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하자 !!

참되고 바르게

역사·정치·경제·과학

[스크랩] 우리들 선대들이 치러온 ‘보국대’-‘노무단’

碧空 2011. 2. 19. 10:46

 

 

 

 

 

 

 

 

 

 

 

 

 

우리들 선대들이 치러온보국대’-노무단

 

 

(작성 중 : 징용시리즈 3회)

 

 

6.25 당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침략전쟁을 일으킨 북한공산군의 만행과 그 시절 ‘보국대(保國隊)’에 얽힌 우리들 선대(先代)들의 고통의 세월이 너무나 뼈저려 6.25노래를 먼저 게재한다.

 

6.25노래는 아래에 있는 4각형 안의 ‘하이퍼링크’를 ‘마우스’로 클릭하면 필자가 ‘외동이야기’에서 쓴 “잊혀진 그날 그 노래 - 6.25와 6.25노래” 기사가 나타나면서 노래가 흐른다.

 

이때 우측 상단의 ‘숨기기(최소화) 단추’를 ‘마우스’로 클릭하여 노래 창을 하단으로 숨기면 기사의 본문을 읽을 수 있고, 6.25노래를 끝까지 들을 수 있다.

 

 

 

http://blog.daum.net/cyb661/15243291

 

 

 

 

 

 

6.25 노래

 

 

작사 : 박두진

작곡 : 김동진

 

 

 

(1)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갚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6.25 당시의 ‘보국대(保國隊)’와 ‘노무단(勞務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앞선 파일에서 기이 소개한 바와 같이 우리들의 외동읍(外東邑) 선대들은 현대사(現代史)에서 불과 10여 년 간에 세 가지의 ‘보국대(保國隊)’를 거쳐 왔었다. 물론 부유층과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의 경우는 예외였다.

 

하나는 일제(日帝)가 태평양전쟁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로 중노동에 동원하고자 만든 ‘근로보국대’, 두 번째는 6.25동란 당시 우리나라에서 조직한 ‘국군보국대(國軍保國隊)’, 세 번째는 역시 6.25당시 북한군(北韓軍)이 운영한 ‘인민군보국대(人民軍報國隊)’가 그것들이다.

 

우리나라가 운영했던 ‘보국대(保國隊)’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불법으로 남침하자 이 해 7월 26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6호로 발령한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근거하여 편성한 노무자부대로 침략군(侵略軍)을 물리치기 위한 전쟁에 노무(勞務)를 제공하여 국가를 지키는데 공헌한 조직이었다.

 

이하에서 얘기하는 ‘한국노무단(韓國勞務團)’, ‘민간노무단(民間勞務團)’, ‘노무단’, ‘노무자부대(勞務者部隊)’, ‘노무부대’, ‘지게부대’는 모두 같은 말로 6.25 당시 우리나라의 ‘보국대(保國隊)’를 이르는 말이다.

 

 

 

제복을 착용한 ‘한국노무단’

 

 

 

 

 

반면 일제(日帝)와 북한군(北韓軍)이 운영한 ‘보국대(報國隊)’는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본천황(日本天皇)과 ‘김일성(金日星)’ 수상(首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라는 조직이었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보국대(保國隊)’는 나라를 보호(保護)하라는 의미의 ‘保’자를 사용했고, 인간에의 충성을 요구했던 일제와 북한군의 ‘보국대(報國隊)’는 인간이 아닌 신(神)으로서의 일본 천황(天皇)과 김일성 수상(首相)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의미의 ‘報’자를 사용했었다.

 

이 ‘보국대(保國隊)’나 저 ‘보국대(報國隊)’나 그들의 역할은 군사시설(軍事施設)의 유지보수나 전방고지(前方高地)에 식량과 탄약(彈藥)을 짊어지고 운반하는 등 강도 높은 육체노동이 주요과제였다.

 

 

 

 

보급품을 짊어지고 고지를 오르는 보국대원

 

 

 

 

 

이들은 원칙적으로 고용계약(雇傭契約)에 의해 동원되도록 되어 있었으나, 거의가 강제동원(强制動員) 방식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생계영위(生計營爲)의 방편으로 자원하기도 했었다.

 

일제시대(日帝時代)의 경우 형식적으로는 ‘계약’의 방식을 취했으나 모두가 사기극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일본정부(日本政府)에서까지 생사를 넘나들면서 죽을 고생을 하며, 강제노역(强制勞役)에 신음하던 그 시절 조선인 ‘보국대’의 임금지불을 거부하고 있다.

 

일제의 관헌(官憲)들이 의도적(意圖的)으로 명단을 작성하지 않았거나, 당시에는 작성했더라도 폐기(廢棄)시켜버려 임금지불(賃金支拂)의 근거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리고 6.25때 인민군(人民軍 ; 북한군)이 활용한 ‘보국대(報國隊)’는 주로 그들이 점령한 지역의 남한(南韓) 측 장정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숙청(肅淸)의 대상인 지주와 친일분자, ‘국방군(國防軍)’이나 경찰(警察) 가족들은 자신과 가족이 인민재판(人民裁判)에 의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청하여 ‘빨간 완장’을 차기도 했다.

 

 

 

6.25 당시의 인민재판

 

 

 

 

 

 

여기에서 말하는 ‘빨간 완장’이란 6.25 당시 북한군(北韓軍)이 점령한 지역의 마을단위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 위원장이나 여맹(여성연맹) 위원장들이 팔에 공산당을 상징하는 빨간색 완장(腕章)을 착용했는데, 이를 ‘빨간 완장’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보국대의 경우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일제 때와 같이 충원(充員) 형식은 ‘계약(契約)’방식이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동원(强制動員)이나 보복의 수단으로 병행되기도 했었다.

