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건국과 단군
김 성 환(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관)
1. 고조선(古朝鮮)과 그 인식
2. 고조선 건국신화의 버전(Version)
- 단군의 출생 모티브를 중심으로-
3. 단군의 전승유적
4. 단군묘(檀君墓)와 단군릉(檀君陵)
1. 고조선(古朝鮮)과 그 인식
고조선에 대한 이해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출현 이후 정리된 고려 후기의 인식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그 핵심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三朝鮮) 인식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고조선[왕검조선]․위만조선(魏滿朝鮮), 《제왕운기》의 전조선․후조선․위만조선(衛滿朝鮮)의 인식론을 구체화한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고조선’은 1392년 건국한 조선에 앞선 ‘조선’이란 의미로 삼조선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의 ‘고조선’은 위만조선에 앞선 ‘조선’이란 의미로, 조선 초기의 그것과는 인식체계가 다르다. 따라서 고조선에 대한 조선 초기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제왕운기》의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 전조선을 단군조선으로, 후조선을 기자조선으로 대체하여 역사적 위상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결과였다고 보인다. 삼조선 인식은 이후 한국사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물론 이후 여러 양상의 인식론이 나타나고, 단군조선에 대한 이해의 확장으로 단군의 고조선 건국만을 고조선의 범주로 이해하고자하는 경향도 보인다.
이미 고려 후기부터 단군에서 출발하는 고조선[전조선]은 자국사의 출발로 인식되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해당 항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단군기(壇君記)》나 《단군본기(檀君本紀)》의 명칭이나 하백녀와 부루로 설정된 가족과 계승 관계, 우임금의 도산(塗山) 조회에 단군의 아들 부루의 참석에 관한 전승에서 이미 일찍부터 역사인식론의 측면에서 고조선의 이해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동방의 역사가 중국 요임금 무진년에 출발하여 기자가 이를 계승하였다고 수차례 밝히고 있으면서도, 그 출발을 단군으로 확정하는데 주저하면서 ‘조선씨(朝鮮氏)’를 고집하고 있기도 하다.
고조선의 향국(享國)은 어떠했을까? 《삼국유사》에서는 어국(御國) 1,500년과 수(壽) 1,908세로 기록하고 있으며, 《제왕운기》에 인용된 《본기》에는 향국 1,038년, 《제왕운기》에는 1,028년으로 되어 있다. 고려 후기의 인물인 조연수(趙延壽)의 묘지명(墓誌銘)에는 평양 지역에서 삼한을 거쳐 천여년을 지속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단군부터의 역년(歷年) 설정은 구체화되어 이승휴는 이미 《제왕운기》에서 단군 원년 무진부터 왕건이 ‘삼한일통’을 이룬 태조 18년(918)까지를 3,288년으로 이해하였고, 전조선 이후 여러 나라가 모두 단군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론의 체계화를 이루었다. 또 백문보(白文寶)는 1363년(공민왕 12) 흥왕사의 난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그 대처 방안을 제시하면서 주기설(周期說)을 토대로 단군에서 이때까지의 역년을 3,600년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상소를 올린 때의 역년을 이승휴의 이해 방식으로 적용하면, 3,717년이다. 120여년의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또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고기》를 인용하여 제시한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과도 80여년의 차이를 보인다. 백문보가 제시한 단군 역년은 일연이나 이승휴, 그리고 《고기》의 이해와도 다른 것이었다.
2. 고조선 건국신화의 버전(Version)
- 단군의 출생 모티브를 중심으로-
《위서(魏書)》
이천년전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었다.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이름하니 고(高)[요 (堯)]와 같은 때이다(《삼국유사》권1, 기이2, 고조선[왕검조선]).
1) 《고기(古記)》
환인(桓因) 제석(帝釋)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인간세상을 탐내어 구함에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함으로 천 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내려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웅(雄)이 무리 3천을 거 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고 하였고, 이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하였다.
