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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만주와 백두산

碧空 2016. 1. 14. 12:13
역사의식과 뿌리 재조명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은 미래가 있을 수 없다. 타민족에게 흡수되거나 세계화 속에 분해  되거나 소멸되어간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지나간 인류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보아 왔다. 일제에 끝까지 항거한 독립투사이며 유명한 역사학자 고 장도빈(張道斌) 선생의 말씀을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광개토왕 시대의 우리삼국의 인구는 四천만이고 중원대륙 안에(태행산맥 이서 내륙 太行山脈 以西 內陸) 당나라의 인구가 五천만이라고 하셨다.


 이는 당시의 당나라의 국력과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국력을 인구비례로 비교한 것으로 이를 오늘의 중화족 중심으로 되어있는 현 중국 대 한반도를 비교하면 국력의 쇠잔과 영토의 축소 및 인구의 축소로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의 인구 비례 5대 4가 현재는 18대 1정도로 큰 차를 이루었으니 우리민족의 운세가 기울어졌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그 당시의 우리 백두산족의 강성한 국력을 짐작 할 수 있다. 권태훈옹(소설 단의 주인공)에 의하면“백두산족의 운세는 은(殷)나라 이후(동이족의 민족사民族史) 3천년 주기로 변하여 이제 다시 시작된다.”고 한다. 뜻이 있는 사학자들은 새로운 사관의 올바른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한 민족의 흥망은 역사의식에서 비롯된다. 또한 뚜렷한 지도이념을 가진 민족은 인류사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국운과 민족의 번영 발전이 있을 뿐이다. 허나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은 아무리 잘살고 강하다 할지라도 한때의 가물거리는 촛불과 같이 타오르는 역사의 불길 속에 소멸되고 말 것이다.


 역사의식의 부재, 그릇된 역사의식

 오늘 날의 모든 선진국들도 국가이념과 국력을 키우는 데에 있어 그들의 역사를 재조명 발굴 역사를 왜곡 연장 조작하고 있다. 일본이 우리에게 식민지정책 수행의 일환으로 심어놓은 식민지사관은 오늘의 역사의식과 주권의 자주능력을 잃게 하고 심지어 뿌리를 모르는 세대와 친일 부역자들, 분단의 현실에도 배불러서 안주하는 사람과 세계화나 무정부주의자들 통일을 거부하고 심지여 역사를 부정하는 파렴치한 궤변론자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다음 세대에게 통일교육은 있는지. 이는 그릇된 교육과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또한 미군의 주둔과 무관치 않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고려조 이후 조선조 이래 한번도 올바른 역사관을 국민들에게 상, 중고사의 고조선 전후역사의 정사를 제대로 가르친 일이 없다. 이제 와서 고구려역사를 들먹거린다.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번 도 민족정기와 민족자존을 바로 세운일이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상, 중고사의 역사를 발굴 민족정기를 회복 남북통일과 지구상의 온 겨레를 통합하는 데에 교육적 차원에서 각종 시험을 통해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야 할 것이다. 이의 역사회복은 교육자와 통치자의 의지와 결단에 있다. 그런데 아직도 초등1학년부터 고등학교1학년까지 10개년 간을 단일종목으로 정해 놓은 국사라는 것을 사회 과목에 포함하여 지도하고 그나마 고2.3학년은 선택과목이었다. 이러고도 국사교육이 있다 하고 유능한 역사학자를 키울 수 있는가?


 건국의 역사가 미천한 미국도 역사를 깊이 다루고 미국의 국가이념을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시민권을 취득하는 데에는 물론 각급학교 교과목에도 역사과목을 중요시하고 일등국민의 우월성을 주입하고 있다고 한다. 왜 우리는 못 하는가? 상고사가 굴절돼 있는데 현 중국도 역사연구를 강화하고 국토개념 확장과 패권주의로 이웃 간의 역사를 왜곡 우리의 상, 중고사를 찬탈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상고사를 지킬 능력과 의지가 있는가? 참 답답한 일이다. 역사교육 이수방법이 기득세력에 의해 일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또한 각종학과 채점도 방해당하고 있는듯하다. 이를 어찌 생각 하는가?


