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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타 왕국

碧空 2008. 6. 5. 19:32

             무스타 왕국

 


무스탕왕국

네팔지도에서 티벳쪽으로 튀어 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곳이 무스탕왕국이다.
인구 15,000~25,000명의 소국(小國),
1830년대에 아마 팔(Ama Pal)에 의해 무스탕 왕국이 세워졌다고 한다.
중국이 티벳을 점령하자 무스탕 정부는 네팔 정부에게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네팔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도 왕이
통치하는 자치왕국이다.

"로" 왕국이라고 불리고, 수도가 로만탕(Lo Manthang)은 벽으로 둘러 쌓여진
성벽도시로, 4개의 절과 왕궁이 있다.

중국이 티벳을 강점하자 많은 티벳인들이 무스탕으로 피난하여 대중국투쟁의
중심에 섰으나 중국의 압력에 네팔 정부는 무스탕 왕국 입구를 폐쇄,
더욱 은둔에 길로 가다가
1992년부터 제한적으로 개방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야 세상에 문을 연 오지(奧地) 중의 오지…
수도 로만탕, 해발 3809m에 위치
▲ 해발 3809미터의 로만탕은 무스탕의 수도이며 왕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척박한 산들을 수 없이 넘어야 이곳에 닿게 된다.
▲ 탕게는 무스탕에서도 깊은 변방에 속하는데, 이곳이야말로 무스탕의 내원이라 할 수 있다.
 
 
로(LO)는 14세기에 세워진 왕국으로 티베트에 의해 둘러싸인 오래되고 외로운 땅이다. 동쪽의 돌포(Dolpo)에서 시작해 서쪽에 있는 라다크(Ladakh)까지 펼쳐진 거대한 지역이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로 왕국은 쇠약해지기 시작했으며, 티베트와의 싸움에서는 네팔을 지원하는 대가로 왕족 계급인 라자(Raja’s)와 농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무스탕(Mustang)의 왕 자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네팔의 왕으로부터 주어진다. 공식적으론 1956년 농노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마을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왕에게 남아있는 상태다.
 
 
▲ 이곳에서 연료로 쓰는 것은 나무뿌리와 야크와 여러 짐승들의 마른 똥이다. 연료를 찾아 나선 소녀들.
▲ 대부분의 땅에는 보리와 메밀을 경작한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노동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다.
 
 
▲ 만년설로부터 내려오는 깨끗한 물은 매우 적고 귀하다. 이런 이유로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냇가의 물을 이용한다.
1873년 하리 람(Hari Ram)이라는 사람이 무스탕의 수도인 로만탕(Lo-Manthang)에 들어갔다. 그를 빼면 무스탕에 최초로 발을 디딘 서양 사람은 스위스 지질학자 토니 하겐(Toni Hagen)으로, 1950년의 일이다. 그는 1960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나는 라자의 도시에 처음으로 관심을 둔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라자의 수도에는 흙벽과 유리창문으로 이루어진 4층의 궁전이 있었으며, 그것은 건축적으로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라고 썼다.
 
무스탕을 일러 ‘티베트로 파고든 눈 안에 있는 엄지’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지형은 말 그대로 히말라야 산맥을 지나 티베트 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이런 까닭에 1960년 이후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항거한 사람들이 많이 넘어왔으며, 그 중심엔 감파(Khampa) 게릴라가 있었다. 이로 인해 그나마 남아 있던 루트 또한 완전히 폐쇄되었고, 1991년까지 로의 길이 외부인에게 열린 적은 없었다고 한다.
 
로는 무스탕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무스탕이라는 이름은 왕이 머물고 있는 요새이자 로 수도인 로만탕이 와전되어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연을 간직한 채 오랜 시간 동안 감춰져 있던 곳이 최근에 들면서 문을 열기 시작했다.
 
 
▲ 무스탕은 자외선이 강하고 건조하며, 일교차도 심한 지역이다. 채소밭을 모래 섞인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벽을 쌓았다.
▲ 15세기에 군사 요새로 세워진 카그베니는 무스탕 왕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 우기가 되면 강의 지류는 수시로 바뀐다. 물이 빠진 후의 칼리 간다기.
 
