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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의 역사

碧空 2011. 3. 4. 14:23

                         

대한민국의 국호와 애국가 시원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자랑스러운 우리의 국호 ,대한민국!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국호인

대한민국의 유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가 늘 쓰는 "대한민국"이지만

누가 언제 왜 이국호를 만들었는지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1897년  조선말경 고종황제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황천상제께 천제를 올리고 환구제를 거행하고

"대한민국"의 근간인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풍전등화의 국운 아래

흥성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무능한 임금으로 그려진 고종황제.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당시 일본인이 왜곡해낸 이미지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환구단 STB 상생방송은

(환구단의 비밀)을 통해

고종황제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완전히 뒤엎는 놀라운 이야기와

환구단이 갖는 엄청난 역사적 가치와 이미지를

방송 역사상 처음으로 명쾌하게 밝혀내고있다

지금으로 100년전

 

그시대로 여행을 떠나 봅시다,

1896년 2월11일.

고종은 일본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의 목숨을 빼앗기고,

자신과 세자를 연금하며 생명까지 위협하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몽진하자 친일내각 정권은 무너지고

이로 인해 일본의 독주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늘 도움을 줄 것 같았던 러시아도

아관파천 이후 군사권과 재정권을 거머쥐고

조선을 앞박하기 시작했다.

1년만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

즉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관파천을 무능한 왕이 자신의 안의를 위해

타국 공사관에 몸을 의탁한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건으로 배워 왔다.

그러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근대 국가 건설의 근간을 마련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환궁 후. 고종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제사회에서

자주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 체제의 정비를 통해

근대 국가의 틀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경운궁 수리를 명하면서 이를 시작으로.

도시의 위생 문제와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로 확장작업을 시작했고

도성에는 많은 근대식 공원을 만들었다.

특히.독립신문 창간 및 독립공원과 독립문 건설을 후원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독립과 자주 의식을 심어 주었다.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나라와 일본의간섭을 벗어나

조선을 압박하는 세계 열강들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고종에겐 왕권을 회복하고

개혁을 주도할 좋은 기회였다.

그 열쇠는 친제건원 .곧 고종이 황제되고

조선을  황제국으로 격상시켜

새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찬성의 의견도 많았지만

사대주의자들의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7년 8월 15일 고종은 연호를 친일 내각에 의해 만들어졌던

"건양"에서 "광무"로 바꾸고 다음날 이를 반포한다.

그리고 황제국에 걸맞게 세자를 황태자로 부르도록 했으며.

을비사변으로 시해된 왕비는 명성황후로 추존한다.

국왕이 입던 자주색 곤룡포도 황색으로 바꾸었다

경운궁의 정전으로 각종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행하던

중화전답도에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져 넣었다.

용을 황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우라나라 궁궐중 유일하다

 

환제국의 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재정한 다음.

천상의 황천상제께 천제를 지내기 위한 천단,

즉 환구단을 만들어야 했다.

천제는 황제국의 출범을 대내외에 알리는 가장 중요한 행사 였다.

 

환구단에서 진행되는 천제는

대한제국이 황제국의 위상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때 시행된 환구제는 동지에 하늘에 감사함을 고하는

"동지교사례"를 바탕으로

고종이 제천 문화를 새롭게 복원하고 규정한 것이다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고 1897년 10월 11일.

대신들과 함께 국호를 "대한"으로확정했다

 

또한 국새 손잡이도 거북에서 천자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꾼다.

다음날 10월 12일 황천상제께 천제를 올린뒤 죽위식을 거행한다.

(그럼 잠시 고종실록 36권.양력 10월9일 )살펴봅시다

"오직 상제가 날마다 여기를 내려보고 있으니

마땅히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털끝만큼이라도 정성스럽지 못한 뜻이 있어서는 안된다.

