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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 답사 (1) /김영남

碧空 2014. 8. 3. 11:54

해양과 대륙의 교두보 요동반도

 

2014년 초여름 고구려사(史) 전공 사학자 윤명철 교수와 함께한  전통문화 진흥원의 고구려 유적답사 여행은 요동반도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인천 공항에서 대련은 제주도를 가는 정도로 느끼는 시간 이었지만 시차는 한 시간이 늦다.

발해만 과 황해를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 요동반도, 그 가치는 고구려 때나 현재에도 변하지 않았다.  전쟁은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고 대량 물량을 수송 하려면 바다를 이용해야 한다.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 할 수 있는 곳 그 상륙 지점이 요동반도다. 고구려는 수륙 양면으로 전투를 치룬 것이다. 

 조선을 차지하려는 일본도 발해만에서 중국 해군함정을 기습하면서 부터 청일전쟁(1894년)은 시작 되었다.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로 부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 냈지만 힘들게 차지한 요동일대는 청나라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 영국, 미국, 러시아 3국의 간섭 때문이었다. 분을 삭히면서 벼르던 일본은 10년 후 조선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대립 하다가 연해주 지역을 급습한다.

 러일전쟁(1904년)에서 러시아 보다도 많은 인명 피해가 났고 승전은 했으나 전쟁배상금도 못 받고 요동 반도 일대를 차지한다. 해상과 육상 교통로의 핵심 지역이며 교역의 거점인 이곳은 주인이 여러번 바뀌어 진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나라를 유지하는 주요 자원과 여러 요건을 두루 잘 갖춘 곳이 요동 일대이다.

비사산성 과 장하석성을 둘러 보려고  버스로 이동 하면서 고구려성의 특징 과 요동반도의 가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비사산성은 바다를 건너 요동반도로 침입 해오는 적군을 감시하고 수비하는 중요 거점이다.

 산성 아래에서 미니버스로 바꾸어 타고 해발 660m 산성에 도착했다. 멀리 능선에 성벽 윤곽이 보인다. 이 곳 에서 멀지 않은 남쪽의 장산군도에도 성들이 있는데 성과 성은 적군의 동태를 알리는 상호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지금도 산성 주변 산 정상에는 이 목적의 현대식 국가 주요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중국의 핵 항공모함 기지가 있는 곳도 대련항이다.

비사산성에서 눈 아래 보이는 산등성이들은 시루떡을 옆으로 접어놓은 듯하고 바위 틈새로 나무가 자라고 있다. 모양새로 보아 퇴적암이다. 바다에서 만들어지는 석회암과 퇴적암이 대륙을 움직이는 지각운동으로 밀려 올라온 것이다. 석회암은 물에 잘 녹고 석회석이 많은 지형에는 큰 동굴이 만들어지는데 우리 신화에 동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동반도 일대에 섬이 많고 해안선이 가파른 이유 이기도 하다.

수나라, 당나라, 왜 이들은 요동을 차지하려 했는가? 식량, 에너지자원, 철의 생산과 가공기술이 있는 요동지방은 경제적인 가치가 높았다.

 그들은 바다와 육지로 협공작전을 벌이며 발해만을 건너온다. 보급로가 길어지면 역습을 당하기 쉽고 군사력에 차질이 생긴다. 70년 전쟁을 버틸 수 있었던 저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고구려는 달랐다. 요동반도에서 산성들은 점 조직 이지만 연합할 수 있다. 산성들을 지나쳐 간다면 배후를 역습 당하는 문제가 있다. 산성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해야 하는 소모전이 되고 추운 겨울은 고구려 편이 된다.

 장하석성은 요동 반도 끝에서 압록강 하구로 이어지는 해안선의 중간에 위치한다.  이 성은 서북과 동북의 성들과 연합하여 동남부 바다로 상륙 해 오는 적군을 방어하는 해발 290m 요충지다. 남북으로 산이 마주하고 그 사이에 작은 강과 들녘이 내려다 보인다.