 
무스탕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는데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로어 무스탕(Lower Mustang)과 출입 허가가 필요한 어퍼 무스탕(Upper Mustang)이다. 좀솜(Jomosom)과 에크로바티(Eklo Bhatt’i) 그리고 카그베니(Kagbeni)까지는 간단한 검문을 마치면 들어갈 수 있지만 카그베니를 경계로 하여 탕베(Tangbe), 추상(Chhusang), 첼레(Chele), 사마르(Samar), 샹보체(Syangboche) 등 북쪽 지역으로 들어가는 데는 트래킹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는 데 필요한 조건은 2인 이상이 동행해야 하며, 10일 이상의 기간을 신청해야 한다. 그래야 로만탕과 그 주변 그리고 그 너머까지 갈 수 있다. 이에 필요한 경비는 1인당 하루에 70달러다. 그러니 최소 1400달러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외국인에게만 받는 통행세치고는 너무 과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가이드와 짐꾼, 요리사, 말과 마부까지 구해야 하니 비용은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정된 날을 지나 더디게 나오게 되면 하루가 늦더라도 열흘치의 벌금을 물어야 하니, 일정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 해발 3560미터에 들어선 사원의 뒷마당은 어린 라마승들의 축구 경기장이기도 하다.
 
 
로만탕으로 가는 길
 
무스탕으로 가기 위해서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포카라(Pokhara)까지는 버스를, 거기서 다시 비행기를 이용해 좀솜까지 가야 한다. 그린라인(Green Line)이라는 버스에 오르니 운전사와 조수를 빼고는 모두가 외국인뿐이다. 카스트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네팔에서는 아직까지도 낮은 계급의 사람은 탑승을 거부당하기 일쑤라고 한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외국인과 동행을 하는 경우다. 히말라야 트래킹을 떠나는 이방인의 편의를 위해 눈감아주는 것이다. 버스에 오르니 차장의 조수가 생수를 한 병씩 돌린다. 하지만 동승을 허락한 현지 짐꾼들에게는 물이 주어지지 않는다.
 
포카라에 도착해 짐을 푸니 저녁시간이 되었다. 숙소 근처의 페와(Phewa) 호수엔 밤이 더욱 깊어지고, 호수 건너편 집들에서 내보내는 불빛이 마치 별처럼 반짝이며 흔들린다.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청해 이른 새벽에 공항으로 나간다. 어수룩해 보이는 쌍발 엔진 비행기가 힘차게 날아오른다. 항로는 만년설이 덮인 히말라야 산맥을 향해 북서쪽. 다울라기리(Dhaulagiri)와 안나푸르나(Annapurna) 설산 봉우리 사이를 빠져나간다. 밑으로는 강줄기와 함께 민둥산이 줄을 잇는다. 지질학자들은 한때 이 불모의 땅을 가리켜 ‘아시아의 죽은 심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푸른빛을 띠는 터키석으로 머리 장식을 한 신부와 가죽부츠를 신은 신랑의 모습이 이채롭다.
해발 2720m의 공항에 다다르니 닐기리(Nilgiri)가 버티고 서있다. 해발 7061m의 설산이 눈앞에 잡힐 듯 가깝다. 포카라와 이곳 좀솜은 약 2000m의 높이 차이가 난다. 포카라가 따뜻하고 풍요로운 데 비해 이곳은 자외선이 강하고 바람이 세며 기온도 뚝 떨어진다. 두 명의 한국인과 현지인 가이드, 요리사, 마부, 세 명의 짐꾼, 말 세 마리가 일행이 되어 어퍼 무스탕의 관문인 카그베니로 출발한다.
 
