 측은 외교 라인을 통해 우리 측에 불만을 토로하며 중단을 요구했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일본을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제적 압박에 물러선 아베 총리

결국 아베 총리가 결단을 내렸다. 2014년 말 일본 측에서 먼저 협상을 요청해 왔다. 나는 유흥수 주일대사와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에게 극비리에 일본 측과 접촉하라고 지시했다. 공식 외교라인을 통해 위안부 협상을 할 경우 이 사실이 공개되면 양측 모두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 원장의 상대는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郎) 국가안전보장국장이었다. 나는 이병기 원장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정과 사과, 그리고 일본 정부의 보상 등 세 가지를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우리가 합의할 수 없는 것을 고집하면 협상 테이블을 나와도 좋다고 했다. 이 원장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최측근 외교 책사로 알려진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오른쪽)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면담하기 위해 2014년 10월 21일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중앙포토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고 배상한다는 것은 일본군 차원에서 이를 주도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나는 이것이 핵심이라고 봤다. 하지만 일본 측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베 정부는 역대 정부 중 가장 우익적 색깔이 강한 정권이었다. 게다가 그 안에 아베 총리보다 더 강한 우파 인사들도 있었기 때문에, 설령 총리가 해결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추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 비밀 접촉 때마다 자구 하나하나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던 중에 2015년 11월 서울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내가 취임하고 처음으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 것이다. 11월 1일 아베 총리와 단독회담 60분, 확대회담 38분 총 98분의 긴 회담이 이어졌다.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가입도 협력하기로 하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지만 역시 핵심은 위안부 문제였다. 나는 아베 총리에게 “올해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인데 해가 넘어가기 전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냐, 가장 시급한 문제이니 협의를 가속화해서 해결하고 넘어가자”고 말했다. 이에 아베 총리도 연말 전에 끝을 맺자고 동의했다. 그 이후 협상이 속도를 내면서 12월 28일 합의를 끝낼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5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날 양국 정부는 서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 사업을 추진하기로 정하면서 ▶일본 정부가 10억 엔(당시 약 100억원) 기부 ▶아베 총리의 사과와 반성 표명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 확인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비판 자제 등을 담은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로써 1991년 8월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증언하면서 불거진 한·일 관계 최대 난제(難題)가 24년 만에 타결된 것이다. 보고를 받은 나는 ‘수고했다’고 치하한 뒤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2015년 12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왼쪽)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윤미향, 할머니 귀 막고 여론몰이…말문 막혔다

어렵사리 합의에 도달했지만 여론은 좋지 않았다. 합의 결과가 발표되자 야당과 시민단체 등은 ‘굴욕 협상’이라며 철회를 요구했다. 나라고 해서 합의안에 100%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가 간 협상이라는 것은 항상 주고받는 것이다. 우리 뜻만 100% 관철하는 협상이란 건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합의문 이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본 정부 예산으로 위안부 재단 출연금이 나온 것도 최초였다. 일본의 국가 예산에서 10억 엔을 받은 것은 일본의 간접적 국가 책임 인정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국가 책임이 전혀 없다면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해 일본이 국가 예산을 사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최대치였다.

2015년 12월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중앙포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어서 어떤 합의안이 도출되든 어디에선가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의 전신, 이하 정대협) 측에 충분히 알리고 이해를 구하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협상팀은 합의 전후로 몇 차례 이들을 찾아가 협상 과정을 알렸다. 재단이 설립되고 기금이 마련되면 할머니들을 위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이들의 의견도 미리 청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자 그동안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정대협 측이 “합의 내용을 사전에 들은 적이 없다”며 반대 여론에 불을 붙이고 나섰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나중에 알아보니 정대협 측은 할머니들에게 이런 합의에 대해 전혀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윤미향(현 무소속 의원) 정대협 대표가 할머니들에게 합의 내용을 전달하고 중지를 모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정대협 측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합의가 발표되자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들의 거짓말은 훗날 관련 자료가 공개돼 모두 드러났지만, 이미 합의안은 만신창이가 된 이후였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5년 12월 3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일 간에 타결된 위안부 협상에 대해 “우리는 이 합의에 반대하며, 국회의 동의가 없었다”며 한일협상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문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이날 국회에서 재협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중앙포토

