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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가 멋대로 법 만들어 통치, 시민이 권력 회수 할 수 있어
[박상훈 ‘고전으로 읽는 민주주의’] 존 로크의 『시민 정부론』
로크는 혁명가다. 폭정은 “자연 상태나 무정부보다 나을 게 없다.” 인민은 “폭정에서 벗어날 권리뿐 아니라 예방할 권리”, 즉 저항권과 혁명권을 갖는다. “우리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누구든, 야생의 맹수 가운데 하나로 취급”해도 좋다. 특히 사회계약을 위반한 자에게는 “후회할 이유는 물론 남들이 유사한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책의 저자를 혁명가가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정부가 권리를 넘는 권력 행사하면 폭정

1689년 4월 잉글랜드의 ‘공동왕’ 윌리엄3세와 메리2세 대관식 그림. 왕이 의회와 타협하며 통치하는 시대를 연 명예혁명이었다. [중앙포토]
책의 내용은 명료하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자연 상태는 “완벽한 자유의 상태… 아무도 남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갖지 않는 평등의 상태”다. 그런 인간이 정부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자유와 생명, 재산)을 안전하게 향유하며…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정부의 목적은 통치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다.
권리는 “나의 보존을 위한 유일한 보장책인 자유의 울타리”다. 나의 권리를 “위력으로 제압하려 드는 자가 있다면 그는 내게 전쟁을 걸어온 것”에 다름 아니기에 “그런 인간이 있다면, 늑대나 사자를 죽여도 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그를 죽여야 한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권리를 넘어선 권력을 행사”하면 폭정이다. 정부가 폭정을 일삼으면 인민은 자신이 위탁한 권력을 다시 회수해야 한다.
책은 짧다. 혁명 과정에서 쓰고 발표한 팸플릿이었기에 읽기 쉽다. 정부는 통치자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라고 외쳐야 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다시 언급될 고전이 이 책이다.
로크의 혁명론은 독특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혁명을 ‘정체(헌법)의 변화’라는 맥락에서 이해했다. 마키아벨리는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기 마련인 인간의 정체를 주기적으로 혁신하는 일을 혁명으로 보았다. 로크 이전까지 혁명론은 ‘정치에 의한 정치의 혁명’이었지 ‘사회 혁명’이 아니었다.
로크는 사회 혁명을 말한 최초의 철학자다. 정부가 ‘시민의 권리 보호’라는 본래의 목적을 버리고 권력자 자신을 위해 지배하려 할 때 사회가 들고일어나는 혁명론을 로크는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로크의 혁명론은 특이하다. 신분과 계급의 질서를 뒤엎는 반체제 사회혁명이 아니라, 사회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혁명론이기 때문이다.
홉스가 ‘국가’와 ‘주권’을 말했다면, 로크는 ‘정부’와 ‘사회’를 말한다. 홉스의 국가에는 대들 수 없다. 그건 반란이자 죽음이다. 로크는 국가나 주권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시민 정부, 좀 더 정확하게는 시민 권리를 위협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을 말한다. 반국가는 용서될 수 없지만, 자유 사회에서 정부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다. 이를 처음 말한 사람이 로크다.
반정부의 정당성,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로크의 사회다. 홉스는 자연 상태의 비참함을 벗어나고자 국가라는 절대 권력을 곧바로 도출해 냈기에 사회론이 필요 없었다. 반면 로크의 경우 자연 상태와 정치권력 사이에는 사회가 있다. 게다가 자연 상태를 벗어나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도 순조롭다. 자연의 상태든 시민의 사회든 거기에는 충분한 합리성과 자율적 조정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로크의 개인은 왜 자연이나 사회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권력을 불러들인 것일까. “각자의 권력이 워낙 들쭉날쭉하고 불확실하게 행사되기 때문에 여러 불편에 노출되(고)… 이런 불편 때문에 그들은 정부의 확립된 법률 아래에 피난처”를 구하려 했기 때문이다. 확고한 권리를 가진 시민사회의 기반 위에다 정부를 앉힘으로써 “자기 소유의 보존을 도모”하려 한 것이 로크의 사회계약론이다.
로크 이전의 홉스에게 정치 없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곧 자연 상태이고 사실상 내전의 전야다. 로크 이후의 루소에게 사회는 평화로운 자연 상태를 파괴한 주범이다. 문명은 계급과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를 낳았다. 그래서 루소는 정치를 통해 사회를 변혁하려 했고 그래서 자연 상태에 가까운 민중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홉스와 루소 두 사람 모두의 맞은편에 로크가 서 있다.
당신은 어떤가. 좋은 정치나 좋은 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를 거점 삼아 폭정에 저항하면서 시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운동이 중요하다고 보는가. 이도 저도 싫어 정치도 사회도 떠나 자연인의 삶을 바라는가. 1651년(홉스의 『리바이어던』)과 1762년(루소의 『사회계약론』) 사이인 1689년(로크의 『시민 정부론』)에 로크는 두 사람과 다른 관점에서 뜨겁게 불타는 문제를 던졌다.