이튿날 새벽 어퍼 무스탕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을 걸어 탕베, 추상을 지나 첼레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다음 마을인 사마르(Samar)까지 가기 위해서는 좁고 가파른 길을 넘어야 한다. 첼레의 언덕길은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길이 매우 좁은 탓에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길이 벼랑에 바짝 붙어있어 자칫하면 사고를 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짐을 실은 말이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넘을 때면 짐이 벽에 부딪히며 중심을 잃은 말들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이제는 조금 넓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위험스러운 길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마르, 샹보체, 케미(Ghemi)를 거쳐 도착한 곳은 닥마르(Dhakmar). 이곳 지명의 뜻은 ‘붉은 벽’이다. 말 그대로 붉은 벽이 길고 넓게 누워 있어서 마치 산처럼 보인다. 붉은 벽 아래엔 작은 마을 두 곳이 들어섰다. 벽에는 동굴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티베트 라마승의 기도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그 이전에는 로의 사람들인 로바(Loba’s)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로만탕까지 이어지는 여정 중 가장 크고 기름진 마을은 차랑(Charang)이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오르니 누렇게 익은 보리밭과 분홍빛을 내는 메밀밭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곳도 무스탕의 다른 지역들처럼 풀과 나무가 전혀 없는 황무지로 둘러싸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물이 매우 귀한 곳이다 보니 사람이 모여 사는 곳 외엔 물을 구경할 수 없다. 이처럼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척박하고 아름다운 세계
 
흙으로 빚은 담장이 구불대는 골목을 따라 도착한 사원에서는 어린 라마승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해발 3560m에서 벌어진 경기의 심판은 어른 스님이다. 호흡이 가빠서 엄두도 못 내는 이방인에 비해 월등한 폐활량을 지닌 아이들은 공놀이에 열심이다.
 
여정은 계속되어 로만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다다른다. 목적지인 해발 3809m의 도시의 코앞까지 온 것이다. 로 라(Lo La)라고 이름붙여진 언덕엔 커다란 룽다(티베트의 경전을 써넣은 천으로 만든 깃발)가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룽다는 ‘바람의 말(馬)’이란 뜻이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깃발의 끝부분들은 이미 닳아있는 상태지만 위세는 당당하다.
 
 
▲ 로만탕 남동쪽의 파로 가기 위해서 해발 약 4300미터의 언덕을 넘는다.
 
 
로만탕은 7m에 이르는 높은 성으로 둘러싸인 요새와도 같다. 무스탕 왕국의 수도답게 4층 높이의 왕궁이 있고, 큰 사원이 성 안에 세 개나 있다. 하지만 성의 규모는 크지 않아서 성벽을 따라 1시간 이내를 돌고 나면 시작지점에 다시 오게 된다. 작은 성의 규모에 비해 사원이 크고 많은 것을 보면, 무스탕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집집마다 법당을 하나씩 갖추고 있다는 점 또한 삶과 종교가 하나로 묶여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스탕은 네팔이 통치하는 땅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문제이지 정신과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사원에서 티베트어를 배우고 있으며,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종교의 영향력은 더 커지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 최근 들어 큰 마을마다 네팔 정부에서 지은 초등학교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곳에선 네팔어와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티베트어는 교과 과정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로만탕은 험난한 황무지로 둘러싸여 있지만 무스탕에서 가장 풍요롭다. 넓은 초지가 있고, 이곳으로 흘러드는 물이 풍부한 곳이다. 왕국의 수도를 벗어나 북쪽으로 더 깊이 들어간 갸르푸(Garphu)라는 지역에 닿는다. 이곳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지 않은 인공 동굴이 밀집해 있다. 동굴의 안쪽은 개미 굴 마냥 서로 연결이 되어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서너 평이 넘는 공간도 있다. 이런 방들이 여러 층을 이루고 있다.
 
 
▲ 정치적으론 네팔에 속해 있지만 이곳은 티베트 불교가 지배하는 땅이다. 결혼식에는 축복의 의미로 달라이라마의 사진을 놓기도 한다.
 
 
로만탕을 떠나 남동쪽의 외딴 마을 탕게(Tangge)로 가는 길은 전체 여정 중 가장 힘든 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충분한 것이어서 해발 4334m의 언덕인 파(Paha)에 올랐을 땐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동으로 벅차 올랐다.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구름들의 움직임과 세상의 끝이라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깨끗한 전망.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벅찬 마음을 간직한 채 쏟아지는 별을 맞으며, 밤길을 걸어 무스탕의 속살 탕게에 도착한다.
 
아침에 일어나 협곡들을 끼고 줄지어 선 초르텐(Chorten-티베트 불교의 상징물 중 하나로 우리의 탑과 비슷하다)을 보는 순간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막에 이처럼 큰 규모의 탑들이 들어설 수 있을까? 탑을 세우며 그 안에 담아 놓은 사람들의 염원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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