상제가 내려와 그대를 보고있으니 그대는 딴 마음을 먹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다만 아득히 멀고 귀신이 은미하다는 것만 알 뿐이지

구석구석 훤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대체로 정성이 있으면감응하고 정성이 없으면 감은이 없으니

ㅈ제계하고 깨끗이 하며 의복은 성대히 하여 제사 받들기를

마치 하늘이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듯 하여야 한다 " 기록 되어 있다

 

또한 1981년 2월 황궁우 복원공사를 하던중

황궁우 살량문에는 고종황제가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상제님꼐 고하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상제님꼐 정성을 다하여 상량하오니 상량후에 국운이 장구하고

만민이 복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록 되어 있었다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을 출법이후

고종황제는 광무개혁을 단행한다.

경제 교육 언론 의료 군사 사법제도 등 다양한 방면에

폭 넓게 개혁 사업을 펼침으로써 사회 분위기는

일시에 활기를 띄우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쳐흘렀다.

또한 고종황제는 차관을 도입해 철도와 광산 개발을 시작하여

열강의 이권 침탈을 견제했다.

특히 1898년에는 그동안 사용되던 다양한 태극기를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통일해 전국에 공포했고

1902년 8월에는 대한제국 애국가를 지어 보급했다

상제는 우리/황제를 도으소서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갓치 쌓으소서/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복록이 무궁케하쇼셔

상제는 우리/황제를 도으소셔/

(황성신문.1904년 5월 13일자)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애국가 가사는 친일파였던

윤치호가 1907년 당시

여러 애국가를 참작해 개사한것으로 추정되며

곡은 1936년 안익태가 작곡해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애국가로 불리게 된것이다

 

근대화 정책의 기틀을 마련한 고종 황제는 1904년 1월

열강의 틈에서 대한제국을 중립국으로 선포하고

발전과 안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 열강은 고종황제의 꿈을 무참히 무참히 무너뜨렸다

1905년 11월9일 한국에 온 일본의 전권특명대사 이토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주 내용으로하는 5개 조항의

한일협상조약을 내밀고 고종을 협박했다.

고종황제는 끝까지 인준하지 않았으나

이토는 18일 조약체결 사실을 내외에 공표했다

이것이 바로 "을사보호 조약"이다

고종황제는 국권 회복을 위해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하며

여러 나라에 특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1910년 8월29일 일본의 칙령

 제319호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건"을 발표한다

이른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한일 협약 조약이다

비야흐로 한반도에 일본의 총독정치가 시작 된것이다.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 나간다

일본은 우리나라 이름도 자주와 독립의 상징성인 "대한"이 아니라

중국에 사대조공을 하던

나라의 이미지를 심기 위해"조선"이라 표현한다

조선은 본래는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또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

개혁파와 수구파의 극한 정치적 대결이 조선을 파멸로 이끌면서

고종황제를 무능한 군주로 끌어 내렸다

허나~고종황제는 우리가 아는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1914년 9월30일 일제는 환구단을 헐고

거기에 조선경성철도 호텔을 세운다

1945년 광복후 일본에 의해 건립된 철도 호텔은 헐렸지만

그 자리에는 환구단이  아닌 조선호텔이 들어 서기에 이른다

현재는 호텔의 정원인양 황궁우만 외롭게 서있습니다

백년전 역사 하나만 보아도

우린 새 역사를 다시 써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과 함께 마음것 외치고 싶슴니다

 

깨어나라  국민들이여 각성하라 국민들이여

113년전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날. 고종황제가 이루고자 했던

 그꿈이 지금 우리가 애타도록 바라고 있는 그 꿈이 아닐런가

우리는 같은 땅 .같은 하늘아래에 살고 있는 한 민족에 자손인지라

남을 미워하지도 말도 남에 헌담도 하지 말며

이웃을 도와주고 이웃을 사랑하여

국가 안보에 소중함을 간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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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圜丘壇)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이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종 목 사적  제157호
명 칭 환구단(圜丘壇)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제사유적/ 제사터
수량/면적 3필지/4,278㎡
지정(등록)일 1967.07.15
소 재 지 서울 중구  소공동 87-1
시 대 대한제국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