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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고운

碧空 2013. 6. 30. 00:11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

우리나라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국빈 방문중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극진하고 정성스럽게

그리고 파격적으로 대우하고 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양국 정상회담에 앞서 오랜친구를 만난 것 같다

라고 하면서 당나라 시대 중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던 신라의 최치원 선생이 지었다는 시를 인용하며

그 뜻 까지 자상하게 풀어 설명했다고 합니다.

 

시 전문 :

掛席浮滄海 (괘석부창해) 푸른바다에 배를 띄우니

長風萬利通 (장풍만리통)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인 최치원 (崔治遠)선생의 시구를 인용하며 환영하는 것을 보며

우리의 국력이 그만큼 커졌다는데 대한 자긍심과 함께 우리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여서 이 역사적 인물에 대한 좀더 자세한 면모를 알아보고 배우고저 합니다.

 

최치원의 생애

최치원(崔致遠) 은 신라 말기의 문장가이며 학자입니다.

857년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 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 하며 경주 최씨의 시조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868(경문왕 8) 당나라 유학을 떠나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

과거 빈공과에 급제 하였으나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뤄양[洛陽] 등지를 떠돌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5() 1()으로 된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00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301권으로 된 <잡시부(雜詩賦)> 등의

시문집을 지었으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뒤 876년 선선주 율수현위(宣州 水縣尉 -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가 되고 이 무렵 1()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저술하였습니다.

 

당시 당()은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875년부터는 왕선지(王仙芝), 황소(黃巢) 등이

유민을 모아 산둥성[山東省], 허난성[河南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양양(襄陽)에서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는데,

고변이 황소(黃巢)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이 격문을 보고

황소가 도망갔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후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의 직위에 올랐으며,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받았고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으며, 당 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羅隱, 833909)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문명(文名)을 떨쳤습니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사륙집(四六集)><계원필경(桂苑筆耕)>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85(헌강왕 11), 최치원은 당 희종(僖宗, 재위 873~888)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으며,

신라의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은 그를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侍讀)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으로 등용하였습니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을 썼고, 당 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습니다.

이 가운데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8권은 전해지지 않으며,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太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냈고,

893년에는 견당사(遣唐使)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주()와 군()에서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889년에는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이 공부(貢賦)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의 힘은 수도인 서라벌 부근에만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습니다.

이때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 하였지만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이 즉위한 뒤,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하며 각지를

유랑하다  만년에는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으며.

908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하나 그 시기도 알 수 없고 장소도 알 수 없으나

여러 곳에 전해 오는 이야기와 전설만 무성할 뿐입니다.

 

 

경주의 남산(南山),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淸凉寺),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부산 동백섬 일대의 경관에 반하여 자신의 호 '해운'을 따서 그 지역 지명을 해운대라고 붙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최치원이 직접 새겼다는 '海雲臺' 석각도 동백섬 절벽 한켠에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최치원의 동상과 시비가

동백섬 언덕에 생겼으며, 해운대구와 최치원이 벼슬을 하며 토황소격문을 지었던 양저우시구는 자매 결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성균관에 배향된 동방 18

높은 학문과 굳은 지조로 한 시대를 이끌었던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학자 들을 성균관 문묘에서 배향하는데

이들을 해동 18현 혹은 동방 18(東方十八賢) 이라 칭하며 고운 최치원 선생이 18현 중 일인입니다.

참고로 성균관에서 배향되는 동방 18현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치원, 설총, 안유, 정몽주,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등이다.

 

최치원의 사상과 그 영향

최치원은 개혁이 좌절된 뒤에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은둔 생활로 삶을 마쳤지만 유교(儒敎)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최언위(崔彦撝), 최승로(崔承老) 등은 고려에서 유교 정치이념이 확립되는 데 기여했으며,

새로운 국가체제와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최치원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祭享)되는 등 유학자들에게 계속해서 숭앙되었습니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 역사를 정리하여 삼국의 역사를 연표의 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치원은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고유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 됩니다.

그는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풍류도를 한국 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이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 太子之化也).”