복원 공사로 새롭게 쌓아올린 성벽들이 화려 하지만 옛스러움은 사라졌다.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인 연개수영이 성을 지휘했다는 장하석성에 누각과 비석이 있다. 재를 올리던 천단의 기단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기초는 굽도리 양식과 퇴물림 방식이고 특히 모서리 부분은 위 아랫돌이 접촉하는 부위를 깎아 맞추어 층층이 쌓아놓았다. 돌이 밀려 나지 않는 튼튼한 구조다. 동남쪽 방향으로 성벽 길을 타고 내려갔다. 시야에 들어오는 넓고 푸른 들이 시원해 보인다. 성의 외벽 일부가 무너진 곳에서 삐죽 삐죽 한 돌들이 쌓여 있는데 개의 잇몸을 닮았다 하여 견치석이다.

성벽 외부 돌이 빠져 속살이 나온 것이다. 외벽과 맞물린 바윗돌 간 접착력을 크게 만든 공법이 지혜롭다. 그 정성으로 천년 세월을 버티어 낸 것이다.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압록강을 교통로로  활용하면 내륙으로 진출하기 좋은 곳이며 풍요한 요동 땅이다. 더욱 전략 물자인 철이 나오는데 주변국 들이 욕심 낼 수 밖에 없다.

이곳을 지배하려는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을 가두려고 러시아가 감옥을 처음 만들었다. 청일·노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그 감옥을 더욱 거대한 규모로 만들었다. 그 규모가 서대문 형무소의 몇 배를 능가하는데 건물 형태와 죄수를 고문했던 잔인함은 거의 비슷하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내린 재판소 와 려순감옥의 사형장이 그대로 보존 되어있다. 1907년 2월 24일 사형 언도하고 3월6일 형집행 당할시 32세 였다.

「동양 평화론」은 분쟁지역 려순 일대를 중립지대화 하는 구상으로 서론만을 남긴다. 당시 지식인 으로는 탁월한 국제 감각을 가진 사상가였다.

시신을 나무통 에 접어 넣고 묻은 야산을 발굴했고, 뼈만 통 속에든 유골을 사형장 안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사형수를 다루었다면 안 의사의 시신을 찾을 수 있겠는가? 잔인성에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평소 일본인들의 바른 예절과 친절이 위선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효창공원에 안 의사의 허묘가 있다. 국권이 회복되거든 조국에 묻어 달라는 그 분의 유언은 언제쯤 실행 될 것인가?

대한민국 광복회 에서는 려순 감옥에 별도의 전시장소를 마련해 놓은 곳이 있다. 중국에서 일본과의 전투에 활동한 한국인들을 모신 곳이다 이회영, 신채호, 안중근 그 분들의 흉상이 모셔져 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형제들과 친족을 이끌고 만주에서 사재를 털어 신흥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투쟁에도 나선다. 체포되어 려순 감옥에서 옥사한다.

역사적으로 중국 대륙에 통일정권이 들어서면 그 때 마다 우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한무제 때의 한사군, 수문제, 당태종, 몽골의 침략,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의 식민지, 한국전쟁에서 중공군과의 전투 등이다.

요동반도는 발해만, 황해를 교두보로 하는데 고난의 역사를 가진 땅이며 지금도 그 역사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적지를 이동하는데 옮길 때마다 버스로 보통 3∼4시간이 걸린다. 단동으로 가는 길 들녘은 옥수수밭 뿐, 이동통신용 기지국 철탑들이 가끔 보일 뿐이다.

단동이 가까워지자 만리장성의 시작점이자 동쪽 끝(중국 측 주장)이라는 표시물을 거창하게 만들어 놓았다. 고구려의 박작성을 호산산성 이라며 그렇게 변조 하였다. 성 입구에서 해설을 들었다. 사실 현재의 만리장성 이라는 것은 명나라 때 만들었고 진나라 때의 만리장성은 없어졌다. 결과적으로 명나라는 성을 쌓다가 망한다.

려순감옥 과 격동의 요동반도 고구려 성들을  보며  나라의 국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감회가 깊을 뿐이다.

      

                                                 

 

 

 

 

 

 

려순 감옥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