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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회고록2

碧空 2023. 6. 12. 14:55

"천황을 일왕이라 부르는 건 열등감" 도쿄 뒤흔든 DJ 파격 [김대중 육성 회고록 2]

 

김대중 육성 회고록 〈2〉

김대중 대통령(앞줄 왼쪽)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오른쪽)가 1998년 10월 8일 11개항의 ‘21세기 한· 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천황 폐하!”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통령(DJ)의 일본 국빈 방문 첫날. 도쿄 황궁에서 열린 만찬장이 잠시 술렁였다. 김 대통령이 아키히토(明仁)를 향해 ‘천황 폐하’라고 부르며 깍듯이 예우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천황 폐하 내외분” “천황 폐하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길…”이라며 극존칭을 썼다. 당시 국내에서 주로 쓰던 ‘일왕’ ‘국왕’ ‘일황’이란 호칭의 벽을 깬 파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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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천황 부르니 우리도 그대로 해야

DJ는 생전의 구술 동영상에서 “우리 안의 열등감”을 지적하며 천황으로 올려 부른 경위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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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여왕이라 하니까 우리가 여왕이라 부르고, 스페인은 황제라고 하니까 황제라 불러준다. 미국은 대통령이라고 하니까 대통령이라 불러주고, 일본 사람은 자기들이 천황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그대로 불러주면 된다. 왜 우리가 따로 이름을 붙이는가. 잘못된 일종의 열등감이다. 외교적으로도 결례다. 천황이라고 하자.”

문재인 정권 시절 ‘친일 토착 왜구 몰이’가 성행했다. 사회 일각에서 천황 대신에 일왕으로 깎아내리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천황이란 존칭에 대해 ‘자존심 상한다’ ‘굴욕적이다’는 이유를 댔다.

그날 천황 주재 만찬에서 DJ는 일본의 과거사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일본 사람이 숭배하는 천황에게 따지는 것은 일본 국민 감정상 좋지 않다. (천황은) 과거사와 관계도 없는 사람이고, 정치와 관계가 없는 상징적 존재다.”

아키히토 천황은 일제 강점기와 무관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아버지 히로히토(裕仁, 1901∼89년)로부터 1989년 천황을 물려받아 2019년까지 상징적인 국가원수로서 재위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현실 인식과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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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20세기의 원한과 상처를 봉합하고 21세기로 나아가고 싶어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와 같은 국내의 충동적 대응과 일본의 우경화 바람을 동시에 억지하고 앙금을 풀고자 했다.

그런 현실 인식과 자신감의 연장선에서 나온 게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다. 방일 이틀째인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과거사 인식을 포함해 11개 항의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오부치)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습니다.”

(김대중)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란 뜻을 표명했습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취지였다. 일본 총리가 한국을 적시해 피해에 대해 사죄하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말로는 ‘사죄’라고 했고, 일본말로는 ‘오와비(おわび)’라고 했다. ‘오와비’라면 사과 정도의 말이지만, 우리말로 ‘사죄’라고 표현하는데, 일본이 동의했다.

문화적 쇄국주의 나라는 망한다

DJ가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무릅쓰면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관철한 데는 그만한 철학이 담겨 있다. 일본 관계를 중시한 이유에 대해 DJ는 자신의 육성으로 남겼다.

첫째, 문화쇄국주의 망국론이다. “어떤 나라건 문화적 쇄국주의를 하는 나라는 망한다. 문화는 상호교류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DJ가 일본의 대중문화를 국내에 개방한 배경이다.

당시만 해도 일본 문화는 ‘왜색(倭色)’이라며 터부시했다. 개방에 대해 ‘왜색 문화 범람’ ‘문화식민지’를 앞세워 많은 지식인이 질색했다. 돌이켜 보면 DJ의 개방 정책은 신의 한 수였다. 일본에서 한류가 일어나는 동기가 됐고, 나아가 오늘날 세계를 휩쓰는 K팝 열풍을 태동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둘째, 융합발전론이다. 서로 뒤섞여 부딪치며 장단점을 취해 발전하는 것이 문화라고 봤다. 과거사와 열등감에 갇혀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유럽과 서구, 중국 문화는 좋은데 왜 일본 문화는 왜 안 된다 하는가? 우리가 중국에서 문화·유교·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야만국가로 소멸하거나 중국의 일부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그걸(문화·유교·불교) 받아들여 해동 불교와 조선 유학 등 내 것으로 재창조했다. 일본 문화에 문을 열어야 하는 까닭이다.”