 

 

 

빨간 완장

 

 

 

 

 

행정단위별로 할당된 인원을 충원하지 못할 경우 동네 구장(區長)에게 밉보였던 장정(壯丁)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차출(差出)된 것이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칙적(原則的)으로는 ‘전시근로동원법(戰時勤勞動員法)’에 근거하여 보통의 수단으로는 군 작전상 필요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곤란할 때, 보상(報償)을 지급하는 전제 아래 행해지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는 6.25동란 중 일제 때의 ‘근로보국대’의 재판(再版)으로 등장한 우리나라 ‘보국대(保國隊)’와 북한군의 ‘보국대(報國隊)’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기술한 대로 ‘보국대’는 일제(日帝) 때 창설되었고, 6.25당시에는 남한(南韓)에서뿐만 아니라 북한 인민군(人民軍)에서도 운영하고 있었다.

 

남한의 경우 일제 때 ‘보국대(報國隊)’ 업무를 담당하던 조선인 관리들이 신생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관리로 자리를 옮겨 앉아 충분한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어 그 도입이나 운영에서 문제가 될 것은 조금도 없었다.

 

일제 때 일본군(日本軍) 장교와 고급관리로 재직했던 자들이 그대로 눌러 앉아 일제의 징용(徵用) 관련 법규를 베껴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었고, 일제 때 자신들의 상전(上典)인 ‘왜놈’들에게서 보고 들은 대로 꾀고, 잡아들이면 간단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보국대(保國隊)’를 통솔할 군대(軍隊)의 고위지휘관들도 이의 구성을 실질적으로 추진한 경찰수뇌부(警察首腦部)도 모조리 일제의 ‘천황폐하(天皇陛下)’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선에서 ‘일본군보국대(日本軍報國隊)’를 지휘해 본 일본군장교(日本軍將校)나 경찰간부 출신이었으니 보국대 따위의 구성과 운영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는 얘기다.

 

조직이든 운영이든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과 그 하수인(下手人)이었던 조선인 상전(上典)들이 하던 대로 따라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해방당시의 일제출신 친일경력 경찰간부 현황(1946.11월 현재)

 

 

 

 

 

그러나 ‘보국대(保國隊)’의 인원과 명단의 경우 일제(日帝) 때 쓰던 방식을 그대로 우리나라 ‘보국대’에 써먹은 것은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가 우리나라 장정들을 ‘보국대(保國隊)’로 끌고 갈 때 누가 어디로 갔는지 그 명단을 제대로 만들지 않았거나, 폐기했던 것처럼 6.25 보국대원(保國隊員)들도 그 명단을 제대로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 당시 ‘보국대(保國隊)’로 징집된 사람들은 몇 명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죽고 다쳤는지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

 

일제출신(日帝出身) 군경(軍警)과 공무원들이 신생 대한민국의 군경과 공무원으로 눌러 앉아 일제 때 배우고 써먹은 방식을 우리나라 ‘보국대(保國隊)’ 행정에 그대로 써 먹었기 때문이다.

 

 

 

사할린에 끌려간 조선인 보국대원들

 

 

 

 

 

 

전언(傳言)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휴전당시의 보국대원(保國隊員)이 9만 명 정도였고, 이전 3년간을 합해 25만여 명이 ‘보국대’ 근무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다만, 같은 보국대원들이라도 미군부대(美軍部隊)에 배치된 미군 보국대원 즉, ‘한국노무단(韓國勞務團)’ 단원들은 명단이 작성되었다.

 

포탄과 폭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치열한 전투고지(戰鬪高地)에 생명을 걸고 주먹밥과 탄약(彈藥)을 지게에 지고, 오르내리다 포격(砲擊)과 폭격으로 죽고 다친 ‘보국대’ 대원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는데, 이들의 명단조차 비치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인정될 수 없는 일이다.

 

 

 

군수품을 지게에 지고 산을 오르는 노무단

 

 

 

 

 

 

6.25때 북한군(北韓軍)이 거의 전국토를 수중에 넣고부터는 인민군(북한군)에서도 보국대제도(報國隊制度)를 시행했다. 인민군대에도 일제 때 ‘보국대’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시행에 문제될 것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북한의 경우는 ‘보국대(報國隊)’ 징집대상인 장정들은 모두 현역 전투병(戰鬪兵)으로 징집되었기 때문에 실제의 ‘인민군보국대’는 점령지(占領地)인 남한의 장정들로 편성되었다.

 

 

 

인민군보국대에 동원된 서울시민들

 

 

(6·25전쟁 당시 인민공화국 치하 3개월 동안 서울에서는

거의 매일 김일성과 스탈린을 우상화하는 집회가 열렸다)

 

 

 

 

 

총부리를 들이대고 ‘부역’, 즉 ‘보국대(報國隊)’ 노릇을 하라는데 거역할 수도 없었지만, 일제(日帝)와 조선인 악덕 지주들에게 사람취급조차 받지 못했던 이른바 ‘무산계급(無産階級)’의 머슴들과 하인 출신 장정들은 자원하여 ‘인민군보국대(人民軍報國隊)’가 되기도 했었다.

 

또한 악덕지주들과 친일분자들도 무산계급의 주민들로 구성된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의 재판을 받아 숙청(肅淸)되는 화를 피하기 위하여 강도 높은 자아비판(自我批判) 절차를 거친 후 스스로 ‘인민군보국대’에 지원하기도 했었다.