환웅천왕(桓雄天王)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등을 거느리고 곡식․목숨․질병․ 형벌․선악 등을 주관하며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들을 관장하면서 세상을 다스려 교 화하였다.
같은 굴에서 살고 있던 한 마리의 곰과 호랑이가 항상 신웅(神雄)에게 사람 되기를 빌 자 신(神)은 신령한 쑥 한 단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이를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 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이 될 것이라 하여 삼칠일(三七日)을 기(忌)한 곰은 여자의 몸 을 얻었으나, 그렇지 못한 호랑이는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혼인할 상대가 없던 곰 여인이 매양 신단수([神]壇樹)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빌자 신웅([神]雄)은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이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 (壇君王儉)이라고 하였다.
당(唐) 고(高[堯]) 즉위 50년인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칭하였으며, 후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이도(移都)하였는 데, 어국(御國)하기를 1500년이었다.
주(周) 호왕(虎[武]王) 즉위년인 기묘년(己卯年)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 (封)하니 단군(壇君_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후에 다시 몰래 아사달산(阿斯 達山)으로 돌아와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나이는 1908세였다(《삼국유사》권1, 기이 2, 고조선[왕검조선]).
2) 《본기(本紀)》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 웅(雄)에게 삼위태백(三危太白)으로 내려가 크 게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이에 웅(雄)은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 고 귀신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 를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 하였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신(檀樹神)과 더불 어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조선(朝鮮)의 강역(彊域)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음으로 시라(尸羅)․고례(高禮)․남북옥 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扶餘)․예(穢)와 맥(貊)은 모두 단군의 후손[檀君之壽]이 다.
다스린 연수가 1038년이고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으니 죽지 않 은 때문이다(《제왕운기》권하, 동국군왕개국연대, 〈전조선기(前朝鮮紀)〉).
3) 《응제시(應製詩)》
옛날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왔다.
국인(國人)들이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이때는 요(堯)의 원년인 무진년(戊辰年)이다(《양촌집》권1, 〈응제시(應製詩)〉).
4)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옛날 천신(天神) 환인(桓因)이 서자 웅(雄)에게 명하여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지니고 무리 삼천을 거느려 태백산(太伯山)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를 신시(神 市)라고 하는데, 여기서 인간의 360여가지 일들을 주관하였다.
이때 한 마리의 곰이 항상 신(神)에게 기원하며 사람의 몸이 되기를 바람에 신(神)은 영등(靈藤)을 주면서 먹게 하니 곰이 이를 먹고 여자의 몸이 되었다.
신인(神因)이 잠시 변하여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 사람이 단군(檀君)으로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단군(檀君)이 비서갑(非西岬) 하백지녀(河伯之女)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 婁)였고, 우(禹)가 도산(塗山)에서 조회(朝會)할 때 부루를 보내 조회하였으며 후에 부루는 북부여(北扶餘)의 왕이 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54, 영변대도호부, 〈고적(古蹟)〉).
5) 《제대조기(第代朝記)》
환인(桓仁)의 아들 환웅(桓熊)이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다.
환웅(桓熊)이 어느 날 백호(白虎)와 교통(交通)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 사람이 단군 (檀君)으로 우리 동방에서 나라를 세운 군장(君長)이다.
요(堯)와 같은 해에 나라를 세웠다(《설암잡저(雪巖雜著)》권1, 시문, 〈묘향산지(妙 香山誌)〉).