민족사관의 축소 왜곡

우리의 뿌리는 저 신화시대로 보는 알타이 시원始原과 바이칼호에서 시작한 바이칼의 후예들 (유목遊牧을 위주로 하는 순록馴鹿의 집단, ‘어느 분기分岐점에서 시베리아 또는 몽골의 흥안령興安領을 넘어 東 으로 東으로’또 한줄기 목축牧畜과 농경農耕을 함께한 집단, ‘세기의 비밀 내몽골의 피라미드’ 5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치우蚩尤천황 청구靑丘 벌 중원대륙 황하 문명권’오랜 여정에서 역사의 고리를 이루며 백두산족문화권을 형성한) 대 동이권이였다.


 그러한데 우리는 통일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조(朝鮮朝)때에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渤海)등을 등한시했으며 남북조(南北朝)로 분단된 당시의 역사적 운명과 사실을 저버렸고, 나아가 대 백두산족문화권 통합발전의 사명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같은 뿌리들을 (서기 전 후 부여 때부터 내려온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족 등) 북방 변두리를 야만족으로 몰아 오랑캐 종족으로 취급함으로서 그릇된 민족사관으로 축소 왜소하였다. 그 결과 동북지역의 역사적 맥과 유산을 다른 나라에게 떠넘기게 되었다. 애석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이를 민족적 자각과 슬기로운 지혜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 특히 상고사의 교육적인 대책이 필요할 때이다.


 대금제국의 시조 김한보

 우리는 알타이 시원과 바이칼호에서 출발 긴긴 여정을 통해 백두산 줄기 그 벌판 초원에 둥지를 틀고 자리한, 백두산 정기를 모아 이룩한 한줄기 백두산족문화권 (대동이권) 민족임을 자부한다. 그 찬란한 발자취를 살펴보자. 금(金)나라의 시조 김함보(金函普)는 본명이 김준金俊으로 대김제국의 태조 김아골타金阿骨打의 8대조다. 고려 황해도 평산 출신 스님으로 요초遼初 때에 어지러운 난세 중 만주 흑룡강 완안부完顔府에 들어가 그 지역 절대 권력자 여신무녀女神巫女와 결혼 흑수말갈족黑水靺鞨族을 지배했다. 그는 훗날 대금제국의 국조(경원황제景元皇帝)로 숭앙받았고. 또한 대금의 틀이 잡혔다. 신라가 망한 후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시모인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왕족가문들은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애신각라(愛新覺羅)를 성씨로 삼아 왕가의 자존심을 지켜가다가 먼 훗날 대청제국을 일으켜 기염을 토하게 되였다.  <大金國志. 滿洲原流考 參照> <대쥬신제국사>


 대청제국은 백두산족 문화권

 누루하치는 고구려와 발해에 이어 광활한 북방대륙에서 힘을 떨치다 1616년 칸汗 의 자리에 올라 대금제국의 명성을 추앙 그 뜻을 따라 후금을 세우고 요양遼陽을 거쳐 심양瀋陽으로 천도하여 청나라의 기틀을 세우게 했다. 또한 누루하치는 愛新覺羅의 이름으로 북방대륙과 백두산 변에 흩어져있는 진조선계辰朝鮮系 백두산족문화권들의 종족들을 규합하여 신라왕족가문의 자존을 확립하였다. 그 아들 태종은 내몽골을 병합,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옥쇄를 손에 넣고 36년 황제자리에 올라 국호를 청淸나라로 바꿔 대청제국으로 기염을 토했다.


 또한 오늘의 중화족이 가장 숭배하는 성조聖祖 강희제康熙帝와 건륭황제乾隆皇帝를 배출했다. 훗날 중원대륙을 정복 통합한 대청제국 청 태종은 중화족을 비롯하여 중원대륙(중국대륙)의 여러 종족들을 완전히 정복 지배하는 천하통일의 기염을 토했다. 그의 아들 세조 때 북경을 공략 이자성을 따라 명을 물리치고 북경에 진입 천도, 왕조를 이루다.


 또한 漢族을 제압 굴복시킨 변발령變髮令, 한족에게만 동북지방으로의 이주를 금지(비한화非漢化)하여, 그들만이 이어받은 백두산정기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성지 백두산 주변 100리 이내에 漢族들의 거주 이전을 엄금하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는 정책(백두산 성역화) 등으로 제압, 나아가 청나라는 스스로 만주족을 자칭(실은 생여진족) 자금성을 개축하고 천구단天丘壇을 쌓아 천자로서 하늘에 제를 지내고 중원을 다스리니 천부天符의 이치에 이르고 백두산족문화권의 권위를 천하에 떨쳤다.

