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 그 천년의 숨결] (2) 시공을 뛰어넘은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김재필 사진작가 · 필아트영상 대표편집부 2024-12-16 16:53:12
천년의 고졸한 미소를 띄고 있는
불곡(佛谷)의 선정인(禪靜人)
- 경주 불곡 감실 마애여래좌상(보물 제198호)
김재필 (사진작가 · 필아트영상 대표)
서산 마애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널리 알려진 미술사학자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은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답사 후 그의 저서에서 “이 신비한 백제의 미소와 불상의 대표작에 부친 제대로 된 찬문(讚文)의 아름다운 수필이나 시 한 편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라고 했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28p) 그러나 내가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에 대해 읽어 본 시는 3편이나 있었다. 이 중에서 대전문학관 관장인 이은봉 시인의 시집 『책바위』에 실린 「서산 마애불」을 서두에 올려본다. 그는 이 시에서 백제의 미소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환희의 기쁨’을 노래하는 부처를 본 것 같다.
1959년 4월, 당시 부여박물관장이었던 홍사준이 충남 서산의 보원사터에 유물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지나가는 나무꾼에게 “이 근처에 불상이나 사람이 새겨진 바위가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무꾼은 아래와 같은 재미있는 대답을 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 옆에 본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시유. 근데 작은 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 마누라가 짱돌을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디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구 있지유.”
이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에겐 본존상(280cm)은 산신령으로, 우측 제화갈라보살상(170cm)은 본마누라, 좌측 미륵반가사유상(166cm)은 작은 마누라로 보였던 것이다.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상 2206
이로써 그 마을 인근 사람들만 알고 있었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 상왕(象王)의 인보(印寶)가 바위에 감추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인바위라 불리는 층암절벽에 새겨진 강댕이골 산신령은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국보로 지정(1962년 12월 20일)된 마애불로서,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으로 다시 태어났다.
홍사준 관장은 이를 즉각 국보고적보존위원회의 이홍직(李弘稙), 김상기(金庠基) 교수에게 보고하였으며, 위원회에서는 그해 5월 26일, 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 박사와 황수영(黃壽永) 교수에게 현장조사를 의뢰하여 조사단을 꾸려 현장으로 내려보냈다. 조사단은 이 마애불이 백제시대의 뛰어난 마애삼존불상인 것을 확인하였다.
정면에서 바라 본 서산 마애삼존상 2206
우측의 제화갈라보살상 상호
좌측의 미륵반가사유상 상호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자리한 충남의 내포지방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백제의 수도 부여로 가던 길목이었다. 이곳은 6~7세기 당시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하던 곳으로, 주위에 있는 예산 화전리 ‘석조 사면불’과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등이 찬란했던 불교문화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보통 백제의 불상은 균형미가 뛰어나고 단아한 느낌이 드는 귀족 성향의 불상과 온화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서민적인 불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민적인 불상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다
이 마애불은 7세기 전반경에 조성되어 1,400여 년이 지났건만 보는 이에게 석공의 숨결이 지금도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게 잘 다듬어진 바위면 가득히 새겨져 있다. 조각기법이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게 형상을 잘 표현하여 언뜻 보면 소박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신체 각 부위의 비례감도 뛰어난 데다 음각으로 파낸 선의 깊이와 넓이가 신체 부분마다 달라 멀리서 볼 때 입체감이 잘 살아나 작품성도 뛰어나다. 광대뼈가 살짝 드러난 둥글넓적한 얼굴과 해맑은 미소는 우리에게 친근한 소년상을 연상시키고, 간결한 조각수법으로 자연스레 살려낸 볼륨감에서 부조의 예술미가 넘쳐난다. 이 마애불은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내포지방) 특유의 미의식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당시 백제 사회의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알 수 있다.