 

 

 

 

인민재판 후 총살준비 장면

 

 

 

 

 

 

앞서 소개한 대로 ‘국방군(國防軍)’이나 일제 관료출신, 일본 유학 또는 친일경력(親日經歷)을 가진 남편과 가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청하여 ‘빨간 완장’을 차고 ‘인민군보국대(人民軍報國隊)’에 뛰어드는 여성들도 많았었다.

 

당시 점령지 주민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은 좌익인 동네 구장(區長)이나, 머슴출신 인민위원회 위원장(委員長) 등 이른바 ‘빨갱이’들의 손에 달려 있어 그들이 말하는 ‘반동(反動)’들의 가족들은 매일 같이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고 있었다.

 

국군가족(國軍家族) 여성들의 경우 같은 동네에 사는 ‘빨갱이’의 고자질로 마당 앞에 파 놓은 구덩이 속에 처넣어져 ‘죽창(竹槍)’에 찔려 죽기도 했다.

 

일본유학(日本留學)을 다녀온 자식이 있는 가정에서는 그 자식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가 자진하여 ‘인민군보국대’ 여성연맹(女性聯盟) 간부의 완장을 차고 인민군(人民軍)들을 위한 온갖 궂은일을 솔선수범 하던 일도 이때 일어난 일들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여성동맹’ 집회

 

 

 

 

 

 

여기에다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인민군(人民軍)이 퇴각한 이후에는 우리 쪽 우익단체(右翼團體)들이 ‘인민군보국대’에 들어가 ‘부역(賦役)’을 했다는 이유로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죽창으로 무장한 여중생들

 

 

 

 

 

 

그리고는 그 속죄(贖罪)의 뜻으로 이번에는 우리나라 ‘국방군(國防軍)’의 ‘보국대’가 되어 전방고지(前方高地)를 오르내리며, 주먹밥과 탄약(彈藥)을 매어 날랐다.

 

한 사람의 장정이 일제(日帝)와 북한군(北韓軍)의 ‘보국대(報國隊)’, 그리고 우리나라의 ‘보국대(保國隊)’를 모두 거치는 희한한 삶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그것도 모두 강제(强制)나 억지에 의해 징집되었다.

 

 

 

6.25 당시의 우리나라 보국대

 

 

 

 

------------------------------------------------

 

 

 

여기에서는 6.25 당시 미군(美軍)이 창설했던 미군 ‘보국대’ 즉, ‘한국노무단(韓國勞務團 : KSC)’의 태동과정과 편성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유엔군은 1951년 6월 전투병력(戰鬪兵力)을 절감하고 전장에 적시에 보급품을 운반하기 위해 운용한 ‘민간인 운반단(運搬團)’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노무자들을 흡수하여 ‘한국노무단(KSC)’을 창설하였다.

 

 

 

한국노무단

 

 

 

 

 

 

‘한국노무단(韓國勞務團)’은 총 3개 사단과 2개 여단으로 편성·운용되었으며, 제2국민병을 주로 징집(徵集)동원하였으므로 준군사적 군단(軍團) 규모의 특수한 조직체로서 기능하였다.

 

‘노무단(勞務團)’이 수행한 임무는 전선부대(戰線部隊)에 탄약, 연료, 군자재, 식량, 식수, 보급품 등을 운반하고, 진지공사(陣地工事)와 전사·부상자 후송, 도로와 교량보수(橋梁補修) 등의 주요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게로 탄약을 운반하고 있는 노무자의 모습

 

 

 

 

 

휴전 때까지 유엔군에 의해 운용(運用)된 노무자의 수는 ‘노무단(勞務團) 노무자’ 9만 3,000명, ‘직고용(直雇用) 노무자’ 7만 5,000명, ‘계약고용 노무자’ 2만여명, 해·공군 및 기타 기관의 노무자 약 1만 3,000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1951년∼1953년간 전선부대(戰線部隊)를 직접 지원한 노무자 가운데 확인된 희생자(犧牲者) 수는 총 8,794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노무자(勞務者)들의 전쟁 지원활동에 관하여, 당시 국군(國軍)과 유엔군의 전투 지휘관들은 한결같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투의 절반을 그들이 치렀다”라고 입을 모아 증언(證言)하고 있다.

 

‘노무단(勞務團)’의 역할은 무엇보다 전투근무지원(戰鬪勤務支援)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군의 전투병력이 행정이나, 그밖에 근무지원에 투입되지 않고 전투임무(戰鬪任務)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데,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무단 취사장

 

 

 

 

 

실제 당시 참전자(參戰者)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단’의 운용으로 병력면이나 기술적(技術的)인 면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어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노무단(韓國勞務團)’의 창설경위를 알아본다. 1951년 6월 병력증강의 일환으로 창설된 ‘한국노무단’은 국군이 계획한 ‘국민방위군’의 후신인 예비 국군 제5군단과 유엔군이 운용하고 있던 ‘민간인 운반단(運搬團)’을 기간으로 창설된 것이었다.

 

 

 

국민방위군

 

 

(막대기와 죽창으로 무장은 했는데, 이꼴로 무슨 전쟁을 할수

있겠는가. 글을 알고 사격술을 알만한 대학생들은 모두 '전시

학생증'으로 병역을 면탈하고 있었으니('학도의용군' 참여자

제외) 이들이라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

위군' 간부들의 횡령으로 5만명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6.25 당시 말썽이 많았던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은 1951년 5월 5일 해체되었으며, 동일 부로 ‘방위군’의 해체병력은 신편(新編) 제5군단(예비)에 배속(配屬)되었다. 참고로 당시의 ‘국민방위군’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살펴본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16일 국회에서 통과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동년 12월 17일 '제2국민병 소집령'을 내려 경찰과 군인을 제외한 장정들로 구성된 군대를 말한다.

