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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의 매화시 와 두향이야기

碧空 2024. 1. 15. 21:10

퇴계 선생의 매화 시(詩)와 두향이 이야기
이황(李滉) 퇴계(退溪)선생은 매화(梅花)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그래서 매화를 노래한 시(詩)가 일백(一白)수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이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였다. 그리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 선생은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거문고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그녀는 언제나 퇴계의 곁에서 거문고를 타며 퇴계(退溪)의 얼굴에서 미소(微笑)가 떠나지 않게 한 여인(女人)이다.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그러나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퇴계선생이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마주 앉아 주고받았던 한시(漢詩)가 백미(白米)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死別己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生別常測測)”
그리고 퇴계는 말을 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뿐이다.”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 선생이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2개와 매화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 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퇴계 선생은 두향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매화를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다.


다음은 퇴계가 두향에게 보낸 시
黃卷中間對聖賢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이별후 이들은 만나지 못하고 서로 서신(書信)만 주고받았다.
퇴계 선생은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조용하게 지냈는데 한 때는 병세가 위독해서 자신도 모르게 옷을 입은 채로 설사를 하게 되었다. 그 경황에서도 그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불결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매화 화분을 딴 방으로 옮기라 하였다. 그 매화가 바로 두향이 준 것이어서 각별히 애지중지 하였다.
명종과 선조 임금이 항상 퇴계에게 큰 벼슬을 내리면서 조정으로 나올 것을 간곡하게 청했지만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출세보다는 학문에 전력했던 군자(君子)였다.
그리고 시(詩)와 음악(音樂)과 한 여인을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였고 또 달(月)과 산(山)과 강(江)과 매화(梅花)를 유달리 사랑했던 풍류객(風流客)이었다.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前身應是明月)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幾生修到梅花)”
퇴계 선생의 시 한 편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병이 깊어 누워 있던  1570년 섣달 초여드렛날, 제자들이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창문으로는 눈부신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윗목에는 매화 화분 하나가 두세 송이 부푼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데,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가득했다는 증거였다. 이 말을 끝으로 선생은 미소 띤 표정으로 앉아서 이승을 하직 했으니, 이때 선생의 나이 70세였다.
그날은 맑았는데  오후 다섯 시쯤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 남짓 내렸고 조금 뒤 선생이 숨을 거두시자 구름을 흩어지고 눈도 그쳤다. 두향이 퇴계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를 이어 안동의 도산서원에 그대로 피고 있다.
어느 날 두향이 안동의 퇴계에게 난초를 보냈다. 단양에서 두향과 함께 기르던 것임을 알아차린 퇴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자신이 평소에 마시던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냈다.
이 우물물을 받은 두향은 물을 마시지 못하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퇴계의 건강을 비는 정화수(井華水)로 소중히 다루었다. 어느 날 이 정화수가 빛깔이 변하는것을 보고 퇴계가 돌아가셨다고 느낀 두향은 소복 차림으로 단양에서 머나 먼 도산서원까지 4일간을 걸어서 돌아가신 님을 뵈었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던져 생을 마감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지극히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퇴계 종가(宗家)에서는 두향이 묘(墓)에 벌초하고 그녀의 넋을 기린다. 퇴계 선생의 파격적인 사랑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지만, 그애달픈 사랑을 잊지는 않는 다는 것이 사람의 예(禮)인 모양이다. 또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는 존경(尊敬)하는 님에게는 변치 않는 숭고(崇高)한 사랑으로 승화(昇華)시키는 것 같다.


<도산서원 매화>
퇴계 선생과 매형(梅兄) 선생께서는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유별나 "내 평생 즐겨함이 많지만 매화를 혹독하리만큼 사랑한다."고 “매화시첩(梅花詩帖)”에 적고, 매형이라 불렀습니다. 퇴계는 생전에 매화를 매형 이라고 부르며 무척 아꼈다고 한다.
조정에 나아가 국사를 처리하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매화와 묻고 답하며 풀어 나갔고, 눈 내리는 겨울 밤 홀로, 분매(盆梅)와 마주 앉아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매형 한잔 나 한잔!”하며 밤을 지새워 시정(詩情)에 취하기도..
<두향의 묘(墓)>
충북 단양의 장회나루. 강 건너 산기슭에 두향의 묘가 있다.  충주호 유람선을 타면 멀리서 볼 수 있으며, 직접 두향의 묘를 찾아 가려면 단양군청의 허가를 받아 비상용 선박을 이용하면 된다고 한다.
두향은 본시 기녀가 아니었으나 5살 때 부모와 사별하고 퇴기(退妓)인 수양모 아래서 자라 10살 때 기적에 올랐다고 전한다.그녀는 얼굴도 뛰어나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시문과 서화에도 특히 매화와 난초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선생의 고매한 인격과 심오한 학문에 감탄하여 수청기생을 자청하였다.
<두향묘시>
一點孤墳是杜秋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降仙臺下楚江頭 강선대 아래 강나루 언덕에
芳魂償得風流價 어여쁜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絶勝眞娘葬虎丘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주었네
노산(蘆山) ‘이은상(李殷相)’도 이곳에 들려 시한수를 남겼다.
“두향아, 어린 여인아 박명하다 원망치 말라.  네 고향 네 놀던 터에 조용히 묻혔구나 지난 날 애국투사 못 돌아 온 이가 얼마인데, 강선대 노는 이들 네 무덤 찾아내면 술잔도 기울이고 꽃송이도 바친다기에, 오늘은 가을 나그네 시(詩)한 수 주고 간다.“


- 좋은 글 중에서 -
원앙매-만첩홍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