呑虛(탄허)스님의 법문 | ||
성씨는 김(金), 속명은 금택(金鐸), 자(字)는 간산(艮山), 법명은 택성(宅成: 鐸聲), 법호는 탄허(呑虛)이다. 1913년 음 1월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독립운동가인 율제(栗齊) 김홍규(金洪奎.이명 鏞奎)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918년 (6세) 이때부터 1928년 16세 때까지 10여 년 간 부친과 조부(金允卿. 이명 金炳日), 그리고 향리의 선생으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유학의 전과정을 마치다. 1919년부터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수감, 1922~1924년까지 옥바라지를 하다. 1929년 (17세) 이 해 충남 보령으로 옮겨서 기호학파 면암 최익현의 재전(再傳) 제자인 이극종(李克宗) 선생으로부터 다시 시경(詩經)을 비롯한 삼경(三經)과 예기(禮記), 춘추좌전(春秋左傳) 등 경서를 수학하다. 1932년 (20세) 이즈음 노자 도덕경(道德經)과 장자(莊子) 등 도가의 경전을 읽으면서 ‘도란 무엇인가?’ 라는 새로운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다. 1934년 (22세) 음력 9월 5일 드디어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 1955년 (43세) 대한불교 조계종 강원도 종무원장 겸 월정사 조실(祖室)에 추대되다. 1956년 (44세) 4월 1일 오대산 월정사에 대한불교 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설치하다. 1956년 (44세) 가을 무렵부터 수도원의 교재로 쓰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신화엄경합론 등에 대하여 번역을 착수하다. 1962년 (50세) 10월 다시 월정사 주지 발령을 받고 1965년 (53세) 11월 동국대학교 대학선원장에 임명되다( 1969년 (57세) 10월 13일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이 낙성되다 1975년 (63세) 동국학원(동국대학교) 이사에 취임하다. 1983년 (71세) 음 4월 24일(양 6월 5일)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에서 세수(世壽)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열반에 드시다.
呑虛(탄허)스님의 말씀 요임금이 허유에게 정권을 양여할 때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덕이 日月이라면 나의 도덕은 횃불이요, 선생님의 도덕이 때맞추어 내리는 비라면 나의 도덕은 가뭄에 물대는 것에 불가합니다. 선생님이 정치한다면 천하가 잘 다스려질 텐데 내가 오히려 이 천하를 맡아가지고 있으니 스스로 보기에 부끄럽습니다. 請(청)컨데 천하의 정권을 양여합니다"하니까 허유가 답하는 말씀이 "자네가 천하를 다스리매 천하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 내가 오히려 자네를 대신한다면 내가 장차 명예를 위해서 이겠는가. 명예란 것은 實相(실상)에서 일어나는 客(객; 虛妄(허망)한 것)이니 내가 장차 객을 위하겠는가. 뱁새가 깊은 수풀에 깃들일 때에 나무 한 가지만 있으면 만족하고 산쥐가 河水(하수)의 물을 마시는데 그 배 하나 채우면 그만이다. 돌아가 쉴지어다. 군이여,나는 천하를 일삼는 사람이 아니니 푸줏간 주인이 푸줏간을 잘못 다스린다해서 祝文(축문)을 읽는 관리가 축문을 읽다말고 젯상을 넘어서 푸줏간 주인의 일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한 후 허유는 穎川水(영천수)에 가서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귀를 씻었습니다. 때마침 허유의 친구인 소부가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영천수에 왔다가 허유의 귀씻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허유의 말이 요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맡아달라는 더러운 소리를 들어 귀를 씻는다고 하니, 소부도 소에게 이 더러운 물을 먹일 수 없다고 소를 끌고 岐山(기산)너머로 가버렸습니다'[史記(사기)]. "嗜欲(기욕)이 深者(심자)는 天機賤(천기천)" [莊子(장자)]이란 말과 같이 嗜欲(기욕)이 많은 사람은 天理(천리)와는 먼 것이고 嗜欲(기욕)이 적은 사람은 道(도)에 가까운 것입니다. 孔子(공자)의 말씀에 "소년시절엔 血氣(혈기)가 未定(미정)하므로 色(색; 여자)을 경계해야 하고, 長成(장성)해서는 혈기가 强壯(강장)하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늘그막엔 혈기가 이미 쇠했기 때문에 貪心(탐심)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貪心(탐심)은 嗜欲(기욕)을 말하는 것입니다. 