 

1951년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은 6·25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국민방위군에 편성된 정부예산을 횡령하여 수많은 청년들을 굶어 죽게 한 사건을 말한다.

 

이승만 정부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6·25전쟁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를 하면서 100만여 명에 달하는 청년들을 남쪽으로 후송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전쟁 초기 남한 대부분의 지역을 북한이 점령함에 따라 병력보충에 결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지난날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사전대응책이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12월 15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국회에 상정, 같은 해 12월 16일 이 법안을 즉시 공포하여 발효시켰다.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에 따라 경상남도·경상북도 일원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군인과 경찰을 제외한 청년들을 수용했다. 국민방위군 지도부는 극우단체로서 이승만 정부를 지지했던 대한청년단의 간부들로 구성되었다.

 

국민방위군 예산은 1951년 1월 30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방위군 총인원을 50만 명으로 추산하여 3개월분 총 209억 원을 책정하였지만 1인당 배당액은 겨우 목숨을 유지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였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실제 예산이 배당되는 과정에서 생긴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횡령에서 발생했다. 이때문에 식량과 침구를 지급받지 못한 방위군 5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고, 영양실조에 걸렸다.

 

부당한 처우를 참다못한 방위군들은 집단탈출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이승만 정부에 대해 분노했다. 궁지에 몰린 이승만 정부는 형식적인 조사만을 실시, 방위군 간부 몇 명만을 기소하여 징역 4월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함으로써 사건을 축소시켜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국회의 재조사 과정에서 엄상섭 의원의 폭로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언, 보급과장 박기환 등이 방위군 예산 10억 원을 착복하고 이승만 개인의 정치 조직에 수천만 원의 정치자금을 준 사실이 밝혀지자,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서를 냈고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물러났으며 김윤근·윤익헌·강석한·박창언·박기환 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총살형에 처했다.

 

그럼에도 부 정한 정치자금을 받은 이승만의 지지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상납된 돈에 대한 수사는 착수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진상규명은 전쟁의 와중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처형당하는 국민방위군 간부들

 

 

 

 

 

 

본론으로 돌아간다. 예비군단(豫備軍團)의 창설은 최초 제101, 제102, 제103, 제105, 제106사단 등 5개 사단으로 계획되었으나, 병력동원상의 문제로 제102, 제106사단을 해체(解體)하고 제101, 제103, 제105사단 등 3개 사단과 제100, 제200여단 등 2개 여단(旅團)으로 구성되었다.

 

노무자(勞務者)로 구성된 국군 제5군단(예비) 3개 사단은 창설(創設)과 동시에 근무를 수행하였고, 노무조직(勞務組織)이 확대됨에 따라 추가로 2개 여단(旅團)이 신설되었다.

 

 

 

 

노무단 창설과 활동기간

 

 

 

 

 

 

‘노무단(勞務團)’의 병력은 1951년 말 6만여 명을 확보했고, 1952년 말 7만 5,000명, 1953년 초에는 인가인원 10만 명에 가까운 9만여 명까지 보충(補充)되었다.

 

‘노무단(勞務團)’의 편성과 인사는 육군본부(陸軍本部)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이들에 대한 작전지휘와 보급은 미군(美軍) 측에서 담당하였다.

 

‘노무단’의 동원은 우리나라 육본(陸本)이 충원계획(充員計劃)을 작성하여 이를 근거로 동원했고, 복무(服務)는 미군 제8군의 작전통제(作戰統制)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동원대상자(動員對象자)는 만35세부터 만45세까지의 남자로서 복무기간(服務期間)은 6개월이었으나, 동원실적이 부진(不進)할 경우 복무기간이 연장되기도 했었다.

 

 

 

미 2사단 병사의 시체를 운반하는 노무단

 

 

 

 

노무단원 중에는 자신의 부친과 함께 근무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중학교 4학년으로 부친과 함께 북한(北韓)에서 월남한 한 학생은 노무자 모집공고(募集公告)를 보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부친과 함께 자원(自願)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6·25전쟁 동안 노무자(勞務者)들은 비(非)전투요원으로서 작전상 필요로 하는 교량과 도로의 보수와 식량탄약 및 군 장비의 운반 등에 동원되어 국가안보의 총력전(總力戰)을 수행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면 6.25 당시 UN 한국 민사지원사령부(民事支援司令部 : UN Civil Assiatance Command, Korea)에서 발령한 1951년 7월 18일자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s Corps)’ 편성 명령의 내용을 잠시 살펴본다.

 

 

 

 

 

(전략)

 

3. 한국노무단의 편성

 

a. 5군단 소속의 한국군 예비사단인 101, 103, 105사단을 한국노무단으로 편성해 각각 미 육군 1, 10 그리고 9군단에 배속시킬 것.

 

b. 현재 미 육군의 각 군단에 배속된 한국인 노무단은 해체해 새로 창설하는 한국노무단에 통합시킨다. 한국 노무단 창설을 위해 현재 있는 모든 노무단을 해체하는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노무단은 초기 단계에서는 각 군단과 전투사단을 지원하는데 중점을 두되 점차 다른 지역의 육군 전투지원 활동을 보조하는데도 투입한다.