 

풍월도(風月道)라고도 하는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때에 비로소 제도로 정착되었지만, 그 기원은 고대의 전통 신앙과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화랑의 수양 방법은 노래와 춤을 즐기고,

산악을 숭배하던 고대의 제천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고구려에도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는

관직과 경당(扃堂)’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전통은 꼭 신라에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 하더라도 최치원은 이처럼 고유 신앙과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유교불교도교 등 외래 사상의 가르침을

융합하고 있는 풍류도를 현묘한 도(玄妙之道)’라고 칭하며, 포용과 조화의 특성을 지닌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그는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을 모두 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이나 승려의 비문(碑文)에서도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경전이 폭넓게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유()()()3()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 여겨 집니다.

 

나아가 최치원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지극한 도()에서는 하나로 통하므로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진감선사 비문(眞鑑禪師碑文)’에 실린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석가와 공자의 가르침이 흐름이 갈리고 체제가 달라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처럼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고 한다. 하지만 시()를 해설하는 사람이 문()으로 사()를 해치지 않고,

()로 뜻()을 해치지 않는 것처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마땅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을 지어서

여래(如來)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며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겸하지 못하는 자는 물()이 겸하기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沈約)도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뜻을 아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를 말할 수 있다 하겠다.”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유()()()의 가르침이 하나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노장사상(老莊思想)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등에도 상당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려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불교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는데, 여기에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석순응전(釋順應傳)’석이정전(釋利貞傳)’ 등 화엄종(華嚴宗)과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새로 등장한 선종(禪宗) 승려들에 관한 글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지증대사 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禪宗)의 역사를 간명하게 기술하고 있고 원측(圓測)

태현(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유식학(唯識學)에 대해서도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치원의 유선 통합 사상은 고려 시대의 유학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교 정치이념을 강조한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학자조차도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治國)의 근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고려 시대에는 유교불교도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하게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민간 신앙과 풍습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긴밀히 융합하는 모습을 띠었고,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이름을 들어보면 유교와 불교가 서로 멀어 다른 것 같지만 그 실상을 알면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認其名則佛儒逈異 知其實則儒佛無殊)”유불일치설(儒佛一致說)’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말기에 민족의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선의 사상을 융합하여 형성된 동학(東學)에서도

최치원 사상과의 연관성이 나타납니다.

 

최치원의 주요저술

저술로는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51.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1. 잡시부(雜詩賦),

301, 중산복계집 15, 사륙집(四六集) 1, 문집30권 등이 있었지만 이러한 시문집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사산비문(四山碑文) 혹은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사산비문중 진감국사비(진감국사)에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46 변려문(騈儷文)을 즐겨 썼으며,

문장이 평이하면서도 고아(高雅)한 품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 에 기() 원문(願文), ()등 그 편린만이 전할뿐입니다.

그 밖에도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석이정전(釋利貞傳)등의 저술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최치원의 글씨

최치원은 글씨도 잘 썼으며, ‘사산비문(四山碑文)’ 가운데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최치원이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오늘날까지 그의 필적을 전해줍니다.

이 탑비(塔碑)는 대한민국 국보 4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최치원이 해서체(楷書體)로 쓴 비문은

모두 382,414자로 되어 있습니다.

 

최치원에 관한 설화

최치원에 관한 많은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 (金集)

신독재전집(愼獨齎全集)에 실린 최문헌전(崔文獻傳)이 있다.

 

최치원 주요저술서 대한 이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계원필경집 (전체 20)은 고운 최치원이 중국 당나라에서 고변(高騈)의 휘하 막료로서 활동할 때 지은

시문 중에서 시 50, 320편을 직접 골라 20권으로 엮어 헌강왕에게 바친 시문집이다.

 

전체 구성은, 1~14권까지는 87910월 이후 8853월 이전까지, 회남절도사 고변의 휘하에서

황소, 천능을 비롯한 각 지역의 반란세력과의 대치상황에서 발생한 여러 정치군사적 사안을 다룬 것이고,

15권부터 20권까지는 도교, 불교와 관련한 글이다. 그 중에서도 17권 이후부터는 주로 자신과 관련한

글을 수록한 것이 특징인데, 전체 글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지은 연도순으로 배열하였다.