세 분의 부처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인 《법화경》에 나오는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장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삼존불)로서, 가운데 본존불은 석가여래불이고, 우측 관음보살상은 삼산관(三山冠)을 쓴 입상(立像)으로 양손을 모아 봉보주(捧寶珠)를 들고 있는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이며, 좌측 오른손을 뺨 위에 대고 의자에 앉아 있는 미륵보살은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으로 본다. 좌우 협시불로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을 두는 형식은 오직 이 삼존상에서만 나타나고 다른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므로 매우 독특한 형태의 삼존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당시 백제인들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여겨지고 있다.
삼존상을 밑에서 받치고 있는 복련 연화대좌도 둥그스름하여 볼륨감이 아주 좋고, 화려하지 않으나 우아한 격조를 갖추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삼존상 모두의 얼굴이 둥글고 풍만한 편인데, 특히 본존상은 후덕한 얼굴에 약간 두툼하게 솟은 눈두덩, 가늘게 휜 반달형 눈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호에 소개한 경주에 있는 ‘불곡마애여래좌상’의 상호를 떠 올리게 하여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퍽 인상적으로 다가와 저절로 긴장을 풀고 근심이 사라지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상호부분을 확대 촬영하면서 자세히 보고 있노라니, 차갑고 둔중한 바위에서 포근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찾아낸 백제인의 심미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27년 전 로마를 방문했을 때, 바티칸시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인 ‘천지창조’와 벽화인 ‘최후의 심판’을 그린 화가로 유명한 미켈란제로의 조각 ‘피에타’를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화가이면서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는 불후의 명작 ‘피에타’를 조각하는 작업에서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이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즉 “돌 안에 가두어져 있는 위대한 형태를 보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돌을 조금씩 뜯어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허나 우리 백제의 이름 없는 석공은 바위 안에 숨어 있는 부처의 형태뿐만 아니라 미소까지 발견하여 망치와 정으로 수만 번이나 바위를 쪼아 삼존불을 모셔내었던 것이다.
백제 유산 연구의 선각자 홍사준(洪思俊. 1905~ 1980) 선생은 이 마애불을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그 환한 미소가 ‘반가사유상’(국보 83호)의 신비한 미소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국보 ‘반가사유상’이 신라가 아닌 백제 작품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마애불이 서 있는 방향은 동동남 30도,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햇볕이 풍부하게 비추는 방향(경주의 ‘불곡마애여래좌상’과 같은 방향이다)이고, 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이 80도 정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게 되어 있어 미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조성되었기 때문에 크게 마모되지 않고 1,400년이나 지난 우리에게 당신의 미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이 마애불의 미소는 빛과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즉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를,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마침 내가 마애불을 답사하러 간 시각이 여름의 오후 5시경이라 마애불은 나에게 자비로운 미소를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애불의 미소에 대한 일화 둘을 소개해 보겠다.
그 하나. 동국대 총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을 지낸 불교미술 사학자 황수영(黃壽永, 1918~2011) 박사가 어느 학술회장에서 이 서산마애불 발견을 학계에 보고할 때였다. 깜깜한 실내에 슬라이드 화면을 비추고 그 옆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중에 문득 미소를 지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청중들 모두 선생의 미소와 마애삼존불 본존의 그것이 너무 닮았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이로부터 선생의 미소는 삼존불의 미소를 닮은 ‘명품 미소’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 둘. 얼마 전에 서울지방법원의 한 부장 판사가 후배 판사들에게 “재판을 진행할 때 서산 마애불의 미소 같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온 국민을 따뜻하게 맞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요즘 시끄러운 사법계의 세태 속에서 그 판사의 심성이 작은 희망으로 비추어져 마음이 푸근했다.
그러면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왜 ‘백제의 미소’로 불리게 되었을까?
고고학자 김원용(金元龍, 1922~1993) 선생은 발견 다음 해인 1960년에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는데,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라고 말했다.
그 후부터 우리나라 마애불 중 백미로 손꼽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백제의 미소’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1,400여 년의 시공을 넘어 만나 본 나에게까지 마애삼존불의 잔잔한 미소가 안다로미 전해져 답사의 즐거움과 보람을 한층 느낄 수 있어 옛 백제 땅에서 태어난 것 또한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오늘만의 호강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