 

c. 현재 민간수송단(Civil Transport Corps)의 지위는 당분간 유지하되 제 8군사령부의 노무과(Labor Section)의 지휘하에 두고 민간수송단의 교체인원은 각 군단에 배속되기 전에 한국노무단 보충대에서 교육 받도록 하고 보급 절차는 이 문서의 규정에 따라 변경하는 것으로 한다. 장차 민간수송단을 한국노무단에 통합하는 것도 실행 가능할 것이다.

 

(중 략)

 

5. 편 성

 

a. 위와 같이 한국노무단 사령부는 별도로 편성하지 않는다.

 

b. 한국노무단은 사단 당 20,000명으로 편성된 3개 사단(101, 103, 105), 총원 60,000명으로 편성한다.

 

c. 한국 노무사단은 별첨 1과 같이 6개 연대로 편성한다.

 

(후 략)

 

 

 

 

 

 

[별첨1]

 

노무사단의 편성(1개 사단 당)

 

 

 

부대별

장교

부사관 및 사병

비 고

사단 총원

1,064

18,936

사단본부

28

307

(사단본부중대)

(18)

(168)

(사단헌병중대)

(4)

(112)

(사단 의무대)

(6)

(27)

노무연대

167

3,122

사단당 6개연대

(연대본부)

(8)

(101)

노무대대

53

1,005

(대대본부)

(5)

(53)

노무중대

12

238

대대당 4개중대

(중대본부)

(4)

(26)

노무소대

2

53

중대당 4개소대

 

 

 

다음은 미군이 운영한 ‘한국노무단’에 대한 처우(處遇)를 잠시 살펴본다. 문서상으로는 처우가 일반 육군(陸軍)과 동일하게 되어 있어서 크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혼자(旣婚者)의 경우 쌀을 시장 가격의 절반 가격에 살 수 있도록 한국정부가 보장하도록 되어 있었고, 장교(將校) 이상은 한 달에 10,000원의 추가 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노무사단’의 계급별 월급여(月給與)는 다음 표와 같이 되어 있었다.

 

 

 

계급별

월급여

계급별

월급여

소장

66,000원

준위

32,100원

준장

60,000원

상사

26,100원

대령

56,100원

중사

24,300원

중령

51,300원

하사

6,600원

소령

46,500원

병장

6,000원

대위

38,100원

상병

4,500원

중위

35,700원

일병

3,600원

소위

33,300원

이병

3,000원

 

 

 

그리고 ‘노무사단(勞務師團)’의 급여는 ‘노무사단’이 배속된 미군(美軍) 군단장이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다. ‘노무사단’에서는 또 ‘노무단’ 사병들에게 군용품(軍用品)을 지급했는데, ‘노무단’ 사병의 개인 지급품은 다음 표와 같다.

 

 

 

개인지급품

1인당 지급량

개인지급품

1인당 지급량

모 포

1매

바 지

1벌

작 업 모

1개

속옷상의

2벌

속옷하의

2벌

우 의

1벌

자 켓

1벌

식 기

2개

신 발

1족

젓 가 락

2개

양 말

2족

-

-

 

 

 

어쨌든 6.25 당시의 한국노무단(韓國勞務團)들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산악지역(山岳地域)에 탄약과 식량을 ‘지게’로 지고 올라가 유엔군을 지원한 ‘군번 없는 용사’들이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그들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선에 탄약(彈藥), 연료, 군자재, 식량, 식수, 보급품(補給品) 등을 운반해 줬음은 물론 진지공사(陣地工事)와 전·부상자 후송, 그 밖에 도로, 교량보수(橋梁補修) 등의 역할까지 수행했었다.

 

노무자들의 운반수단(運搬手段)은 주로 ‘지게’였으며, 당시 유엔군들은 지게가 영어 알파벳 ‘A’를 닮았다고 해서 그들을 ‘A Frame Army(지게부대)’라고 불렀다.

 

 

 

 

 

당시의 ‘한국노무단’ ‘지게부대’

 

 

 

 

 

현재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6·25전쟁 참전 기념공원에는 참전용사(參戰勇士)들의 모습과 함께 전쟁을 지원한 노무자(勞務者)들의 모습이 새겨져있다.

 

이처럼 6.25전쟁 동안 우리나라 노무자(勞務者)들은 비 전투요원으로서 작전상 필요로 하는 교량(橋梁)과 도로의 보수, 식량탄약 및 군 장비의 운반 등에 동원되어 전투부대(戰鬪部隊)를 직접 지원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산악전

 

 

 

 

 

 

이들의 활동에 관해 당시의 미(美)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만일 한국노무단(韓國勞務團)이 없었으면 미군은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추가병력이 필요했을 것”이라면서 한국인 노무자들의 공적을 극찬(極讚)하였다.

 

그리고 당시 ‘노무사단(勞務師團)’에 근무한 장병들은 병역법상의 현역도 아니고, 예비역도 아니었으나, 그들은 실질적(實質的)으로는 정규군에 복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1961년 10월 1일 개정된 병역법(법률 제1163) 부칙 제15조의 규정에서는 “본법 시행 당시 ‘노무사단(勞務師團)’ 또는 ‘노무단’에 근무하였거나, 근무 중인 장교 또는 하사관은 현역을 마치고 예비역(豫備役)에 편입된 자로 본다”고 규정하여 그들에 대한 예비역편입을 인정해 주었다.

 

 

 

-----------------------------------------------

 

 

 

이하에서는 6.25 당시 유엔군의 ‘민간노무단(民間勞務團)’, 즉 우리나라 ‘보국대’에 관한 사항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주지하다시피 전쟁의 승패에 있어 병참(兵站)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6·25전쟁 또한 군수지원(軍需支援)의 중요성이 입증된 예라 할 수 있다.