『시민 정부론』

존 로크
명예혁명(1688년) 이듬해 출간한 존 로크의 대표작. 원제는 ‘통치에 대한 두 논고’이고, 부제는 ‘시민 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목적에 관한 시론’이다. 첫 번째 논고에서 다룬 왕권신수설이 곧 시대착오적인 주제가 됨에 따라, 로크의 『시민 정부론』이라고 하면 보통은 두 번째 논고를 뜻한다. 로크는 ① 자유와 생명, 재산 등 자신이 소유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 왜 사회를 만들고 정부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②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정부의 권력은 왜 나누고 분립해야 하는지 ③ 정부가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로서는 지극히 위험한 주장이었고, 그래서 익명으로 출간했으며 죽기 직전에야 자신이 저자임을 밝혔다.
저자 존 로크(1632~1704) 가장 영국적인 철학자다. 경험론을 정초했고 의회 주권을 정당화했으며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철저하리만큼 끝까지 옹호했다. 천식을 달고 살 정도로 병약한 몸으로 왕당파의 박해를 피해 5년 넘게 망명 생활을 했다. 다행히 명예혁명을 계기로 영국에 돌아온 50대 후반부터는 주목받는 지식인이 되었다. 평생 독신이었고 집도 없이 떠돌았지만 오랫동안 철학적 관심을 공유했던 매섬 부인의 보살핌 속에서 72세로 생을 마쳤다.
로크에게 사회를 닮은 정부 부서는 입법부다. 최악은 집행 권력이 입법 권력을 지배하는 것이다. 집행 권력이 자신을 위한 법을 만들어 통치하는 상황이야말로 로크가 가장 두려워한 폭정이었다. 그래서 로크는 인류 최초로 두 권력이 융합되는 것을 막고자 권력 분립을 주장한 사람이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크는 홉스와 갈라선다.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만인에게 공통된 법을 부과하는 사회계약을 주창했다. 합의에 의해 등장한 국가와 주권은 절대적이다. 쪼갤 수 없다. 권력과 권력이 싸우게 해서는 안 된다. 그 길은 내전이다. 그래서 홉스의 사회계약은 번복도, 반복도 안 된다. 로크는 그런 홉스에 반대했다. 그것은 마치 “긴털족제비나 여우가 저지를 수도 있는 악행은 조심하면서 정작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인간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회계약은 절대적이지 않다. 지금이 좋은 정부인가는 계속 물어야 한다. 목적을 상실한 정치권력에서라면 새로운 사회계약을 준비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홉스의 국가론은 사회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반면 로크에게 강한 국가론은 허용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회를 보호하고 시민의 권리를 존중할 때만 존중되는 정부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로크의 이 책은 오늘날 인류가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원칙으로 삼는 천부 인권론, 입헌 정부론, 권력 분립론, 제한 정부론의 시조가 될 수 있었다.
로크의 아버지는 법률가이자 청교도였다. 잉글랜드 내전 당시 의회군 장교로 가담했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좋은 교육을 받은 로크가 왕당파가 될 수 없는 것은 운명이었다. 학생들 대부분이 신학을 전공하고 교회나 수도원에서 직업을 찾던 시대에 로크는 의학을 전공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세상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인식하자마자, 나는 내가 폭풍 속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로크는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공부했고 학교에 남아서 가르치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옥스퍼드는 왕당파의 거점 도시였다. 정치적 격변 때마다 반대파를 색출했는데, 총장이 “과묵함의 대가”라고 불렀을 만큼 로크는 자신을 감춰야 했다.
결국 로크는 옥스퍼드대에서 쫓겨났고, 그가 찾아간 곳은 의회파 지도자 샤프츠베리 백작이었다. 그는 ‘휘그’라고 불리는 영국 최초의 정당을 이끈 사람이다. 로크는 백작을 고통스럽게 했던 간종양 수술을 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고, 주치의이자 비서로서 그에게 헌신했다. 로크보다 11살이 많았던 백작은 급진 의회파의 ‘수괴’였다. 그의 정치적 지향을 정당화하던 중에 대격변이 벌어졌다. 혁명이었다.
입헌정부·제한정부·권력분립론의 시조
이때의 혁명이란 잉글랜드 의회가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빌럼(영국명 오렌지공 윌리엄)과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퇴임시키고 그와 그의 처를 공동 군주(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로 앉힌 대사건을 가리킨다. 그들을 불러들인 것도, 왕으로 추대한 것도 의회였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의회가 마련한 ‘권리 장전’에 서명해야 했다. 그 내용에는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법률의 적용·면제·집행·정지를 금지한다”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평시의 상비군을 금지한다” 등이 있었다.
의회가 현 군주를 내쫓고 새 군주를 선택해 계약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의회의 동의’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명예혁명이 혁명일 수 있는 것은 이 대목에 있었다. 당연히 의회가 그럴 권한이 있는지, 군주가 의회의 요구를 왜 수용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반론과 두려움이 만연했다. 로크는 혁명을 정당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바엔 가장 급진적인 옹호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정치가만이 아니라 지식인에게도 기회가 필요한지 모른다. 하지만 보통 수준의 지식인은 기회를 줘도 행운으로 만들 줄 모른다. 조심스러웠던 로크는 용기를 냈고, 덕분에 그는 불멸의 정치 고전을 쓴 행운의 저자가 되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