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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大捷

碧空 2014. 2. 27. 18:23

우리나라 3대 대첩: 살수대첩(을지문덕) 귀주대첩(강감찬) 한산도대첩(이순신) 소설 청야 그리고 고구려

2009/09/2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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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대첩하면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을 떠오른다. 모두 외적에 맞서 우리나라 장수가 대승을 거둔 것을 말한다.

 

대첩이라고 하면 적은 군사로 적의 대군을 물리쳐 승리한 것을 말한다. 그중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이 바로 우리나라 3대 대첩이다.

 

귀주대첩은 얼마전 종영한 천추태후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잠시 소개 됐다. 한산도 대첩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 자세히 설명됐다.

 

불행하게도 살수대첩은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아직까지 조명해보지 않은 전쟁사이다. 아마도 살수대첩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상당한 시청률이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3대 대첩은 다음과 같다.

 

 

113만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

 

살수대첩은 113만 대군을 물리친 그야말로 대첩이다.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의 꿈을 안고 농민군을 탈탈 끌어 모아 113만 대군을 조직했다. 보급부대까지 합하면 약300만 명이 더 넘는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수양제는 요하를 건너 요동성에 이르렀다. 하지만 113만 대군은 요동성에서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요동성주가 누구인지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았지만 요동성주는 113만 대군을 맞아 두 달 넘게 성을 지켰다고 한다.

 

이에 수양제는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전쟁을 바꿀 전략으로 별동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우중문, 우문술 장군으로 이뤄진 30만 5천의 별동대를 조직해 고구려 도성을 침공하게 한 것.

 

여기에는 가장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식량 보급 문제였다.

 

수양제가 요동성 공략에 열과 성을 다한 것은 요동성을 공략해야 식량보급에 차질을 빚지 않으면서 고구려 도성까지 밀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동성을 점령하지 않은 상태에서 별동대가 고구려 도성으로 밀고 간다는 것은 식량보급에 차질을 빚게 되는 것이다.

 

이에 수하 장수들이 반대를 했었다. 수양제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군사들에게 100일치 식량을 짊어지고 고구려 도성으로 가게끔했다.

 

30만5천의 별동대는 찍소리도 못하고 100일치 식량을 짊어지고 고구려 도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짐이 워낙 무거워 밤마다 막사 한쪽에 구덩이를 파서 아무도 모르게 묻기도 했다.

 

이에 장수들은 식량을 묻는 군사들의 목을 베기도 했지만 군사들은 그 식량의 무게 때문에 식량을 몰래 묻었다.

 

결국 수나라 별동대는 압록수에 도달하기 전에 식량이 동나게 된다.

 

이때 을지문덕 장군은 왕의 명을 받들어 적진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게 된다. 거짓항복은 수나라 별동대의 허실을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을지문덕 장군은 압록수에서 수나라 별동대가 식량 보급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후 고구려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후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별동대를 피곤하게 하기 위해 싸울 때마다 번번이 달아났다.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달아났다. 수나라 별동대는 고구려 군대를 쫓아가기 위해 식량을 버리기도 하고 공성무기를 버리기도 하고 방어무기도 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고구려 군대를 쫓아 고구려 도성 30리 거리를 둔 산을 따라 진을 쳤다.

 

이때 을지문덕은 우중문 장군에게 시를 적어 보낸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귀신 같은 꾀는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셈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승의 공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바라오

 

을지문덕은 또한 거짓항복하는 체하면서 군대를 돌린다면 요동성으로 나아가 수양제를 알현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수나라 별동대는 고구려 도성을 공략하기 힘들다 판단해 결국 후퇴를 하게 된다.

 

이때 살수에 이르게 되고 살수 절반을 건넜을 때 을지문덕 장군은 군사를 일으켜 수나라 별동대 후군을 쳐서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이에 적군이 무너져 겉잡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 요수를 건널 때에는 9군이 30만 5000명이었는데 요동으로 후퇴했을 때는 2천700명 뿐이었다.

 

 

군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장수의 명령' '군사의 사기' '진법'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특출난 무예를 가진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적들을 물리치는 것은 현실 전쟁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전쟁에 임할 때 군사들이 장수의 명령을 얼마나 따르느냐, 군사의 사기가 얼마나 높으냐, 진법을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린다.

 

군사전략가들은 상대군사의 진법을 얼마나 무너뜨리냐가 전쟁의 승패를 갈라놓는다고 이야기한다.

 

살수를 건넌다는 것은 진법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수나라 별동대는 고구려 도성을 떠나 살수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군사의 매복을 염려해 방진을 꾸렸다. 방진은 그야말로 수비를 하는데 있어 가장 최적의 진법이다.