 

   * 1 책  1 ~ 10 - (), (), 주장(奏狀), 당장(堂狀), 별지(別紙)

   * 2 책  11 ~ 20 - 격서(檄書), (), 위곡(委曲), 거첩(擧牒), 재사(齋詞), 제문(祭文),

                     기(), (), (), (), 별지(別紙), 잡서(雜書), ()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904(효공왕 8)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중국 당()나라 법장화상(法藏和尙)의 영적(靈的) 생애를 서술한

책으로 서론격인 도입부분과 본전부분·후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장화상이 죽은 지 약 200년 뒤에 당나라의 승려 천리(千里)가 지은 장공별록(藏公別錄)의 편문(片文) 등을

 

화엄삼매관직심(華嚴三昧觀直心) 가운데의 직심의 십현의(十玄義) 에 비유해서 배열하여 법장 현자(賢者)의 일생을

기록하였다.

 

, 족성광대심(族姓廣大心), 유학심심심(遊學甚深心), 삭염방편심(削染方便心), 강연견고심(講演堅固心),

      전역무간심(傳譯無間心), 저술절복심(著述折伏心), 수신선교심(修身善巧心), 제속불이심(濟俗不二心),

      수훈무애심(垂訓無碍心), 시멸원명심(示滅圓明心)10과로 분류하여 서술하였다.

 

사료로는 염조은(閻朝隱)의 비문 및 석광엄(釋光嚴)이 쓴 전기, 그리고 징관(澄觀)연의초(演義鈔)등을 참고하였다.

특히, 연의초로부터 많은 내용을 발췌하여 서술하였는데, 우리나라 화엄종과 화엄십찰(華嚴十刹)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1090(선종 7)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수록되었고, 속장경의 일부로 조판되었으며,

1149(의종 3) 의화(義和)에 의하여 재간행 되었다. 현재 이 책은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 과 대정신수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다.

 

 

 

사산비명(四山碑銘)

 

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이 그것이다.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는 최치원이 찬()뿐만 아니라 서()와 전액(篆額)을 아울러 했다.

숭복사지비는 인몰(湮沒)해 전모를 알 수 없다가 1931년 경주 동면(東面)에서 잔석(殘石)이 나와

그 편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비문의 문체는 4·6 대우(對偶)6·6 대우가 주류를 이룬 전형적인

변려체(騈儷體)이다.

특히 문장 밖에서 사실을 끌어와 뜻을 증명하고 옛것을 빌려 현재의 뜻을 증명하려는 용전(用典)

많으면서도, 대우구(對偶句)를 만들 때 필요한 고사(故事)나 고언(故言)을 잘라 모으는 전절(剪截),

발췌한 고사성어를 개역(改譯)해 자신의 글 내용에 부합하도록 하는 융화(融化)의 방법을 잘 구사해

화려한 어사(語辭)의 수식과 함축미·전아미를 보여준다. 즉 불교를 상당히 이해하고 특히 선종에 공감하는 입장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런 사상적 내용보다는 문장 수식에 더욱 깊이 유의했음을 알 수 있다.

 

'四山碑銘'은 광해군 전후에 철면(鐵面)노인이라는 사람이 최치원의 문집인 고운집 孤雲集중에서

뽑아내어 이름붙인 것이다. 불교학인들에게 송습(誦習)되면서부터 그 과외독본을 이루게 되었고,

순조와 헌종 때에 홍경모(洪景謨)가 주해를 더해 유행하게 되었다.

 

석전노사(石顚老師)는 다시 정주본(精註本)을 만들었는데, 이외에도 여러 주해본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사산비명'은 최치원 문학의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상사와 한문학연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문선(東文選)

1478년 조선의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리 나라 역대의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이다.

이 책은 목록만 해도 3권이나 되며 합본은 45책으로 되어 있다.

이 책에는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 등을 비롯, 고려를 거쳐 당 대까지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들의 작 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거정은 취사선택의 기준을 '사리가 순정하고 치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시 문이

삼국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고 쓰고 있으며,

역대 에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것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전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동문선'에는 오언율시, 칠언율시, 오언절구 등 총 55종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 중국 '문선'39종보다도

많으며, 그 가운데 단 1편의 작품만으로 된 단락도 있는 것으로 봐서 당 시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도 최치원 등의 신라 인물에서부터 이색, 권근 등 이 책의 편찬 시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 기의

인물들까지 차례로 싣고 있다.