… The first ray which pierces the darkness of Korean antiquity is the legend of the Tan Gun. A bear was transformed into a woman who, being pregnant by a divine being, brought forth a child who in later years was found seated under a tree, on Ta Pak San(The present Ta Pak San is in the province of Kiung Sang but the old one was in Pyung An province and is now called Hyang San), by the people of the nine wild tribes then inhabiting northern Korea. These nine tribes were Kyon-i, U-i, Pang-i, Hyun-i, Pak-i, Hoang-i, Chok-i, P'ung-i, Yang-i. There is nothing to show that these wild tribes differed in any essential respect from the other northern tribes. They were presumably a branch of the great Turanian family which spread over northern Asia, eastward to the Pacific and westward as far as Lapland if not further. …(H.B. Hulbert, 1895.6, THE ORIGIN OF THE KOREAN PEOPLE, THE KOREAN REPOSITORY)
In B.C. 2332 a spirit being a ligthed under a sandal-wood tree on Tabak mountain, Yung-pyun, P'yung-an province. The people of the country gathered round, made him their chief, and proclaimed him Tan-goon, king of Chosun. He built his capital at P'ing-yang in the 25th. year of the Yo Emperor of China, again he built another capital at Pag-ak mountain, and in the year B.C. 1324 he ascended into heaven from the Adal hills, Kang-dong District.
Notwithstanding his miraculous ascension, he has had several graves built to him. one is in Choong-hwa and was repaired as late as 1890 by the governor of P'yung-an Province. There twice every year the nation offers a sacrifice of raw meat and uncooked food to Old Sandalwood, (Tangoon) and prayers for the occasion are printed and set from Seoul by the Minister of Ceremonies.(Jas.S. Gale, 1895.8, KOREAN HISTORY-Translations from the Tong-gook T'ong-gam-, THE KOREAN REPOSITORY)
단군전승은 단군의 출생을 중심으로 《고기》․《본기》․《응제시》․《동국여지승람》․《제대조기》 등 대략 5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 《고기》․《본기》 유형은 고려시대의 전승으로, 《응제시》․《동국여지승람》․《제대조기》 유형은 조선시대의 전승으로 보인다. 또 고려시대에는 《고기》와 《본기》 유형을 중심으로 전승이 전해졌고, 《응제시》와 《동국여지승람》 유형은 조선 초기 성리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전승의 합리적인 이해를 전승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또 《제대조기》 유형은 선가(仙家) 계통의 전승으로 짐작된다.
이들 전승은 또 각 유형의 전승이 독립적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유형의 개별적 내용들이 섞여서 전해졌고, 시대를 거듭하면서 사회적 여건이나 개인적 입장에 따라 새로운 내용들이 가필되거나 불필요한 내용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승의 주류는 고려시대에는 《고기》와 《본기》 유형에, 조선시대에는 《응제시》 유형에 있었다. 또 조선시대의 경우 《응제시》 유형이라고 할지라도 《고기》 유형을 함께 부기하여 유형에 있어서는 《응제시》 유형을 인식하면서도 내용에 있어서는 《고기》 유형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단군전승을 싣고 있는 최고(最古)의 자료로서 《삼국유사》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3. 단군의 전승유적
1) 묘향산(妙香山) - 단군의 탄생지