 

하지만 살수를 건너면서 방진 대신 장사진을 펼쳐야 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폭이 좁기 때문에 방진 대신 장시진을 펼쳐야 했다.

 

결국 수나라 별동대는 후방에 수나라 별동대를 보호할 수 있는 후방부대를 배치하고 도강을 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후방부대의 사기가 바닥을 쳤다는 것. 이미 배고픔에 상당히 시달린 수나라 별동대다. 더군다나 고구려 도성까지 쳐들어 갈때 을지문덕 장군은 청야전술을 구사했다.

 

청야전술은 들판의 곡식을 치우고 들판을 불태우는 것이다. 수나라 별동대는 먹을 것을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배고픔의 군대는 사기가 없다. 싸울 의지가 없다. 결국 사기가 땅에 떨어진 군대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군대는 백프로 패배를 하게 마련이다.

 

고구려 군사는 수나라 별동대의 후방부대를 타격하게 되고 결국 후방부대인 신세웅 장군을 죽이게 이른다.

 

이렇게 되자 수나라 별동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보호막이 없기 때문이다.

 

혼란에 빠진 군대는 장수의 명령이 먹히지 않게 된다. 결국 수나라 별동대는 살수에서 모두 몰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살수대첩이다.


 

소배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귀주대첩


강감찬의 구명은 은천이다. 그의 5대조 여청(餘淸)은 신라 때부터 시흥군에 와서 살았고, 부친 궁진은 고려 태조를 섬겨 삼한벽상공신이 됐다.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햇고 남달리 지략이 뛰어났으며, 성종 때에 과거에 응시해 갑과 제1인으로 뽑혔다. 그후 관직을 받아 여러 번 승진해 예부시랑까지 올랐다.

 

현종 원년(1010)에 거란의 성종은 스스로 장수가 돼 군을 이끌고 침입해 평양을 공격했다. 고려군이 평양에서 패배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조정의 군신들은 항복을 의논했으나 강감찬만은 이를 반대했다.

 

"오늘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그 책임이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많은 적을 적은 군사로 대적할 수 없으니 우선 그 예봉을 잠시 피했다가 서서히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옳은 일 입니다"

 

강감찬은 현종에게 남쪽의 복주(안동)로 피난할 것은 건의했고, 왕은 이를 받아들여 피난했다.

 

그 다음 강감찬은 사신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한 결과 거란군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물러갔다.

 

현종 9년(1018)에 왕은 강감찬에게 서경수 내사시랑 문하평장사에 임명했다. 이해  12월 거란은 장수 소배압이 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는데, 거란군의 수가 10만 명이었다.

 

 

이때 강감찬은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있었다. 왕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군사 20만8천300명을 거느리고 영주로 진출해 적을 막게 했다.

 

이때 유명한 홍화진 전투가 벌어진다. 그리고 살수대첩이 둑을 터트려 승리를 일궜다고 우리가 혼동하게 만드는 전투가 벌어진다.

 

강감찬은 홍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2천을 산속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의 동쪽에 있는 큰 시냇물을 막아놓고 적을 기다렸다.

 

거란군이 그곳에 이르자 강감찬은 막았던 물꼬를 터놓게 하고 거란군이 급류에 휩쓸려 혼란한 틈을 타서 복병을 출동시켜 거란군을 대파했다.

 

소배압은 주력을 이끌고 서울(개경)로 향했다. 이에 강민첨은 이들을 추격해 자주(자산)의 내구산에서 적을 또 한 번 크게 격파한다.


그 다음 해(1019) 정월에는 거란군이 서울로 공격하려고 했다. 이를 안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으로 하여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밤낮없이 강행군으로 달려가서 왕궁을 호위케 했다.

 

 

거란군은 개경 공략이 여의치 않자 철수해 연주와 위주 일대로 북상했고 강감찬은 철군하는 거란군을 추격해 500여 명을 베어 죽였다.

 

그해 2월 거란군의 주력이 귀주를 통과하게 됐다. 강감찬은 동쪽 벌판에서 이들 거란군을 맞아 싸웠는데 양군이 서로 맞서 쉽사리 승부를 결정할 수 없었다.

 

이때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몰아쳐서 깃발이 북쪽을 가르키자 고려군은 용기백배해 맹공을 퍼부었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적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바로 귀주대첩이다.


 

해전의 교본이 된 한산도 대첩


한산도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일군 대첩으로 후대 사람들이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해 마지 않는 해전이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대첩을 통해 유명세를 타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조선을 침략했고 조선 육군은 패배에 패배를 거듭해 결국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가야 할 상황이었다.