古人(고인)의 詩(시)에 "人情(인정)을 閱盡頭全白(열진두전백)이요 世味嘗來齒已寒(세미상래치이한)" 이라는 것이 있는데, 온갖 人情(인정)을 다 지내고 보니 머리는 허옇게 되었고, 세상만사를 다 겪고보니 이가 시리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嗜欲(기욕)과 樂欲(낙욕)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嗜欲(기욕)은 감정에서 일어나지만 樂欲(낙욕)은 理智(이지)에 속하므로 嗜欲(기욕)이 없다해서 樂欲性(낙욕성)까지 없다면 一切聖人(일체성인)들이 꾸짖는 것입니다. 樂欲性(낙욕성)은 發願(발원)이나 立志(입지)를 의미합니다. 세상욕심이 희박한 이는 좋은 사람들이지만 樂欲性(낙욕성)이 없는 사람은 천치바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양자를 구별해야 합니다. 皇極經世書(황극경세서)에 五種 事業(오종 사업)의 種別(종별)을 들어 '寧爲鷄口(영위계구)이언정 無爲牛後(무위우후)' (작아도 닭의 입이 되는 것이 낫지, 커다란 소궁둥이가 되지 말라는 뜻) 라는 말이 있듯이 東洋思想(동양사상)의 견지에서 볼 때 종교는 종교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主體性(주체성)인, 다시 말하면 우주와 인생의 핵심인 그 밑바탕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本旨(본지)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기타의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문제는 '유치원 학생을 지도하는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우주의 주체가 무엇인지 세상사람들은 모릅니다. 우주의 주체는 우주가 아닙니다. 우주의 주체는 우주 아닌 자입니다. 즉 우리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時空(시공)이 끊어진 자리이지요. 왜 시공이 끊어졌느냐? 과거의 생각은 이미 滅(멸)했고 미래의 생각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의 생각은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공이 끊어진 이 정신(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간밤 꿈에 一點(일점)도 안되는 공간 위에 누워있는 肉身(육신)이 10분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수만 리를 거닐면서 70~80년을 살았습니다. 꿈속에서 보는 우주가 현실과 다른 것이겠습니까? 여전히 산은 높고 물은 깊습니다. 불은 뜨겁고 물은 찹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보는 우주가 眞(진)이라면 꿈속에서 보는 우주도 眞(진)일 것이고 꿈속에서 보는 우주가 헛것이라면, 현실에서 보는 우주도 헛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보는 우주만을 眞(진)으로 여기기 때문에 1백 년도 못 사는 몸으로 한없는 妄想(망상)을 좇아 내일 공동묘지에 갈지라도 오늘 富貴功名(부귀공명)을 한다면 집착하고 매달리는 것이 凡夫(범부)가 아닙니까. 꿈에 관련된 古事(고사)를 비유하여 말씀드려 보지요. 1천 5백년전 漢(한) 帝(훤제) 때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국내에서 해몽을 제일 잘 하는 자를 불러 시험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꿈을 날조하여 말하기를 "내가 간밤 꿈에 궁전 처마끝의 기왓장이 鸞鳥(난조=鳳凰(봉황)의 별명)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슨 꿈인가"고 했습니다. 해몽자의 답변이 "큰일났습니다, 폐하. 궁전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밀이 끝나자마자 문밖에서 아뢰는 말이 "폐하, 궁중에서 싸우다 한 놈이 죽었습니다"고 했습니다. 황제가 하도 기특하여 "얘야, 나는 네가 하도 해몽을 잘한다고 하기에 시험삼아 꿈을 하나 날조해 말했는데 어찌 그렇게 잘 맞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해몽자가 대답하기를 '夢是神遊(몽시신유)라고 했습니다. 