한국의 야당과 시민단체의 주장대로 위안부 합의가 ‘굴욕 협상’이었다면 일본에서는 오히려 큰 환영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일본에서도 강경 우파를 중심으로 “우리가 너무 양보한 거 아니냐” “위안부 문제에 종지부를 찍은 게 아니라 패배의 시작이다” “이것을 일본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겠냐”며 여론이 들끓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다. 협상 타결 후 청와대 고위관계자와 야치 국장의 만남이 있었다. 일본에서도 협상 비난 여론이 빗발칠 때다. 하지만 야치 국장은 “위안부 문제 합의는 한·일 관계의 장래를 생각할 때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합의가 앞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합의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아베 총리도 꿋꿋하게 “아무리 욕을 먹어도 이건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본은 앞으로 어떤 잡음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합의 사항을 이행해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거기엔 나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한번 결심하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합의를 지킬 것이란 점을 아베 총리는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안부 소녀상 조치’ 日 요구에 “강압적 철거 안 돼”

문재인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라는 것이 꾸려져 위안부 합의에 ‘이면 합의’가 있었다는 발표를 했다. 그 내용은 ▶정대협 등 ‘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 설득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 관련 적절한 노력 ▶제3국에 위안부 기림비 등 설치 미지원 ▶‘성노예’ 대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 등을 비공개로 일본 쪽과 합의했다는 것이다. 마치 대단히 부정한 뒷거래가 있었다는 식의 뉘앙스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일본 측이 협상 초기부터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동을 요청한 것은 맞다. 일본은 “어떤 침입이나 손해에 대하여도 (영사) 공관 지역을 보호하며, 공관(영사기관)의 안녕을 교란하거나 품위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단계를 밟을 특별한 의무를 가진다”는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22조 제2항’ 등을 근거로 들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018년 12월 27일 오후 서울 외교부에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 결과에 대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일본은 소녀상이 일본대사관에서 수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고 시위가 열리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니 한국 정부에서 조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우리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협상팀을 통해 “이것은 민간 차원에서 설치한 것인데, 정부가 강압적으로 철거할 수는 없다. 다만 양쪽에 바람직한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만 전달했다. 일본 측도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 이런 게 소위 ‘이면 합의’의 진실이다. TF의 나머지 발표도 대개 이런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당시 우리 쪽에서도 일본 측에 공식 합의 외에 부탁한 것이 있었다. 주일 대사 등을 통해 들어보니 일본에 사는 교포들의 가장 큰 숙원 중의 하나가 ‘혐한(嫌韓) 헤이트 스피치’ 해결이었다. 일본 극우세력들이 한국 관련 상점이 밀집한 거리에 와서 확성기를 시끄럽게 틀어놓고 온갖 혐한 관련 발언을 쏟아내니 참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곳을 찾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이곳에서 장사하는 교포들이 큰 고통을 받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위안부 협상 때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측에 협조를 부탁했고 일본으로부터 성의 있는 조치를 약속받았다.

아베 총리는 2016년 1월 13일 일본 도쿄 관저에서 한일의원연맹의 한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혐한 시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국회에서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후 도쿄, 오사카 등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 혐한 시위를 포함해 헤이트 스피치 관련 집회로 판단되는 경우 도립(都立)공원 등의 공공시설 이용을 제한한다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어 2016년 5월 24일에는 헤이트 스피치 관련 대책법(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향한 대응 추진에 관한 법)이 일본 국회를 통과했다. 물론 이후 일본에서 정치인들의 한국 관련 망언 등이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가 700명이나 되는 의원들을 일일이 단속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나. 어쨌든 협상 당시 일본 측이 한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확인할 수 있었고, 합의가 틀어지지 않도록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본은 안보,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와 논의하고 협력할 사안이 많은 나라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양국 관계가 발전하는 데 너무나 큰 걸림돌이었다. 양국이 해결을 도모했지만 24년이나 매달리고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불행했던 과거를 마무리하고 후대에 더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선 정치인의 결단이 필요했다. 사실 대통령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서 후임자에게 과제를 떠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국가 지도자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외교협상이란 것은 상대가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100%를 다 얻을 수는 없다. 우리가 100% 일본은 0%, 이런 것을 기대하면 협상 테이블은 깨지기 마련이다. 또 협상 과정에서 서로 갈등하고 충돌했더라도 일단 합의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 간의 합의는 국제사회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들여 만든 위안부 합의가 나중에 문재인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실상 폐기처분됐다는 소식을 옥중에서 들었을 때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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