 

당시의 경우 남이던 북이던 38°선을 넘어 서면서부터는 심각한 군수문제(軍需問題)에 시달렸다. 특히 제공권, 제해권(制海權)을 유엔군에게 일방적으로 빼앗기고 수송수단도 열악했던 공산군(共産軍) 측의 군수조달 문제는 전쟁 내내 고민거리였다. 침략자로서는 당연한 고통이어야 했다.

 

 

 

 

중공군의 우마차 보급대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군수조달(軍需調達) 환경이 좋았던 아군 측도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무척 애를 먹었다. 특히 산악(山岳)이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다보니 최전선(最前線)의 군수지원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무수한 도로가 개통된 지금도 동부전선(東部戰線)의 산악지역은 폭설(暴雪)이라도 한번 내리면 길이 막혀버린다.

 

 

 

 

미군의 산악지대 달구지 이용 보급

 

 

 

 

 

 

지금도 사정이 이러한데 사회적(社會的) 인프라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6·25전쟁 당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특히 1951년 말부터 휴전 때까지 진행된 참호전(塹壕戰)은 대부분 고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때문에 이러한 고지에 주둔한 전투부대(戰鬪部隊)에 대한 병참지원(兵站支援)은 전투 그 자체보다 더 어려운 문제였다.

 

 

 

 

참호(교통호)

 

 

 

 

 

 

그래서 고안된 전술(?)이 군인이 아닌 일반 노무자(勞務者)들을 활용하는 운반수단이었다. 한마디로 산악지대(山岳地帶)에 대한 보급을 민간에게 ‘아웃소싱’을 한 것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국군(國軍)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소위 ‘보국대’를 비롯하여 유엔군 참전 이후 만들어진 ‘민간운반단(民間運搬團 : CTC-Civilian Transport Corps)’, ‘한국근무단(일명 노무단)’, ‘부두하역단’ 등이 노무자부대가 이 일을 맡았다.

 

 

 

 

트레일러 차를 타고 가는 노무자들

 

 

 

 

 

 

6.25 때의 ‘보국대(保國隊)’란 당시의 이들 ‘노무자부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때의 용어는 일제가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때 우리나라 장정들을 강제 징용(徵用)으로 끌어간 데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일본열도(日本列島)의 탄광과 남방지역의 군사시설 노역장에서 ‘근로보국대’로 종사한 악몽(惡夢)이 떠올라 6.25 당시 ‘노무단’으로 강제징용(强制徵用)을 당한 이들도 ‘보국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6.25 당시에는 정식으로 ‘보국대(保國隊)’라는 말은 없었다는 얘기다.

 

 

 

 

수송기를 이용한 보급

 

 

(장진호 전투 당시 미 해병 제1사단을 구원하였다)

 

 

 

 

그 당시 면장(面長)이나 면서기, 동네 구장(區長)에게 밉보인 장정들의 경우 강제징용(强制徵用) 형식으로 ‘민간운반단’에 끌려갔고, 이 경우 잡아가는 쪽에서나, 잡혀가는 쪽에서 볼 때 일제 때의 ‘보국대’ 징용과 조금도 다를 게 없어 여기에도 ‘보국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6.25 당시의 면장과 면서기, 동네 구장이 일제(日帝) 때의 그 면장과 면서기, 동네 구장들이었던 탓도 있었다.

 

미군정청(美軍政廳)과 이승만 정권이 일제 때의 군인과 경찰, 일선행정관리들을 그대로 신생(新生)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 관리로 기용했기 때문이다.

 

1945년에 독립이 되어 바로 군정(軍政)을 실시한 미군들이 그들을 그대로 군정(軍政) 관리로 기용(起用)했고, 이로부터 3년 여 후인 1949년 정부수립 이후에는 이승만(李承晩) 정권 역시 그들을 그대로 기용하였으며, 1년 후인 6.25 당시에도 그들이 그대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군인과 경찰, 관리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6.25 당시의 보국대원들은 대부분이 당장의 호구지책이 어려웠던 월남(越南)해 내려 온 청장년들이나 피난민(避難民)들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앞서 말한 강제 징집형태로 충당되기도 했었다.

 

 

 

 

‘지게부대’의 포탄 운반

 

 

(이런 경우는 탄약상자를 멜빵으로 메고 날랐다)

 

 

 

 

물품운송(物品運送)에 민간을 동원하한 것은 전쟁 시작과 동시라고 추측은 되지만, 6·25 전쟁사에 최초로 ‘지게부대’가 등장한 것은 1951년 2월에 있었던 ‘썬더볼트(Thunderbolt) 작전’ 때였다.

 

1.4후퇴 후, 재반격(再反擊)에 나선 미 제25사단은 ‘수리산(경기도 군포시와 안양시 그리고 안산시 경계에 있는 산)’ 일대에서 저항하는 중공군(中共軍) 제150사단의 응전(應戰)에 진격이 멈추어졌다.

 

이때 아군(我軍)은 50여명의 노무자가 지게를 이용하여 고지대(高地帶)로 보급을 추진하는데 성공했던 반면, 중공군(中共軍)은 보급이 차단되어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다.