즉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꿈이기 때문에 폐하가 한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이 벌써 하나의 꿈이 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 생각이 일어남으로써 꿈이 있고 꿈이 있으므로 우주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聖人(성인)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面目(면목)을 각파했기 때문에 꿈도 우주도 없는 別天地(별천지= 時空(시공)이 끊어진 세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聖父(성부)', 儒敎(유교)에서는 '中(중)', 불교에서는 '佛(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聖人(성인)은 우리의 현실을 간밤 꿈으로 覺破(각파)한 것입니다. 佛(불)이란 覺(각)이란 말인데, 覺(각)이란 것은 현실우주가 간밤 꿈으로 보아 환상으로 있는 것이요, 實有(실유)가 아니라은 것을 철저하게 보아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聖人(성인)은 우주라는 苦海(고해)를 완전히 건넌 것입니다. 중생은 苦海(고해)를 건너지 못했기 때문에 此岸(차안)이라 하는 동시에 中流(중류)에서 허덕이고 있고, 聖人(성인)은 완전히 건넜기 때문에 彼岸(피안)이라고 합니다. 苦海(고해)의 씨앗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을 타파하는 것은 苦海(고해)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한 생각의 씨앗을 타파하는 방법은 道(도)를 보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凡夫(범부)는 일초 일분도 생각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중생이라 하는 것이요, 哲人(철인)은 道(도)자리를 보아 원래 생각이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聖者(성자) 또는 覺者(각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파리가 곳곳에 가서 붙지만 불꽃 위에는 붙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중생의 망상이 어디든지 다 가서 붙지만 道(도)자리에는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道(도)자리를 보면 苦(고)의 씨앗은 송두리째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道(도)를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학을 연구하느니, 종교를 믿느니 하는 것은 철학이나 종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어떻게 이 苦海(고해)를 벗어나느냐 하는 主觀的(주관적)인 견지에서 연구하고 믿어보는 것입니다. 철학과 종교를 떠나서 이 고해를 벗어날 수 있다면 철학과 종교는 하나의 갈포(옛날 제사지낼 때 쓰는 위패인데 짚으로 개모양을 만들어 쓰고 내버리고 마는 것)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칸트도 철학적으로 思索[사색; 여러 갈래로 찾는 것] 침묵[三昧(삼매)과 같은 物我兩忘(물아양망)의 경지] 冥想[명상; 三昧(삼매) 속에서 홀연히 알아지는 것]을 거쳐 우주 萬有(만유)의 認識主體(인식주체)를 純粹理性(순수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칸트철학의 결론은 認識境界(인식경계)와 認識主體(인식주체)의 절대적인 相反性(상반성)이 一體(일체)위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학의 입장에서 볼 때 칸트의 최종적인 결론은 미흡한 것입니다. 우주만유의 모체인 순수이성을 파악할 때에 우주만유가 순수이성化되어야 하는데 칸트는 그런 결론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동양학적인 견지에서는 우주만유의 모체를 파악할 때에 그 모체에서 일어난 우주만유의 모체화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一本萬殊(일본만수) 萬殊一本(만수일본)' (한 근본이 만가지 다른 것이 되고, 만가지 다른 것이 한 근본이다)이라 하며, '物物(물물)이 名具一太極(명구일태극) 統體一太極(통체일태극)' (우주만물 하나하나가 각각 太極(태극; 우주의 핵심체)의 진리를 갖추었고 우주전체를 통합해보면 太極(태극)의 진리일 따름인 것이다) 이라고 했습니다. 동양화의 三敎聖人(삼교성인)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인품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사람 사람의 마음 속에 본래 갖추어 있는 우주의 핵심체인 '太極(태극)의 眞理(時空이 끊어진 자리)를 소개해 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천당 지옥의 유치원 학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천당에 가느니, 지옥에 가느니 하는 문제는 因果法則(인과법칙)의 사실이지만 三敎 聖人(삼교 성인)이 인류에게 가르친 교리는 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지요.