 

이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음력 5월29일 출동해 6월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 승리를 거뒀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근에 호응하면서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뤄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 육군이 조선에서 마음먹은 대로 활동을 하자면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 40여 척과 재3진 가토 기요마사와 합세를 했다.

 

 

일본 수군은 점차 서진하면서 전라도 제해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에 이순신은 음력 7월 6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49척을 거느리고 출진,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과 합세를 했다.

 

음력 7월7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서 정박을 했고, 이때 일본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함대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접했다.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서는 도저히 전투를 할 수 없다 판단해 유인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견내량은 좁고 긴 수로인 반면 한산도 앞바다는 넓은 바다여서 당시 전투하기 딱 알맞은 지형이었다. 게다가 한산도는 무인도라 일본 함대가 대패한 이후 한산도로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 알맞았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먼저 판옥선 13척만 견내량으로 출동을 시켰다. 일본 함대는 소규모 함대를 발견했는데 일본 함대들은 이들을 조선 수군의 모든 함대라 착각하고 전 함대가 그들을 추격했다.

 

 

일본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대기하던 함대와 함께 전 조선 함대가 뱃길을 돌려 학익진을 펼쳤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육전에서 사용하던 전형적인 포위-섬멸전의 형태다. 전 병력이 사방에서 포위하여 일제히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익진을 펼친다는 것은 그만큼 숫자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육군에서 사용하는 학익진을 펼쳤다.

 

그 이유는 일본의 전선과 조선의 판옥선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다. 반면 판옥선은 회전이 쉬웠다.

 

화포를 쏠 때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

 

다음은 한효순이 쓴 신기비결에서 나온 총통 사격 순서다.

 

① 세총 (洗銃)- 총통 안을 쓸고 씻는다.
② 입약선 (入藥線) -약선혈(점화구멍) 안으로 점화선을 넣는다.
③ 하화약 (下火藥) -총구로 화약을 넣는다.
④ 하복지 (下覆紙)- 총구로 종이를 넣어 화약을 덮는다.
⑤ 하송자경 (下送子輕) -화약 다지는 나무자루(송자)로 화약과 종이를 가볍게 쳐서 다진다.
⑥ 하목마 (下木馬) - 총구로 격목(목마)을 넣는다.
⑦ 하송자 용력타 지약전 (下送子 用力打 至藥前) -나무자루로 힘껏쳐서 격목을 화약 바로 앞까지 밀어 넣는다.
⑧ 하연자일층 하토 하송자 (下鉛子一層 下土 下送子)- 총구로 납탄환(연자) 30여발을 넣고, 흙을 넣는다.
⑨ 하연자일층 하토 하송자 (반복)
⑩ 하연자일층 하토 하송자 (반복)
⑪ 하합구대연자 일장 하송자 용력타입구평총 (下合口大鉛子 一杖 下送子 用力打入口平銃) - 마지막으로 총구에 맞는 큰 탄환(대연자)을 넣는다. 힘으로 쳐서 총구에 평평하게 넣는다. 이 단계까지가 사격 준비단계이다.

약선(藥線)에 불을 붙이면 약선혈(藥線穴:점화구멍)을 통해 불이 타 들어가 화약이 폭발한다.

 

이렇게 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일본 전선이 화력은 약해도 조총이라는 무기를 갖고 근접전에서는 단연 우세했다. 따라서 일본 전선은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서 화포를 쏘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근접해서 타격을 입히면 승리할 수 있었다.

 

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학익진 전법이다. 학익진 전법을 펼치고 난 후 이순신 장군은 화력을 일본 함대에 집중을 시켰다. 화력을 집중 시킨 이후 화포를 다시 장전해야 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배를 360도 돌리게 했다. 반대편에서는 이미 화포에 장전이 돼있었던 것.

 

판옥선의 장점은 그 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 전선은 360도 회전이 불가능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점을 백분 활용했다.

 

360도 회전이 가능하다는 것은 화포에 장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짧은 시간에 일본 전선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56척의 함선을 갖고 70척의 배를 상대해 66척을 격침시켰고, 86급의 목을 베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전략과 함께 당시 고도로 발달된 판옥선과 총통의 기술 때문이다.

 

판옥선이 360도 회전이 불가능했다면 아마도 한산도 대첩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총통의 화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한산도 대첩이 없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이순신 장군을 만나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두가지를 바탕으로 지형과 해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적정에 대한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가장 적절한 전략을 수립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순신은 명장이고, 전략가인 것이다. 학익진을 펼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익진을 펼치기까지 과정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산도 대첩의 가장 큰 의미는 일본군의 수륙 병진 작전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고 또한 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하였음을 들 수 있다. 한산도 대첩은 결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정벌의 야욕을 꺾어버린 해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