 우리는 이러한 북방 백두산족문화권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여 이를 오늘에 있어 몽골 원나라의 문화와 유산 유적 역사까지 漢族문화인양 中國(지역 대칭대명사 國中)이라 하며 중국역사로 왜곡 둔갑하고 있다. 청나라는 동이족의 원수인 한족[漢族之國=明]을 연합토벌작전을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얼빠진 조선조는 같은 문화권인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명나라에 빌붙어 신흥제국 청 태종과 맞서다 패해 수모를 당했다.


 인조의 치욕의 한(1637년 병자호란 때 대청제국의 황제 청 태종에게  인조가 삼배 구고두 三拜 九叩頭)은 있지만, 우리는  그래도 역사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오늘에까지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의 감정만 가지고 < 인조의 황복을 받아낸 청태종은 전승공덕비로 세운 삼전도 비문에 이를 고증하는 만주 글과 몽고 글 각 20字 (한문과 구분)이 석각되어있다. 송파구 석촌동 >  그때나 지금이나 백두산족문화권인 대청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오랑캐로 취급, 북쪽에 사는 같은 뿌리를 차별 멸시 적대 감정을 갖고 백두산족  줄기에서 (한때 일제에 앞 자비 들은 발해渤海까지도) 제거하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은 우리가 버린 대청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흡수  중심권에 세웠다. 그런데 우리는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지킬 것인가.


 같은 백두산족의 영웅호걸들의 큰 역사적 인물들의 부침(浮沈)을 인정하지 못하고 끝내는 한족漢族(서화족+화산족+여러 종족= 중화족. 중원대륙 천하를 석권한 대청제국 때에 숨을 죽이고 있었던 중화족)에게 넘기고 말았으니 과연 오늘의 중원대륙 역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우리는 현재 중국 지배세력의 전통사를 중화족(화하 지나 한족華夏·支那·漢族) 황제계통의 중국 역사로 둔갑해 보고 있다. 이는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에서 비롯됐다.


 이제는 친일종속 자들의 고집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그 결과 오늘의 동북공정으로 대두하게 되었고 고구려사도 실종위기에 있다. 고조선의 단군역사를 부정하는 무리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우리국민들의 대다수는 잘못된 사관을 갖고 있다. 이는 선조들의 잘못이다. 이재 학자들은 이를 학술대회나 학문 발표로 만 끝일 것이 아니라  학교 교육(검정교과서)을 통해 역사를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

 역사논쟁의 경험

필자는 1994.8월에 만주 길림성 교하시 납법산 吉林省 交河市 納法山<3천년 전의 옥황각玉皇閣(고조선 때 옥황상제 모셨던 곳으로 추정)이 있는 곳. 만주대륙 제일의 영산靈山으로 천하유일의 기단봉棋壇峰(장기 두는 곳)동굴이 72개로 고대 선인들의 수련장소인 계룡산과 같은 곳. 하늘 벽壁과 천제단天祭壇 이 있는 곳> 천제행사에 참석차 일행과 함께 가다가 조선족 버스안내원과 담소 중 중국(中國은=지역 개념으로 地域 對稱代名詞 國中)의 호칭과 우리의 역사유물에 대한 견해차를 시정하였다.

또한 1996년경 대만 박물관 안내원 이씨李氏(조선족)와 박물관 관람시 원 명 청元 明 淸의 역사적 실체와 유물 이름을 구분(중국과 청국 혼동)하지 않고 오늘의 중국 문화유산으로 둔갑하는 잘못된 설명을 지적하고 논쟁 후 설득하여 다음날 유황 온천에서 오히려 자기가 잘못 알았던 것을 알게 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다음부터는 박물관을 찾는 관광객에게 제대로 설명하겠다는 다짐을 받은 바 있었다.