단군대(檀君臺), 단군암(檀君菴), 단군굴(檀君窟, 登天窟), 돈오동(頓悟洞), 강무대(講 武臺), 천주석(天柱石), 후장암(帿杖巖), 삼성암(三聖菴), 호대(虎臺) 등
2) 평양(平壤) - 단군의 도읍지
평양묘(平壤廟), 평양사(平壤祠), 평양신사(平壤神祠), 단군사(檀君祠), 숭령전(崇靈 殿) 등
3) 구월산(九月山) - 단군의 천도지(遷都地), 산신지(山神地)
구월산, 백운대(白雲臺), 단군대(檀君臺), 사궁석(射弓石), 사황봉(思皇峰), 단군 발자 국, 아사봉(阿斯峰), 장재이벌, 삼성대(三聖臺) 등
4) 마리산(摩利山) - 단군의 치국지(治國地)
참성단(塹城壇), 삼랑성(三郞城), 마리산성지(摩利山城址), 천재암지(天齋菴址), 흥왕이 궁지(興王離宮址), 삼랑성가궐지(三郞城假闕址), 왕거밋골 등
단군신화의 근원지로 알려져 있는 묘향산에서는 이미 고려시대 이전부터 환웅(檀雄) 혹은 단군을 산령(山靈)으로 하는 전승이 전해오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확인할 수 없지만, 거란 등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한 북계(北界) 지역의 대응, 조정에 이반하고 있는 지역민의 동향 등에서 이 지역의 신사(神祠)가 기원의 대상으로 적극 이용되고 있음은 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곳의 전승은 대략 《응제시》 유형의 전승이 형성․유포되던 때와 같은 시기에 이르러 환웅(檀雄)과 웅녀, 단웅천왕의 손녀, 단수신 등이 배제되고 그 내용이 단군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따라서 환웅(단웅)의 강림지(降臨地)와 단군의 탄생지 등과 관련된 유적은 단군이 강림지 혹은 치국지(治國地)․초거지(初居地) 등으로 바뀌어 전해졌다. 또 이곳의 전승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불교와 융합되어 전해져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환웅이 신시(神市)에서 관여했던 인간사 360여 가지와 거의 같은 수의 사찰이 이 산에 있었다는 것과 단군이나 삼성(三聖)을 모신 단군암(檀君菴)․삼성암(三聖菴)이 조선후기까지 전해지고 있음은 그런 사실을 반영한다. 불교에 윤색된 형태로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평양에서 단군전승은 고구려를 비롯한 제반 전승과 착종되어 전하고 있다. 이것은 고조선의 영역과 주민의 대부분을 계승한 고구려의 신앙체계에 그 전승이 융합되어 전해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전승의 착종은 고려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고려도경》에 이적(夷狄)의 군장(君長) 명칭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가한(可汗)을 단군과 같은 존재로 짐작하였고, 《고려사》에 보이는 서경신․평양신의 존재 역시 이곳의 지역신(地域神)으로 단군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평양묘(平壤廟)에서 단군은 지역의 신격(神格)으로 좌정하면서 기복(祈福)을 위해 숭배되었고, 기능면에서는 이민족에 대한 병첩(兵捷)․국왕의 장도에 대한 기원․기우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 묘청(妙淸)이 봉안한 팔성(八聖)중 하나인 구려평양선인(駒驪平壤仙人)의 존재로 볼 때, 그 전승은 산신신앙과도 융합되어 전하고 있었다. 한편 《고려사》의 기록에서 전기부터 평양묘(平壤廟)에 모셔진 신격의 명칭이 신(神)→묘(廟)→군(君)으로 변화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그 명칭이 평양군(平壤君)으로 정리되는 시점이 《삼국유사》․《제왕운기》의 편찬, 평양에서의 단군을 삼한(三韓)에 앞선 존재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고려후기와 일치하고 있어 전기의 신적(神的)인 존재로서 이해가 후기에 이르러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월산 역시 많은 단군 유적과 전승을 가지고 있어 지역민에게 신산(神山)․영산(靈山)으로 모셔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중 삼성사(三聖祠)는 단연 전승의 중심지로 숭배되고 영험처로 인식되었다. 《삼성당사적(三聖堂事跡)》과 《관서승람(關西勝覽)》에 의하면, 삼성사는 패엽사(貝葉寺)가 건립되기 이전인 신라 말 이미 대증산(大甑山)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사세(寺勢)의 확장으로 두 차례의 이건을 거쳐 1006년(목종 9) 이전에는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삼성사에 대한 지역민의 숭배 정도와 이곳의 전승이 불교와 융합․갈등 관계를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삼성사의 기능중 기우(祈雨)․기청(祈晴)은 단연 우세하였고, 부정기적이었지만 국가의 기우처로도 이용되었다. 그 밖에 염병의 퇴치․압병(壓兵) 등의 기능도 수행하였으며, 그 전승은 산신신앙으로 대표되는 토착신앙은 물론 도교와도 융합되어 전해졌다.