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달아 이 세계가 그대로 極樂化(극락화)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聖人(성인)의 가르침이 어떤 종교를 믿으라는 것이겠습니까? 오직 자기가 자기 주체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다면 자기의 주체를 부정하여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물질을 第一義(제일의)로 삼고, 정신을 第二義(제이의)로 삼는 데서 삶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정신을 第一義(제일의)로 삼고, 물질을 第二義(제이의)로 삼아 정신과 물질을 조화시키는 데서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물질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권력자나 갑부는 고통이 없어야 하겠는데 그들 역시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은 정신적인 양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현미경이 아니면 微菌(미균)을 볼 수 없고 망원경이 아니면 원거리를 볼 수 없듯, 인간의 罪惡相(죄악상)은 聖人(성인)의 經典(경전)을 통하지 않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聖人(성인)의 경전을 보아 자기의 주체성을 믿고 거기에 따라서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苦海 衆生(고해 중생)을 건지기 위해 上中下(상중하)의 그물을 쳐 놓은 것이 불교의 교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上根大智衆生(상근대지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는 고래를 잡는 것과 같은 그물, 中根機(중근기)를 건지기 위해서는 대구나 명태를 접는 것과 같은 그물, 下根機(하근기)를 위해서는 멸치나 새우를 잡는 것같은 그물을 쳐서 한 중생도 남음없이 다 濟度(제도)하려는 것이 佛陀(불타)의 願力(원력)입니다. 上根(상근)은 문자를 의지하지 않고 바로 參禪(참선)을 통해 道(도)에 들어가고, 中根(중근)은 교리적으로 문자에 의지하여 一心 三觀(일심 삼관), 三觀 一心(삼관 일심)의 도리인 觀法(관법)으로 道(도)에 들어가며, 下根(하근)은 참선에도 교리에도 해당되지 못하므로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불'등의 名號(명호)를 외거나 기독교의 주기도문과 같은 呪力(주력)으로 道(도)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전문가처럼 入山修道(입산수도)를 해야만 道(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根機(근기)에 따라 上中下(상중하) 어느 門戶(문호)든지 알맞게 택하여 隨時隨處(수시수처)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밤새도록 가는 길에 해돋을 때가 오는 것이지요. 비록 道(도)에 들어가는 문이 上中下(상중하)의 차별이 있다하더라도 들어가고 보면 한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古人(고인)의 말씀에 '發心(발심)은 有先後(유선후)어니와 悟道(오도)는 無先後(무선후)'라 즉, 發心(발심)은 선후가 있을 지라도 道(도)를 깨닫는 데에는 앞뒤가 없다 했습니다.
[세계의 終末은 滅亡아닌 成熟]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事懺(사참)이요, 다른 하나는 理懺(이참)이라는 것입니다. 事懺(사참)이란 밖으로 참회하는 것으로,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죄를 범했을 때 佛前(불전)이나 善知識(선지식)앞에 죄상을 발로하여 瑞光(서광)을 보거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理懺(이참)은 罪相(죄상)의 본래 없는 도리를 內的(내적)으로 觀照(관조)하여 백 년동안 지은 죄를 한 생각으로 없애는 것이지요. 觀照(관조)하는 법은 '죄가 어디로부터 나느냐. 죄는 妄想(망상)으로 좇아난다. 妄想(망상)은 어디로부터 나느냐. 마음으로부터 난다. 마음은 어디로부터 나느냐. 마음은 나온 곳이 없다. 마음이 나온 곳이 없는데, 죄가 어느곳에 있겠느냐'는 식으로 죄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例話(예화)를 하나 들어보지요. 朝鮮王朝(조선왕조) 宣祖(선조) 때 平壤(평양)에 無着(무착)스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庵子(암자)에서 修道(수도)하고 있었지요. 