참고(당시 박물관을 찾는 한국인이 년 3만5천여 명 이라했다. 2002년 바이칼호 역사탐방기행중 천제天祭 후 준제焌祭 때  현지무속인 발렌틴샤만은 나의설명을 듣고  그리 알고 있다는 뜻으로 동감하는데, 뜻밖에  타인들은 부정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이는 역사교육의 부재와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현지인 이루크스크 부리야트인과 한 중 몽 러시아 국민들 간의 과거사를 보는 역사의 눈과 인식의 차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역사 관점의 차는 귀중한 자료다. 이 잘못된 후손들이 지금 대륙 동쪽 한반도 남단에 살고 있다. 그것도 분단의 상처를 갖고 서로 트집을 잡고 싸우고만 있다. 저주 받을 난신적자들은 지역감정과 패거리를 짓고 날뛰고 언론은 더욱 부추기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대아大我를 저 버리고 소아小我에 집착 자기집단만 알고 있다. 무리를 지어서.


 중국 패권주의의 방향

 그러하니 중국은 고구려사와 발해사(渤海史)를 그들의 변방사로 편성 사적(史蹟) 수탈에 국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누구를 탓 하랴. 이는 모두 우리의 역사교육 부재에서 온 업보와 결과 이다. 현 중공정권은 56개의 타민족을 중화족화中華族化 하는 동시에 내면으로는 漢族의 민족주의를 꽤하고 신흥패권 제국주의로 발 돋음 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경제 문화 발전과 동시에 민주주의의 발달은 훗날 커다란 공용이 제 몸을 가추지 못하고 쓰러지듯 시류의 따라 변할 것이다. 그들도 다민족국가로서 민주화과정을 통해 현재의 패권주의를 버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며  언제인가는 자유의 물결 속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이행 발전 할 것이다. 이는 인류역사의 필연적인 발전의 귀결이다.


그들도 북방족(北方族)인 청태종을 중화족으로 보지 않는다. 漢族의 구국과 혁명지도자 孫文, ?玉祥 등은 1892년 興中會 1899년 興漢會 등을 구분 결성, 漢族의 중흥重興을 꾀한 혁명세력으로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을 계기로 화남華南(광동성외 16개성)에서 봉기 북진하여 청조淸朝를 타도(漢族은 천년간 북방제국들의 남침과 지배에서 벗어나)중화민국을 수립했다. 예를 들어 우리와 청나라가 형제국으로 4촌이라 하면, 몽고는 6촌, 일본은 고조선 때에는 개척지요 삼국이 멸할 시는 망명지로 8촌쯤이며, 중화족은 (자칭 염황자손炎黃子孫) 10촌쯤 더 올라 갈 듯 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일제가 대륙침략에서 내세운 민족간의 틈새(支那의 개념)를 부추긴 낌새는 무엇이고 대륙진출에 만주(청조의 후신)건국의 진의와  자신감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남방 중화족과 북방 백두산족에 틈새를 보았던 것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지도자들과 공동 대처해야

남방계 혁명세력은 북방계의 청나라를 전복(顚覆) 근대민주주의국가를 건립한 그 중화민주공화국을 일본은 지나(支那)라고 그들의 뿌리를 구분하여 밝혔다. 오늘의 중국은 56개의 민족으로 구성 되여 있다. 이들을 다 중화족 이라한다. 그런데 중국은 현 통치권 안에 있는 여러 민족의 역사를 왜곡, 東北·西北·西南공정 夏·商·周·唐 斷代工程 中華文明探遠工程 등 중국사(中國史)의 복원 정비 이름아래 모든 상고사를 중화족의 역사인 냥 둔갑 조작하고 있다 이재 역사문화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학자들도 멍청하게 그대로 중국이라 호칭한다. 언제인가는 그들 중국 소수민족들은 경제발전과 동시 민도의 수준이 높아지면 민족의 자각으로 자결권을 주장할 때가 올 것이다. 이는 그들의 무리한 고구려사의 수탈에서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우리 사학자들은 몽고를 비롯하여 여러 각 종족들 간에 선각 지도자들을 접촉하여 앞으로 국제문제로서 공동의 관심과 피해에 대해 함께 대처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치우와 황제