강화의 단군 유적과 전승은 단군이 직접 제천했다는 참성단과 그가 세 아들로 하여금 쌓게 했다는 삼랑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이후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시기에서는 고종 말․원종 초에, 목적에서는 국조(國祚)의 연기(延基)와 비보(裨補)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이전부터 민간에서 지역민에게 기우․압병 등을 위해 숭배되던 전승이 조정에 의해 주목되었던 시기가 바로 그 때였으며, 그 목적도 공동체의 안녕에서 국가적인 것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 치제(致祭)를 위해 제전(祭田)을 두는 한편, 재궁(齋宮)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원종 때 참성단에서의 초제(醮祭) 설행배경을 ‘삼한변위진단(三韓變爲震旦)’에서 찾고 있는 백승현(白勝賢)의 주청은 주목된다. 그의 주청은 고려 건국의 역사적 명분이었던 ‘일통삼한(一統三韓)’이라는 역사인식의 한계로 각 지역에서 일어났던 삼국부흥운동 등의 분립적인 요소를 해소하기 위한 역사변전의식(歷史變轉意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또 그 논의가 있은 지 20여년 후 고조선을 고려 역사의 출발로 설정하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간행되는 배경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4. 단군묘(檀君墓)와 단군릉(檀君陵)
1) 큰 무덤이 현(縣)의 북쪽 20리 떨어진 도마산(都磨山)에 있는데 둘레가 410척(尺) 이다[언전(諺傳)에 황제묘(皇帝墓)라고 한다](《세종실록》권154,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 강동현).
2) 큰 무덤[하나는 현(縣)의 서쪽 3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둘레가 410척(尺)으로 언전(諺傳) 에 단군묘(檀君墓)라고 한다. 하나는 현(縣)의 북쪽 30리 떨어진 도마산(刀亇山)에 있는데 언전에 옛날 황제묘(皇帝墓)라고 한다](《동국여지승람》권55, 강동현, 〈고적〉).
3) 황제묘(皇帝墓)[현북(縣北) 35리인 전포리(錢浦里)에 있다. 주위 607척 4촌이고, 높 이 126척으로 수도(隧道)와 정자각(丁字閣)의 유지(遺址)가 완연하다. 지금 묘의 남 쪽에 있는 오애굴(烏崖窟) 안에는 ‘종남산하한왕천지(終南山下漢王天地)’라는 8자 가 있는데, 고인(古人)의 시에 이르기를 “편토지금명한대(片土至今名漢垈) 연희삼월 장동천(延熙三月葬東川)”이라 했다. 삼가 한사(漢史)와 동사(東史)를 살펴보니 동천 (東川)은 고구려왕이고 연희(延熙)는 촉한(蜀漢) 후주(後主)의 연호이다. 동천의 장 례가 연희 10년 정묘에 있었으니 이를 동천왕묘로 추측해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관서읍지》(1895) 제10책, 개국504년3월 일 평안도강동현읍지(平安道江東縣邑 誌), 〈고적(古跡)〉).
4) 단군의 성은 환씨(桓氏)이고 이름은 왕검(王儉)이다.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君長)이 없 었는데[上聲] 신인(神人)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있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 산(太伯山)[평안도 영변부(寧邊府)에 있다. 지금의 묘향산(妙香山)]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를 신시(神市)라고 하였는데, 세상을 이롭게 하였다. 아들을 낳았는데 그 명칭을 단군(檀君)이라 했으며 요임금 무진년[요임금 25년]에 즉위하여 비로소 조선 이라 하였다. 도읍을 평양[지금의 평양부]으로 하였다가 백악(白嶽)[지금의 문화현(文 化縣)]으로 도읍을 옮겼다.
비서갑(非西岬)[音은 甲] 하백(河伯)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정사년[夏나라 禹王 원년] 우왕이 남쪽지방을 순수(巡狩)하며 제후를 도산(塗山)에서 조 회(朝會)하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해도(海島)에 참성단(塹城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였고, 세 아들에게 명하여 성(城)을 쌓 게 하였다[지금 모두 강화부(江華府)에 있다].
죽음에 송양(松壤)[지금의 강동현(江東縣)]에 장례하였다. 후사(後嗣)가 기자(箕子)의 내봉 (來封)을 피하여 장당경(藏唐京)[문화현에 있다]으로 도읍을 옮겼다. 전세(傳世) 무릇 1500년이다(《표제음주동국사략》권1, 〈전조선〉).