평양 府中(부중) 한 貫家(관가)에 청춘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약혼자가 죽어 결혼식도 올려보지 못한 채 옛풍속 대로 守節(수절)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陰陽之樂(음양지락)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궁금했지만 하소연할 길이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無着(무착)스님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그 여자는 기도한다는 핑계로 쌀 몇 가마를 싣고 암자를 찾아갔지만 목적이 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밤에 스님방에 홀로 들어가 자기의 의사를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無着(무착)스님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사흘밤을 반복해도 끝내 거절당하고만 그 여자는 無着(무착)스님에게 '내 恨(한)을 풀지 못할 바에야 자살하고 말겠습니다'고 말하고 높은 바위로 올라갔습니다. 無着(무착)스님이 생각하기를 殺盜狀妄酒(살도음망주) 五戒 中 殺戒(오계 중 살계)가 第一(제일)에 있고 狀戒(음계)가 第三(제삼)에 있는데 내가 狀戒(음계)를 破(파)하지 않기 위해 殺戒(살계)를 범한다면 이는 輕重(경중)을 모르는 것이라 하여 그 여자를 불러 소원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여자도 보통사람이 아닌 大人(대인)이기 때문에 '원을 풀어주어 대단히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이만하면 一生守節(일생수절)할 만하다면서 府中(부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無着(무착)스님은 狀戒(음계)를 범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유명한 栗峯禪師(율봉선사)를 찾아가 문밖에 거적자리를 펴놓고 참회를 구했습니다. 栗峯(율봉)이 無着(무착)에게 "네가 참회를 하러 왔다니 내가 너를 위해 참회를 시켜주겠다. 죄상을 네 앞에 놓여있는 소반 위에 들여 바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無着(무착)이 주먹으로 상을 치며 하는 소리가 "罪性(죄성)이 본래 없는데 어디에 들여 바칠게 있겠습니까"하니 栗峯(율봉)이 손을 잡으며 "어! 참회 잘했다. 위로 올라 오너라"고 했답니다. 聖經(성경)에서는 "네가 사회적으로 아무리 착한 일을 했어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날 너는 지옥이요, 네가 사회적으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하나님을 믿는 날 너는 천국이라"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진리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만일 진리의 대명사가 아니라면 사회적으로는 모순된 말입니다. 진리의 대명사이기 때문에 진리를 부정하는 날 지옥-캄캄한 세계라는 말이고, 진리를 믿는날 천국-깨끗한 세계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消息(소식) 盈虛(영허) 消長(소장) 盛衰(성쇠)는 우주순환의 자연법칙입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봄이 가면 가을이 오는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면 자동차바퀴가 굴러갈 때, 가는 것으로 보면 順(순)이지만 바퀴밑에서 보면 도리어 逆(역)이 됩니다. 70卷(권) '孔子家語(공자가어)'에 실린 역사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孔子(공자)가 일찍이 길을 가는데 웬 女人(여인)이 길가에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孔子(공자)가 그 이유를 물은즉 동네 당산나무 밑에 천 년 묵은 지네가 있는데 年例(연례)로 한 번씩 제사를 지내야 하며 그때마다 사람을 한 명씩 지네에게 재물로 바치게 되었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네의 毒氣(독기)로 한 동네가 폐허가 될 지경이었지요. 그러나 자진해서 제물이 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제비를 뽑아, 뽑힌 자가 들어가기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길가에서 통곡하고 있는 과부의 외아들이 뽑혀 그 여인은 자기 아들을 못 내주겠다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孔子(공자)는 그 모양을 보고 동네 사람에게 양해를 얻어 여인의 아들 대신 당산나무밑 祭堂(제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지네가 사람을 먹으려고 毒(독)을 품는데 그 毒(독)은 홍두깨같은 새파란 빛이었습니다. 