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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과 정유재란

碧空 2013. 11. 17. 22:39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벌어진 조선과 일본의 두 번에 걸친 전쟁을 일컫는다. 임진년에 생겨난 난리라 하여 임진왜란이라 하며, ‘7년 전쟁’ 이라고도 부른다. 1597년 일본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정유재란(丁酉再亂)’ 이라고도 한다. 이 전쟁은 전범국인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 · 게이초[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 이라고 한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명나라를 치기위해 길을 빌린다는 명분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의 서양세계에서 도입한 근대식 무기 조총을 앞세워 조선의 전국토를 유린하였다. 개전초기부터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으로 인해 보급로가 단절되었고 정복야욕이 꺾인 풍신수길이 전쟁패배의 쇼크로 사망함으로서 기나긴 전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조선왕조가 지킨 외교정책의 기본 노선은 명(明)과 사대(事大)관계를 유지하며, 일본 · 여진 등과는 교린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고려말에 극성을 부리던 왜구의 침입은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태종 이방원과 세종 이도에 이르러 진정 기미를 보였으나 중종 17년과 18년에 다시 기승을 부리더니 39년(1544)의 사량왜변(蛇梁倭變), 명종 10년(1555)의 을묘왜변(乙卯倭變) 등 대략 10년을 주기로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다.

을묘왜변 이후 일본과 외교가 단절되었고 연산군과 명종 대에 일어난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의 사이의 계속된 당쟁으로 정치가 어지러워 지면서 왜구침입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다. 중앙집권의 부패로 인해 자연 백성들의 삶은 고단해졌고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외침에 대한 방비가 전무했던 조선은 오랑캐로 여겨진 여진족과 왜구의 노략질을 경계하기 위하여 비변사(備邊司)라는 기구를 신설하였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또 병조판서를 지낸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선조 대에 이르러 10만양병설을 주장했지만 피폐해진 조선의 형편으로 그것은 실현가능성이 없기도 하거니와 당파로 소일하던 벼슬아치들의 분열로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일본은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혼란기를 겪고 있었는데 통일의 기반을 닦은 오다 노부나가가 수하였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암살되고 곧 이어 오다 노부나가의 충복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0년 이르러 일본을 통일하였다. 그는 1585년에 관백(關白)이 되어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으나 지방에 분산되어 있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다이묘(大名: 지방에 독립된 영토와 군사를 가진 영주)들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큰 고민거리였다. 언제 다시금 내분을 일으킬지 모르는 지방 군벌들의 막강한 군사력은 자신의 권력유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에 풍신수길은 대륙정벌의 야욕을 불태우면서 조선 침략을 목표로 천명한다. 결국 조선침략이라는 명분은 지방의 다이묘들이 거느린 위협적인 군사력을 마음껏 이용하는 핑계거리가 되었고 동시에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한 다방면의 포석이었던 셈이다.

당시의 일본은 서양문물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칼이나 활 등의 재래식 무기를 청산하고 신형 조총을 도입하여 빠르게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각 지방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을 위한 군량과 병선, 군역을 할당하고 구주(九州)의 한 어촌이던 명호옥(名護屋)에 지휘본부를 설치, 본격적인 침략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침략군의 선봉장으로 임명된 기독교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1번대를 비롯하여 2번대의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3번대의 구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정) 등의 육군으로 이루어 졌으며 이들의 병력규모는 총 15만 8천여 명이고 11만 8천여 명은 일본의 잔류 병력으로 남겨두었다. 또 구키 요시타카(구귀가륭), 와키자카 야스하루(협판안치), 도도 다카도라(등당고호), 가토 요시아키(가등가명) 등이 수군으로 편제되어 보급부대의 임무를 맞았다.

이렇게 전쟁준비를 마친 일본 침략군은 대마도에 집결하여 풍신수길의 출격명령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 일본이 침략준비로 한창이던 때에 파벌싸움만을 계속하던 조선조정은 전란을 예고하는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선조 22년(1589)에 동인과 서인으로 대표되는 황윤길과 김성일, 허성 등을 통신사로 임명하여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두 번에 걸친 통신사 파견은 동인과 서인으로 구별되는 황윤길과 김성일의 의견이 서로 엇갈리면서 조정의 큰 혼란을 야기시켰다.

“일본내에 전란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

서인이었던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였으나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풍신수길의 외모가 볼품이 없으므로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선조를 안심시켰다. 결국 서인과 동인 계열의 의견이 다시금 갈라지면서 조선은 다가오는 전운을 감지하지 못하고 당파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결국 그 방비책만은 마련하자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뒤늦게 이에 대한 협의가 있었으나 이미 피폐해진 국방력을 회복하기엔 너무 늦은 때였다.

당시 우의정으로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던 유성룡이 왜구의 침입을 예상하여 선조에게 이순신을 천거, 전라좌수사로 부임케 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왜세에 대한 방어능력이 전무하던 조선은 한 명의 수군 사령관을 전라도에 배치함으로써 가장 완벽한 방어벽을 구축한 셈이 되기도 했으니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성(聖)의 칭호를 받는 위인은 단 두 명이다. 한 사람은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성웅(聖雄)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자신의 저서 《조선상고사》를 통해 충무공을 일컬어 평하기를 “우리 민족이 온전히 우리말과 우리의복과 우리문화를 가지고 지금껏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이충무공의 공로이다. 세상에 숱한 전쟁영웅들이 나왔지만 스스로를 희생하여 하나의 민족을 구한 영웅은 오직 이충무공 한 분 뿐이다.” 라고 하였다.

소설가 이광수는 《소설 성웅 이순신》을 집필하면서 그 서문에 충무공에 대해 “우리민족이 가질 수 있는 완전 무오류의 영웅” 이라 하였다.

이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보면 전란에 대한 조짐과 그에 따른 방책에 대한 일종의 계시몽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꿈에 바다 한 가운데 있던 섬 하나가 무서울만큼 빠르게 바다를 헤치며 다가왔다. 모두들 그 모습이 매우 두렵기에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졌으나 나는 그 광경이 오묘하고 신기하여 홀로 끝까지 섬을 구경하였다. 참으로 즐겁고 장한 기분이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를 일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분은 충무공의 일대기를 저술한 이순신 전서를 통해 또 다른 꿈이야기를 적어놓았다.

“집 앞에 거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 참으로 장대하였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선인이 높은 나무에 올라 가지에 기대어 떨어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나무가 뿌리채 흔들리며 쓰러지려 했는데 한 사람이 이를 온몸으로 떠받들며 버티어 섰다. 가만히 보니 그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조산보만호의 직책으로 여진족의 침입에 매진하던 이순신은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그의 조방장이 되었고 1589년 선전관과 정읍현감을 거치며 절충장군, 진도군수 등을 지냈는데 1591년에 류성룡의 추천을 받아 드디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한 직후부터 군선을 정비하고 각종 화포와 군사들을 조련하였는데 그 가운데 백미로 일컬어 지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이다. 거북선은 그 형상이 마치 엎드린 거북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투시 적진으로 돌격하여 화포를 비롯한 육탄공격의 임무를 받은 전투함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거북선을 메구라부네(장님배)라 부르며 두려워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화포 실험을 마쳤다고 하니 그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