5) 우안(又按) 강동현(江東縣) 대박산(大朴山)에 단군릉(檀君陵)이 유(有)하다 하니, 차 (此)는 우(又) 하설야(何說也)오. 왈(曰) 순(舜)이 묘족(苗族)을 정(征)하다가 창오 (蒼梧)에서 붕(崩)하였으며, 아력산대(亞力山大)가 파사(波斯)를 토(討)하다가 중도 (中道)에 조(殂)하였으니, 상고(上古) 초출(初出)한 성인(聖人)이 허다(許多) 각족 (各族)을 정복(征服)하여, 아가자손(我家子孫) 만세(萬世)의 기업(基業)을 정(定)코 자 하는자(者)ㅣ, 일일(一日)이라도 영처(寧處)하면 기공(其功)이 진타(盡墮)하리니, 의(意)컨대 강동(江東)의 단군릉(檀君陵)은 원정(遠征)의 거가(車駕)가 차(此)에 지 (至)하여 붕조(崩殂)하신 고(故)로, 차(此)에 수장(遂葬)함인가 하노라(《독사신론 (讀史新論)》 [단군시대(檀君時代)]).
아사달산신으로서 단군이 신인(神人)이었던 그의 최후를 설명하는데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단군의 Key Word는 고조선 건국이라는 건국시조로서의 역사적 위상에 있기 때문이다. 아사달산신에서는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위상이 상당히 탈락되어 있다. 고조선 건국시조로서 당연히 시조릉(始祖陵)이 있어야 했고, 아울러 그를 봉안한 시조묘(始祖廟)도 있어야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예를 볼 때 그렇다. 시조릉과 시조묘는 내적으로는 조상숭배의식이었고, 외적으로는 왕실의 신성함을 천명하는 기능을 하였다. 정례적인 의식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다져나갈 수 있었다. 삼국에서 매년 시조묘와 시조릉에 치제하고 있음은 이를 의미한다.
고조선 시조로서의 단군에 대한 최후인 아사달산신에서는 삼국시대 시조묘(始祖廟)에 대한 인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역사성의 부재와 관련한 것으로, 고조선과 단군은 그 멸망 이후 수 천 년을 지내오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러면서 그의 최후는 아사달산신으로 더욱 고정되었고, 이것 이외의 다른 전승은 전혀 인식하지도 못했고, 수용하지도 않으려 했다.
단군의 최후인 아사달산신과 단군묘 전승만을 염두에 둔다면, 아사달산신은 고조선 건국시조로서의 신격에 해당되어 그를 모신 사당인 시조묘(始祖廟), 단군묘(檀君墓)는 시조의 시신을 묻었거나 그렇다고 믿어지는 곳으로 시조릉과 비교될 수 있다. 즉 삼국의 시조묘와 시조릉의 관계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고조선의 아사달산신과 단군묘는 삼국의 시조묘?시조릉의 관계와는 다르다. 이들은 상충관계이지 보완관계는 아니다. 각기 독립된 개별 전승이다. 산신으로 돌아간 아사달산과 무덤이 있는 평양은 같은 장소로 여겨지지 않는다. 산신이 되었다는 아사달산은 두 번째 도읍지로 전승되는 구월산으로, 무덤이 있는 곳은 첫 번째 도읍지로 기록된 평양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도지인 평양에서 죽은 후 천도지인 구월산에서 산신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또는 첫도읍지인 평양에 무덤을 조성하고, 후에 아사달로 천도하여 시조묘를 그곳으로 옮김에 따라 아사달산신으로 좌정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합리적이지 못하다. 단군묘 전승이 아사달산신 전승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단군의 최후에 대한 두 가지 전승은 같은 시기에 형성되지 않았다. 고조선이 망한 후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아산달산신으로의 최후라는 전승이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묘향산이나 평양에서 단군의 최후와 관련한 전승이 직접 확인되지 않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고조선과 관련한 역사성이 거의 사라졌지만, 아사달산신으로서 단군은 이미 고려전기부터 사전(祀典)에 포함되어 국가에서 관장하는 제사 대상이 되었고, 구월산대왕으로 봉작되기도 했다. 기우, 전염병 퇴치 등 지역사회의 안녕을 위해 하늘신과 인간세상을 매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존재로서 단군의 모습은 고조선 멸망 이후 일부 계층에 의해 전해져 왔고, 고려전기 이전 그들은 그 인식의 폭을 보다 확장한다. 고조선 시조 단군의 통치, 후계 등과 관련한 전승들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그 전승들은 《고기》・《본기》・《단군기》・《단군본기》・《단군고기》 등의 자료에 채록되어 후일 《삼국유사》・《제왕운기》・《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기록될 수 있었다.