이튿날 동네 사람들이 뼈라도 추려 장례지내주려고 문을 열어보니 孔子(공자)는 조금도 動(동)함이 없고 지네가 죽어 있었습니다. 이 天下(천하)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定力(정력) 즉 道力(도력)인 것입니다. 定力(정력) 앞에서는 天地(천지)도 어찌할 수 없고, 귀신도 엿볼 수 없고 權力(권력)도 총칼도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가 開判(개판)한 이래로 자기의 父祖(부조)를 다 버리고 三大聖人(삼대성인)만을 전인류가 숭배하는 것은 헛일이 아닐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孔子(공자)께 百拜謝禮(백배사례)하고 지네를 태웠습니다. 그때에 그 지네의 毒(독)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쳐 있었습니다. 孔子(공자)가 그것을 가리키며 하는 말씀이 百年(백년)후에 이것이 반드시 내 道(도)를 해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후 백 년 만에 만고영웅(?)인 秦始皇(진시황)이 나왔습니다. 바로 그 진시황이 천 년 묵은 지네의 후신이라는 거예요. 孔子(공자)가 崇尙(숭상)하는 詩書(시서)는 다 소각해 버리고 그 敎(교)를 믿는 儒生(유생)들을 모두 생매장한 것입니다. 孔子(공자)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아시고 七書(칠서)를 그의 집 벽속에 감추고 흙으로 발라 보존하였기에 後世人(후세인)들이 七書(칠서)를 七書壁經(칠서벽경)이라고 千字文(천자문)에 적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진시황 당년에 孔子(공자)의 敎(교)가 全滅(전멸)당하여 움도 싹도 없을텐데, 진시황은 불과 二世(이세)에 망하고 그 후로 漢唐宋元明淸(한당송원명청)의 六朝(육조)에 걸쳐 孔子의 敎는 전성하였습니다. 世上萬事(세상만사)는 塞翁之馬(새옹지마)같아서 盛衰(성쇠)가 맞붙어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逆境(역경)을 당한다고 서러워할 것도 없고 順境(순경)을 만난다고 좋아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强暴(강폭)한 원자탄 수소탄으로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면 우주의 원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60여년을 살아오는 동안에도 보아온 세상이 아닙니까. 제1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을 일으킨 것도 독일이었습니다. 만일 이 강폭한 것이 세계를 지배한다면 세계는 독일의 것이었겠지만 독일은 두 번 다 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肉身(육신)에서 제일 강한 것이 뼈입니다. 그러나 그 강한 치아는 60, 70이 못되어 의치를 해야 하고 제일 부드러운 혀는 백년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동양사를 볼 때, 우주개벽이래로 원시시대의 전쟁은 맨주먹으로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뒤로 시대가 발전되면서 나무로 창을 만들었지요. 주먹[土(토)] 열이 나무창[木(목)] 하나를 당하지 못하는 것은 木克土(목극토)하는 원리예요. 그후엔 쇠로 창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나무창 열이 쇠창 하나를 당하지 못하는 것은 金克木(금극목)하는 원리입니다. 다음엔 총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총 끝에 화약을 달아 사용하게 된 것이 堯舜(요순) 前 皇帝(황제) 때 蚩尤作亂(치우작란) 시절이었습니다. 쇠창 열이 불총 하나를 당하지 못하는 것 역시 火克金(화극금)하는 원리이지요. 그후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불의 전쟁도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三國(삼국)시절에 諸葛孔明(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빌어 적벽대전에서 大勝利(대승리)를 거둔 것도 역시 불전쟁이었으며, 오늘날 원자탄이 생긴 것도 역시 불을 사용한 것입니다. 物極則反(물극즉반; 物이 최상까지 가면 내려오는 것)으로 불의 사용은 원자탄으로 종결을 지은 것입니다. 수소탄이 나오자 원자탄이 무력하게 된 것은 水克火(수극화)하는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불의 사용은 원자탄에 이르러 더 갈 수 없게 되었고, 물의 사용은 수소탄에 이르러 다한 것입니다. 