 

 

 

 

노무단의 군수품 운반

 

 

 

 

 

 

앞서 말한 대로 이때의 노무자 규모는 육군(陸軍) 사단에 편성되어 전투근무지원을 직접 수행한 노무단원(勞務團員) 9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30여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된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전쟁 당시 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당한 노무자(勞務者)들의 규모는 전사(戰死) 2,064명, 실종(失踪) 2,448명, 부상 4,282명 등으로 집계하고 있으나, 많은 수의 노무자들이 공식적(公式的)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규모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A특공대’

 

 

(이들의 노고는 조국을 수호하는 원동력이었다)

 

 

 

 

 

어쨌든 6.25 당시의 ‘지게부대’는 전사(戰史)의 전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군의 승리를 위하여 묵묵히 맡은바 임무를 다한 최고의 정예부대(精銳部隊)였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음지에서 묵묵히 힘써 준 ‘지게부대’ 대원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

 

 

 

배경음악으로 보국대(保國隊) 노래가 있었으면 하는데, 비슷한 노래도 없어 6.25노래를 대신 감상하기로 한다.

 

그동안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환심(歡心)을 사려고, 10여 년 동안이나 묶여있던 6.25노래를 가사와 함께 소개한다.

 

없애버린 6.25노래와 관련하여 할 말이 너무 많아 주석을 단다. 옛적 필자들이 초등학교(初等學校)에 다닐 때는 입에 달고 다녔던 ‘국민가요(國民歌謠)’이기도 했던 6.25노래를 지금의 아이들은 이런 노래가 있는지도 모른다.

 

‘노래’뿐만 아니라 ‘6.25’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른다. 일본(日本)이 우리나라를 침략(侵略)했던 전쟁, 혹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혼동하는 어린이들도 적지 않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교과서(敎科書)에서조차 ‘6.25’를 숨기기라도 하듯 두 세군 데에 나올 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6.25의 노래’는 너무나 생소(生疎)하고 이해하기 힘든 노래가 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60대 이상 세대들은 1년 내내 계절에 상관없이 이 ‘6.25 노래’를 부르고 살았다. 여자애들의 고무줄놀이에도 써먹었고, 나뭇길에 지게목발을 치면서 목이 터져라 부르기도 했다.

 

‘니나노집’에서 노래 밑천이 짧거나 떨어지면, 대신 부르는 애창곡(愛唱曲)이 되기도 했었다.

 

 

 

고무줄 놀이

 

 

 

 

 

 

이웃마을에 ‘마실’을 갔다가 밤늦게 귀가하면서 공동묘지(共同墓地) 옆을 지날 때는 무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일부러 고함을 지르며 부르기도 했었다.

 

학교에서는 이 애창곡(愛唱曲)을 부르며 가을 운동회(運動會)를 준비했고, 운동회 프로그램에 빼먹지 않고 들어 있던 ‘기마전(騎馬戰)’에서도 두 주먹 불끈 쥐고, 6.25노래를 부르며 힘차게 ‘적군’을 향해 내달리곤 했었다.

 

 

 

운동회 기마전

 

 

 

 

 

 

고등학교 시절 교련선생(敎鍊先生)님은 매 구절(句節) 앞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고 부르라며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그렇잖아도 이 노래는 애당초 악을 쓰고 부르기에 알맞은 노랫말과 곡조(曲調)를 갖추고 있어 제식훈련(制式訓練)으로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프면 선생님의 호통이 아니더라도 지레 악을 쓰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100여 만 명이나 되는 무고(無故)한 우리들의 부모형제를 죽인 북한공산군의 만행(蠻行)을 감싸기라도 하듯 6.25전쟁은 이제 ‘잊혀진 전쟁’이 되었고, 우리의 부모형제를 살상한 북한공산군(北韓共産軍)의 만행을 규탄하는 ‘6.25노래’조차 이제는 종적을 감추고 없어졌다.

 

이뿐인가. 저들 침략군(侵略軍)들의 딸들이 남쪽으로 무슨 응원이라도 오면 그 매끈한 매력과 기계화(機械化)된 동작에 매료되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며칠씩 그녀들의 숙소와 응원석(應援席)을 맴돌기도 한다.

 

 

 

 

북한 여성 응원단

 

 

 

 

 

 

여기에다 북한군(北韓軍)의 6.25남침(南侵)을 듣도 보도 못한 일부 운동권(運動圈)에서는 그 전쟁에서 죽다가 살아난 세대가 눈을 부릅뜨고 고통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엄연한 ‘남침’을 한사코 ‘북침(北侵)’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어쨌든 ‘6.25의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사실상(事實上) ‘잊혀진 노래’가 되고 있다. ‘민족공조(民族共助)’라는 큰 물살 때문이다.

 

그동안 6.25의 노래를 두고 그 가사가 초·중등(初中等)학생들이 부르기에는 너무 섬뜩하다는 지적이 지속적(持續的)으로 제기되어 왔다. 필자가 생각해도 가사가 너무 원색적(原色的)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피를 함께 나눈 동족(同族)으로서 평화로운 이 나라를 침공(侵攻)하여 10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인명(人命)을 살상한 저들은 ‘원수’일 수밖에 없었고, “쳐서 무찔러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었다.

 

사정이 이러했는데도 지금 세대들은 그 노래가 대단한 오류(誤謬)라도 있는 양 비난일색(非難一色)이다. 이뿐이 아니다.

 

이 노래의 근원(根源)인 ‘6.25동란’ 자체를 마치 없었던 일이거나, 우리 쪽이 뭔가를 잘못해서 일어난 사단이나 되는 것처럼 슬그머니 교과서(敎科書)에서도 지우고, 노래책에서도 지우고 있다.

