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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碧空 2021. 10. 20. 18:51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눈물"

한국원예연구소장 



우장춘 박사가 왜 아직도 "씨없는 수박 만든 사람" 으로만 알려져 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씨없는 수박은 '기하라 히토시' 라는 이름의 일본인 박사가 처음 만들었고,
그걸
우 박사가 한국에 들고 온 것인데도 말이다.

짧게 요약 하자면,  우장춘 박사는 일제와 6.25전쟁이 말아먹은 불모지 한반도를,
먹고 살만한 땅으로 바꿔 놓은 구국의 위인이다.

우박사는 출생부터가 기구했다.

1898년 생인데, 아버지가 친일부대의 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역적 우범선
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전세 역전,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 우범선, 일본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2남을 생산하는데 그중 장남이 우장춘이었다.
우범선의 증언에 따르면 억울한 면도 있다는데 뭐 어쨌든 그 문제는 그 정도 해두고...
우범선은 우장춘의 나이 5살 때 대한제국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된다.

아버지 우범선(왼쪽)의 죽음으로 이 가족은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진다
조국을 배신한 역적의 최후는 비참했다.

이때 부터 우장춘 가족은 그야말로 떠돌이 집시만도 못한 최악의 삶을 살게 된다.
조선에선 배신자 역적의 가족, 일본에선 이용가치 없는 쓰레기 트기 가족으로 전락,
과부가 된 장춘의 어머니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려,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겨 버린다.
그리고, 무슨 동화책 속의 주인공마냥 조선인 우장춘은
고아원생들의 무지막지한 이지메
공격에 시달린다.

일반적으로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들고 폭력에 시달리며 크면,나중에 일탈행위를 하기
마련인데 우장춘은 그 반대였다.

그는, '기어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너희들에게 복수하겠다' 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장춘의 어머니도 훌륭한 여인었던 모양이어서. 기어코 돈을 벌어 장춘을 집으로 데려와
대학까지 보낸다.

그것도 그냥 대학이 아니라 명문 동경제국대학을.


동경제대 재학시절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한 장춘은, 일본 농림성에 취업해
혁혁한 업적을 쌓으며
승승장구한다.

근데 1937년 어느날 일본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짜기 해임된다. 
장춘이 일본에서 살아남는 길은 일본인이 되어서 일본 이름을 쓰는 것 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는 결혼하려고 일본인의 양자가 돼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 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지만 정작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논문과 공문 기록에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한국 성인 "우"를 집어 넣었다.

우장춘에게 일본은 혹독한 굶주림과 차별과 폭력의 나라였다.
일본에서 이민자가 얻을 수 없는 엄청 높은 지위를 얻긴 했으나 그건 순전히 장춘이 혼자
잘나서
그리 된 것이고, 자신의 가족을 그토록 짓밟았던 제국주의에 미쳐 날뛰는 일본은
우장춘에게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할 적국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인 이라는 정체성에 매달렸다.
그러나 괴롭게도 조선은 우장춘을 역적의 아들로 낙인 찍었지만  
여전히 조선은 일본에게
짓밟힌 약자였다.

해임 후 지방의 농장장으로 재취업,
연구 활동에 몰두하던 우장춘
그는 결코 여생을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보낼 수 만은 없었다 .

육종학계 최고 권위자라는 명예를 간직한 채 일본 이민자 역사에 빛나는 태양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우장춘에겐 운명이 정해준 사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제로 부터 해방된 조선, 아니 대한민국이 그를 애타게 찾기 시작한 거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1947년부터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실력자 우장춘을,
"같은 민족" 이라는 미끼로, 영입하고자 했다.
당시 한국은 미리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를 만들어 놓고,
소장 자리를 우장춘을 위해 공석으로
둔 상태였다.

우장춘의 가족에게 "이적료"로 1백만엔을 보낼 정도로 열성이었다.

당시 1백만엔이면 엄청난 돈이었다.

우장춘은 이미 골수 깊은 민족주의자 였는지도 몰랐다.
난 조선에서 죄인 이겠지 라고 생각 하고 있었는데
조선이 먼저 "어서오쎄요" 하는것을 보고
무척 감격했던게 분명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쓰라고 준 돈 1백만엔을 탈탈 털어
한국에 심을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
그리고 당시(1950년) 한국 전쟁이 한참이었던 부산에 와서
그 나이에 군복무까지 했다.
당시 높으신 양반들은 군 면제시켜 주려고 했는데
우장춘은 거부하고 입대를 했단다.
(허허... 이런 때는 헛웃음만 흘릴수 밖에 없다.)

암튼, 공석으로 남겨뒀던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우장춘 그러나 소장이면 뭐하나,
전쟁으로 쑥대밭된 나라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연구소는 소장 자리만 만들어 놓고 잠 잘 곳도, 씻을 곳도, 수돗물 나오는 곳도,
전기 들어오는
곳도
안 만들어 놓았단다.
심지어 입을 옷도 없어서 우장춘 소장은
행사장에 누더기 외투에 고무신 끌고 나갔다 한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 우장춘은 10 여년 동안
대한민국을 기어코 구원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 업적의 핵심은 바로, 우량 종자 개발,
농업만 그랬겠냐만은 일제 치하의 조선은 철저하게
일본에 종속된 '식민농업지',였다.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와 일본식 기술로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일본이 패망한 뒤로는 그게 불가능
해졌다.

식량조차 자급자족이 안 되는 나라,
이 처절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수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우장춘은 가장 먼저 우량 종자 개발에 주력,
최단시간 내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토마토,
수박, 참외 등에 걸쳐 20여 품종에서 종자를 확보한다.

그 외에도 한해 두번 수확하는 벼 품종 개발 등 무수히 많다

이로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 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
우장춘이 얼마나 천재였는지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바로 제주 감귤 이었다


-일대기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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