《단군기》와 《단군본기》에서는 단군과 부루(夫婁)를 혈연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모계로는 서하(西河) 또는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이 등장한다. 그녀는 천제 또는 천제의 아들이자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解慕漱)와의 사이에서 고구려 시조인 동명(東明)을 출생하기도 했다. 부루는 해모수의 아들로 전해지기도 했다. 고조선・북부여・동부여・고구려의 건국전승들이 얽혀 착종되어 있다. 단군과 해모수는 동일한 존재로 이해되기도 했고, 다른 존재로 파악되기도 했다. 결국 단군(해모수), 또는 해모수→부루・동명으로 이어지는 혈연관계를 형성함으로서 우리 역사의 체계를 혈족 중심의 한 체계로 정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런 관계는 고려시대 선가(仙家) 혹은 도참사상을 신봉하는 집단 중에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일부 계층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그들은 《단군기》와 《단군본기》 등을 저술하면서 이런 전승들을 채집하거나, 혹은 앞선 시기에 저술된 다른 자료의 내용을 인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같은 혈연적 연계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시공간적으로 확대시켰다.
단군묘 전승 역시 단군에 대한 이런 인식의 측면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단군은 평양에서 선인 왕검으로 불리며 그곳에서 삼한 이전에 천여 년 이상을 장수하였다. 그런 그는 고구려에서 가한신(可汗神)으로 섬겨졌을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계층에서나마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진전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무덤에 대해 관심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고려 숙종 때 기자묘(箕子墓)에 대한 탐방의 분위기도 일조했을 것이다. 표현 자체에서는 역사성이 탈락되었다고 할지라도 삼한 이전에 천 여 년 이상을 평양에 연고를 둔 존재라면, 묘의 존재 역시 관심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선인(仙人)’의 존재 역시 ‘신인(神人)’과 크게 다른 관념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고조선 건국시조로서 단군의 무덤을 탐방한다면, 일순위로 꼽을 수 있는 곳은 평양이었다. 그곳은 고조선의 첫도읍지였기 때문에 시조의 무덤은 아사달산보다 평양 주변에 있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삼국의 시조릉이 모두 그 첫도읍지에 있다는 인식이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주도집단은 아무래도 선가 혹은 도참 계열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단군기》와 《단군본기》 등에서 단군의 후계를 체계화하며 역사성의 재창출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군 혹은 그 선계(先系)로서 환인, 환웅부터 자신들까지의 계통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보다 정리되면서 단군의 최후를 더욱 역사적인 측면으로 접근하도록 했고, 그것이 단군묘 전승으로 귀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시기는 《단군기》와 《단군본기》 등이 저술되던 전후, 또는 기자묘 전승의 형성과 비슷한 때로 추측할 수 있다.