 

‘6.25전쟁’으로 인해 우리 국군(國軍)의 사망자는 무려 137,899명에 이르며, 실종자(失踪者) 수는 32,838명이나 된다. 부상(負傷)을 당한 국군도 450,742명에 이르고 있다.

 

민간인(民間人)들의 사망자는 학살(虐殺) 당한 사람까지 합쳐서 37만여 명에 이르며, 부상당한 사람도 23만여 명에 이른다는 통계다.

 

여기에다 피난민(避難民)이 240만여 명, 전쟁고아(戰爭孤兒)가 10만여 명이나 발생했다.

 

생떼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가 20만여 가정, 청상과부(靑孀寡婦)도 20여만 명이나 발생했다. 부상자(負傷者)도 그냥 부상자가 아니다.

 

팔과 다리를 잃고, 악성 총상(銃傷)으로 신음하다가 조금 남은 논밭전지마저 모두 탕진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미국(美國)을 포함한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자가 3만6천9백여 명이고, 11만6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실종(失踪)되거나 포로가 된 병사들이 6,900여명에 이르고 있다.

 

북한군(北韓軍)과 중공군에 비하면 유엔군의 희생은 적은 규모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은 북한군과 중공군(中共軍) 같이 남의 나라를 침략(侵略)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저들의 침략을 막아 우리나라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소중(所重)한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민족공조’도 좋지만, 상대방(相對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 엄청난 민족적(民族的) 비극과 관련된 노래까지 자라나는 세대와 단절시키는 처사는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70만에 이르는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숙부님과 형님들, 남편과 오라버니들, 그리고 4만 명의 외국청년(外國靑年)들의 목숨을 제물(祭物)로 바친 그 전쟁을, 더구나 침략자(侵略者)들을 막고 나선 그 거룩한 희생들을 이렇게 깔아뭉개고 호도(糊塗)해도 되는 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6.25의 희생자들(인민재판 처형자)

 

 

 

 

당국자들에게 건의한다. ‘6.25’와 ‘6.25노래’를, 그리고 ‘6.25의 원혼(冤魂)’들을 이렇게 홀대하고 폄훼(貶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민족공조(民族共助)’는 민족공조대로 추진하고, 조상(6.25원혼)에 대한 제사(祭祀 ; 6.25행사)는 제사대로 모셔야 한다.

 

‘6.25원혼’들에 대한 제사(祭祀)가 ‘6.25행사’이고, 그 제사의 추모가(追慕歌)가 ‘6.25의 노래’이며, 자라나는 세대에 대하여 ‘6.25’를 올바로 상기(上記)시키는 일이 제주(祭主)이자 후대로서의 소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과서를 개편하고 노래가사를 개사(改詞)해서라도 당장 제대로 된 ‘6.25제전(祭典)’을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천인공노할 침략전쟁(侵略戰爭)을 일으킨 간악한 일본인(日本人)들은 순박한 우리들의 어버이와 딸들을 보국대(報國隊)와 정신대(挺身隊)로 끌어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망나니짓을 벌여놓고도 그들의 자식들에게는 ‘그런 일이 없다’는 교과서(敎科書)를 만들어 쇠뇌 시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땅에서 벌어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엄연한 사실마저 축소하거나 망각(妄覺)하려 하고 있다.

 

6.25에서 지금까지 신성한 병역을 면탈(免脫)한 무리들은 세상이 좁다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하고 있는데, 남들과 같이 배운 것도 요령도 없어 고분고분 전쟁터에 나간 그들 원혼들은 한줌의 재로 돌아왔거나,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 그 유골(遺骨)도, 행방도 찾지 못하고 있다.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 활동과 국공내전(國共內戰)의 실전에서 전투력을 쌓을 대로 쌓은 북한군과 팔로군(八路軍) 출신 중공군을 상대로 ‘께임’도 안되는 전투를 하다가 총 몇 방 쏘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간 그들 새파란 원혼(冤魂)들을 이렇게 유기하고 냉대(冷待)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개미떼 같이 기어 올라오는 적병(敵兵)들 앞에서 “소대장님! 총알이 안나가요”라며 울부짖다가 처참하게 쓰러져간 그들 무지렁이 소총병(小銃兵)들의 절규가 ‘조국(祖國)’과 그들 후대들에게로부터 이웃집 강아지 죽은 것보다 못한 이 따위 ‘홀대(忽待)’를 자청(自請)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 속 깊이 새겨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봐도 지금의 ‘6.25노래’ 가사는 어린 학생들이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국에서 선도(先導)하기 곤란하다면, 음악계(音樂界)에서라도 자진하여 새로운 가사(歌詞)로 가다듬어 당당하고 숙연하게 6.25를 말하고 노래했으면 한다.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스스로 격앙(激昻)되는 것 같아 이쯤에서 파일을 접는다. 장사꾼들의 사이트에서조차 ‘6.25노래’를 지워버려 이곳저곳 남의 집 사이트를 뒤져 노래주소만 게재하였다. ‘6.25노래’ 가사를 다시 게재한다.

 

 

 

 

 

 

 

6.25 노래

 

 

작사 : 박두진

작곡 : 김동진

 

 

 

(1)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갚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출처 : 외동향우회/외중동창회
글쓴이 : 이용우(괘릉) 원글보기
메모 :

'역사·정치·경제·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구단의 역사  (0) 2011.03.04
[스크랩] 금단의 땅 DMZ  (0) 2011.03.02
[스크랩] 조선시대 사진 보기  (0) 2011.02.09
조선왕릉  (0) 2011.01.30
[스크랩] 전 대통령님 휘호~박정희 님  (0) 2011.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