그러면 수소탄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맨주먹입니다. 왜냐하면 土克水(토극수)하는 원리이니까요. 그 맨주먹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道德君子(도덕군자)를 말합니다. 道德君子(도덕군자) 앞에는 총칼도 원자탄 수소탄도 다 쓸데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실의 인도문제와 중공문제 등은 消長(소장) 盛衰(성쇠)의 法則(법칙)에서 일시적인 수난기라고 봐야겠지요. 그렇다고해서 그 싹이 永滅(영멸)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잘 될 장본이라고 보겠습니다. 皇(황), 帝(제), 王(왕), 覇(패), 夷狄(이적), 禽獸(금수) 6단계의 時代潮流(시대조류)로 보아도 禽獸運(금수운)이 지나고나면 다시 처음의 皇運(황운)이 오지 않겠습니까. [呑虛스님에게 韓國의 미래를 묻다] 한국의 미래는 周易(주역)의 八卦(팔괘)로 전세계를 分野(분야)해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艮方(간방)'이 됩니다. 艮(간)은 사람으로 말하면 結實(결실)이요, 德(덕)으로 말하면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周易(주역) 繫辭(계사)에 '艮(간)은 止也(지야)니 萬物之所以成始成終者也(만물지소이성시성종자야)라'하며 또 '始萬物終萬物者(시만물종만물자)가 莫盛乎艮(막성호간)이라' 했습니다. 즉 艮(간)이란 것은 그치는 것이니, 그치는 것은 도덕을 의미합니다. 우주만물이 도덕으로부터 시작하고 도덕에서 종결짓는다 하며, 만물을 시작하고 종결짓는 것이 艮卦(간괘)보다 더 盛(성)함이 없다하셨습니다. 우리는 自來(자래)로 이 도덕분야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맞고만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그 陰德(음덕)이 자신에게 미쳐 앞으로는 희망적이라 하겠습니다. 몇 년 전 프랑스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하기를 앞으로 25년 후에 세계의 멸망기가 온다고 했습니다. 그의 예언은 평소 99%가 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말이 틀림없이 오지만 그의 예언은 부조리한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째서 멸망한다는 까닭도 없고, 어떻게 멸망한다는 얘기도 없고, 멸망후에 어떻게 되리라는 얘기도 없고, 어째서 25년 후이냐는 점을 밝히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동양의 易學的(역학적)인 원리로 전개한다면 周易(주역)을 아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조리있고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만, 간단히 결론만 얘기하겠습니다. 세계의 종말은 멸망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易學(역학)의 伏羲八卦(복희팔괘)가 天道(천도)를 밝힌 것이라면 文王八卦(문왕팔괘)는 人道(인도)를 밝힌 것이며, 正易八卦(정역팔괘)는 地道(지도)를 밝힌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성숙기가 바로 노스트라다무스가 멸망한다고 한 시기입니다. 그 시기는 25년 후가 아니예요. 멸망은 아니지만, 전세계 인류의 60%가 줄어드느냐, 80%가 줄어드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실상의 멸망으로 보는 거지요. 그때엔 현재 지구전체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대륙이 4분의 3으로 확장됩니다. 세계적인 지진과 해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즘 지진이 전혀 없던 나라에서도 지진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艮方(간방)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搖動(요동)이 적고 해일의 피해도 극히 적을 것입니다. 易學(역학)의 원리에 의거해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세계적으로 제일 좋아진다고 보겠습니다. '相逢此理立談者(상봉차리입담자)여, 千萬人中無一人(천만인중무일인)'이라는 古人(고인)의 말과 같이 과연 이렇게 오는 한국의 장래를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해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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