단군묘가 문헌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455년 편찬된 《평안도지리지(平安道地理志)》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단군묘와 관련한 최고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이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할 때, 단군묘 기록 역시 《팔도지리지》의 그것을 그대로 수용했을 것은 분명하다. 《팔도지리지》는 각 도에서 편찬되어 올려진 지리지를 대상으로 수찬되었는데, 《평안도지리지》는 이를 위해 평안도에서 올린 자료였다. 물론 이 역시 각 군현에서 올린 읍지류를 토대로 작성되었을 것이다. 특히 《팔도지리지》의 편찬을 주도한 양성지(梁誠之)가 조선 역사의 시원으로 단군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중국과는 달리 고조선에서 출발하는 독자적인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팔도지리지》에 단군묘가 강동의 고적으로 소개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는 1456년 3월 전대 군상(君相)의 제사와 전대 능묘의 수호 등을 포함하여 시정의 전반에 대한 건의인 「편의 24사」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전대 능묘의 수호와 관련하여 전조선왕(前朝鮮王)의 능침이 거론되고 있다. 그가 《평안도지리지》 등을 통해 단군묘에 대한 정보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조 역시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역사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즉위 이듬해에 단군사(檀君祠)의 수치를 명하고, 신주를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로 고치고 제의에 관한 성복(盛服)도 마련한다. 그 위패가 ‘조선시조(朝鮮始祖)’를 표제하고 있음은 단군이 역사적으로 후조선의 기자를 아우르는 인식의 결과였다. 여기에는 새로운 통치체제의 구축이라는 세조의 집권 의지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몇 차례의 시도 끝에 평양 순행을 단행하고, 단군전(檀君殿)에서 친제(親祭)를 거행한다. 조선시대 역대시조묘에 대한 국왕의 유일한 친제였다. 이것은 역사 시원인 단군에게 자신의 집권을 고함으로서 정통성과 합법성을 표명한 것이자 고조선・고구려의 영토에 대한 수복의지를 표명이었다. 또 자신의 욕위(褥位)를 단군과 동명왕 위패의 가운데 설치함으로서 자신의 왕위계승을 국조인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을 계승했다는 것으로 승인받고, 이를 의식을 통해 대내외에 선포하려는 목적성이 게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는 평양 순행에서 3일 정도 순안현을 비롯한 인근 군현을 행차하고 있다. 이때 강동현이 그 대상에 포함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만일 그렇지 못했더라도 단군묘에 대한 보다 풍부한 전승을 지역민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가능성은 높다. 그에 앞서 그는 양성지를 통해 단군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의 단군묘 인식에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이를 그대로 역사적 측면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세조의 단군전 친제는 단군묘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넓혀 단군묘가 《팔도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의 강동현 고적에 실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강동현에 있던 2기의 대총인 단군묘와 황제묘(皇帝墓)는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역사성이 확실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강동민들은 이들을 지역의 역사와 문화성과 관련하여 해석을 도모했고, 그 결과가 황제묘와 단군묘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황제묘가 단군묘・위만묘(衛滿墓)・한왕묘(漢王墓)・고구려왕릉・동천왕릉(東川王陵) 등 역대 국가들과의 연결이 모색되거나, 구체적인 역사 인물과 결부되어 해석되고 있음은 이런 측면에서 유효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단군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그것 역시 단군과 관련한 유력한 전승으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다양한 전승을 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군과 관련한 역사인식이 확고해지면서 다양한 전승들은 탈락하고 단군과 관련한 고적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후기 동천왕릉을 강동의 황제묘 또는 평양의 시록(柴麓)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고구려에서 평양과 유서 깊은 인물 중 동천왕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의 선인 왕검과 관련한 기록은 이런 점에서 평양과 단군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여기서의 평양이 현재의 평양과 일치해야 한다는 전제를 염두에 둔다면, 《삼국유사》에서 평양성을 ‘지금의 서경(西京)’이라고 밝히고 있는 《고기》의 기록은 주목된다. 이를 《고기》 본래의 세주로 인정할 수 있다면, 단군묘 전승의 상한 역시 《고기》가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는 고려전기로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김성환, 2002, 『高麗時代의 檀君傳承과 認識』, 경인문화사
김성환, 2009, 『朝鮮時代 檀君墓 인식』, 경인문화사
김성환, 2009, 『日帝强占期 檀君陵修築運動』,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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