 중화족은 국조國祖의 기원에 대하여 역사의식을 회복, 뿌리의 연원淵源인 하우夏禹에서 황제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하고 있다. 하남성 남양시 삼고처 河南省 南陽市 三顧處로 유명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무후사 정문 석각武侯祠 正門 石刻에 “死而後已酬三顧 道自長存貫兩間. 黃帝紀元4690年 세차 임신 길단 시립 歲次 壬申 吉旦 施立”으로 석각 되여 있다. 그 황제헌원黃帝軒轅이 분리 독립 되어 (치우와  황제 간 10년간의 회전會戰) 나라를 세운 년도를 기념이라도 하듯 중화족의 건국기원을 정문에 석각해 놓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1999년 7월7일‘장준하張俊河 장정長征6000리’행사 중 발견한 바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족은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치우천황을 그들 조상의 한분으로 삼조당三祖堂(炎帝 黃帝 蚩尤을 함께 모신 곳)에 같은 조상으로 공동으로 모시고 있다. 그 연유는 저 멀리 환웅천황시대로 거슬러 올라 갈듯하다. 그 당시 당사자들은(지방제후의 아들 황제와 천제인 치우천황과의 대전)사생결단 자웅을 겨뤘지만 오늘의 현명한 한족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동의 조상으로 슬기롭게 모시고 있다. 


 어느 나라던 이웃 국가들은 그 뿌리의 기록을 어디에 두고 명문화 되었던 옳고 그르고 사실여부를 떠나 자기나라 국조에 대해서 따지지 않는다. 하우(夏禹)와 황제기원이나 일본 천황기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강단 실증사학자들은 올챙이 연잎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 모양 역사의 정사를 외면하고 있다. 그렀다면 실증사학자들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위조했는지 그들 나름대로 같은 논법으로 명백히 입증 제시해야 한다. 이제 사학자들은 종속적인 사대주의와 식민지사관을 벗고 좀 더 연구하고 더 많이 배워 시야를 넓혀 역사의식을 회복 왜곡되고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을 때이다.


 어느 나라던 한 민족과 나라의 시조는 신화로 조성되고 구술로 이어져 내려오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 이전의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니까. 사적과 문서의 기록은 없어졌다 할지라도, 인지(人智)의 발달은 고고학적인 발굴이나 천문 지리에서 첨단문명의 발달과 함께 역사의 정사가 밝혀지리라 믿는다.<특히 서울대 천문학교수 박창범 저술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고조선의 오성취루五星聚婁 참고>.

고조선 전후에 저 중원대륙에서의 역사의 명멸(明滅)은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의 史記 二十五史는 황제헌원과 치우천황(蚩尤天皇)간의 10년간에 걸쳐71회의 회전(會戰)이 있었다고 사기(史記)의 기록은 말해주고 있다<한단고기 참고>.이는 중화족 황제가 한웅천황桓雄天皇 치하에서 갈라져 나가는 신농神農이후 분리 독립전쟁으로 볼 수 있다. 그 黃帝紀元으로 올라가 다시 역사의 줄기를 밝혀 내려온다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등)오늘의 韓中간 역사의 맥을 풀어나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고구려와 발해사는 물론 세계사의 틀이 바뀔 것이다. 원래 우리는 배달민족의 종가宗家로서 한인 한웅 단군왕검에 이어 고구려 발해와 더불어 역대 단군의 뿌리이다.


 만주는 백두산족의 활동무대

  소설 단(丹)의 주인공 우학도인(羽鶴道人) 봉우 권태훈 선사(鳳宇 權泰勳 仙師)께 들은 바에 의하면 중화민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 극동의 판도가 어지러워 예측 불가능 할 때 장개석 총통은 김구 주석에게“장성이북비아방(長城以北非我邦)이라”(일본의 패전 이후 양국 간의 전후처리 영토 분활 밀담) 말했다는 설이 있다.

사실여부를 떠나 이는 “만주滿州 (동북 삼동성)일대가 중화족의 터나 나라가 아닌 북방족(백두산족)의 영토란”뜻(포기하겠다는 뜻)이다.漢族은 만주 일대의 역사와 문화유산 등 미련을 포기하도록 사학자들은 좀 더 시야를 넓혀 고조선의 맥락과 그 이전의 상고사의 원뿌리를 찾아 복원, 역사의 정사를 찾아가는 백두산족문화권의 공영과 새로운 인류애와 홍익인간이념을 구현 실천하는 민족사관이 필요할 때이다.

출처 : yoizu
글쓴이 : 김태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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