‘도랑에 든 소’ 활용한 균형외교 중요

셋째, 균형외교론이다. 대한민국의 이익과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은 외교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일본도 그 운명결정자 중 하나라는 인식이다.

“지도를 보면 우리 옆에 일본·중국·러시아, 그리고 미국이 있다. 이렇게 세계 4대 강국에 포위된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뿐이다. 4대국 중 단 한 국가라도 우리한테 심술부리면 영향이 크다. 통일을 비롯해 우리의 안전을 도와주지는 못 줄망정 해칠 능력은 있다. 하나라도 ‘노(No)’ 하고 나서면 어려워진다. 그게 우리가 처한 숙명이다.”

넷째, ‘도랑에 든 소’라는 긍정적 인식론이다. DJ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라는 주장을 배척했다. 대신 중국과 일본을 도랑에 든 소처럼 활용하자고 했다. 도랑에 든 소는 양쪽 둔덕(중국과 일본)의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다. 먹을 것이 많아 유복한 처지에 있는 지정학적 환경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는 비유였다.

“도랑에 든 소는 양쪽 풀 뜯어 먹는다. 중국과 일본 양쪽에서 우리가 돈벌이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일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면을 확충시키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방일 당시 DJ는 중의원·참의원 양원 의원들을 상대로 연설에서 먼저 아픈 역사를 언급했다.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 역사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백 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 초 식민지배 35년간입니다. 이렇게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방점을 찍었다. “양국 간에 오간 엄청난 인적·물적 교류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가야 할 두 나라의 끊을 수 없는 인연입니다. 우리 양국이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서 함께 손잡고 21세기를 개척해 나가는데 극복하지 못할 장애는 없을 것입니다.”

올해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나온 지 25년이 되는 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두 나라 관계를 크게 진전시킨 획기적 선언으로 평가받는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올 3월 정상회담 때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호출했다. 두 정상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한·일 간 협력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5월에는 기시다 총리가 방한하고,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두 정상이 다시 만나면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실천 여부가 주목을 끌고 있다.

윤석열-기시다의 김대중-오부치 선언 소환

한·일 관계를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빗댄 DJ의 명언은 현실적이다. 양국의 역사적 갈등과 상처를 하루아침에 뚝딱 지우고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미래로 손잡고 가기란 ‘기적’에 가까울 수 있다. DJ는 생전에 “(자신의 방일 이후) 관계가 좋았는데 일본이 아베 신조 총리를 정점으로 우경화가 됐고, 우리나라에서는 독도 문제 등을 들고나와 더 악화하는 악순환의 상황이 됐다”고 아쉬워했다.

한·일은 피할 수 없는 인연으로 얼기설기 엮여 있다. “불행한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를 열어 가자”고 다짐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21세기의 시대적 요구를 꿰뚫는 혜안이다. 이 선언에 문화 쇄국주의 망국론, 융합발전론, 균형외교론, ‘도랑에 든 소’ 활용론이란 자신의 신념을 접목하면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DJ의 믿음이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10월 개방 방침을 천명한 뒤 이뤄진 정책이다.  1차(1998년 10월) 때 공동 제작 영화와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개방하고, 일본 배우의 한국 영화 출연을 허용했다. 일본어판 만화와 만화잡지에도 문을 열었다. 2차(1999년 9월) 때 공인 국제영화제(총 70여 개) 수상작과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전체 관람가 영화의 상영이 가능해졌다.

3차(2000년 6월) 때 12·15세 관람가 영화와 국제영화제 수상작인 애니메이션의 상영이 허용됐다. 대중가요 공연의 좌석 제한을 없애고, 콘솔용 게임을 제외한 PC 게임도 유통됐다. 2003년 9월 4차 개방 정책을 발표하며 영화·음반·게임 분야에서 문을 완전히 열었다.

3회 〈DJ는 박정희를 왜 용서했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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