 

최치원이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 한수:

창 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窓外三苦雨)

등불 아래 마음은 고국을 달리네 (燈前萬里心)

가을바람에 시를 읊네 (秋風惟苦吟)

세상에 내 마음을 아는 이 없네 (世路少知音)

 

최치원의 유적지

동상(銅像)

부산 : 부산시 해운대구 동백섬

율수 : 중국 강소성 율수현 (영수탑내:영정2)

양주 : 중국 강소성 양주시

 

신도비(神道碑)

상서장(上書莊) : 이병도 근서 - 경북 경주시 인왕동 금오산 북쪽기슭

성주사(聖主寺) : 박경원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해인사(海印寺) : 김종호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상림숲(上林) : 후손,병식 - 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동

 

유허비(遺墟碑)

독서당(讀書堂) : 이원조 근서 경주시 배반동 랑산 기슭

수시식(手植松) : 이재완 경남 거창군 가북면 내촌리

해운대(海雲臺) : 이은상 부산시 해운대구 동백섬

지산사(芝山祠) : 전북 순창군 인계면 지산리

 

추모비(追慕碑)

류상대(流觴臺) : 조지염 근서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인리

청용대(靑龍臺) : 노상직 경남 창원시 능동면 가주동

월영대(月影臺) : 후손,현필 경남 마산시 해운동

 

영정(影幀) 위치 祭 日

무성서원(武城書院)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리 원촌 (2,8 .)

문창서원(文昌書院) 전북 옥구군 옥구읍 읍내리 상평 (10, 3)

지산영당(芝山影堂) 전남 광산군 대촌면 랑과리 (9, 9)

단동사 (丹洞祠) 전북 익산군 능포면 능포리 (2,8.)

지산사 (芝山祠) 전북 순창군 인계면 지산리 (3, 20)

남악서원(南岳書院) 경남 진양군 금곡면 죽곡리 (3.16.)

학남서원(鶴南書院) 경북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2, 8)

 

봉양서원(鳳陽書院) 경북 고령군 우곡면 봉산리 (, )

학사당 (學士堂) 경북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홍류동(한 식)

아산영당(鵝山影堂) 경북 울진군 울진면 명도리 (10, 10)

용강서원(龍岡書院) 경북 안동시 용산동 (2, 하 정)

금운사 (錦雲祠) 경북 영동군 강구면 그호동 (3, 10)

상서장 (上書莊) 경북 경주시 인왕동 (4, 16)

구회당 (九會堂) 대구시 동구 도동 (3.3.)

대곡영당(大谷影堂) 대구시 달서구 대곡동 (3, 10)

두곡영당(斗谷影堂) 경남 마산시 두척동 (두곡) (4, 18)

운암사 (雲岩祠) 경남 하동군 야포면 운암리 (2, 10)

부성사 (富城祠) 충남 서산군 지곡면 산성리 (2,8中丁)

도충사 (道忠祠) 충남 서천군 한산면 원산리 (3, 15)

청성사 (淸城祠)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 (9, 15)

 

위패(位牌)동상(銅像)

서악서원(西岳書院) 경북 경주시 서악동 (2,8 中丁)

염의서원(?義書院) 전북 옥구군 옥산면 한림동 (9 ,中丁)

해운대 (海雲臺) 부산시 동래구 동백섬 (4,17)

현충단 (賢忠壇) 전북 옥구군 옥구읍 내리 상평 (9上丁)

금산사 (金山祠) 경기도 화성군 팔한면 창곡리

벽성서원(碧城書院) 전북 김제읍 교동

옥산원 (玉山院) 전북 옥구읍 내리 상편 (9,上丁)

 

유적지

() :

봉암사(鳳岩寺)-문경

쌍계사(雙溪寺)-하동

청량사(淸凉寺)-가야산

성주사지(聖住寺址)-보령

고운사(孤雲寺)-의성

 

() :

가야산(伽倻山)-합천

청량산(?)-안동

우이도(牛耳島)-신안

 

() :

월영대(月影臺)-마산

학사대(學士臺)-해인

임경대(臨鏡臺)-양산

청용대(靑龍臺)-김해

해운대(海雲臺- 해운대

자천대(紫泉臺)-옥구

 

() :

상서장(上書莊)-경주

독서당(讀書堂)-경주

피향정(披香亭)-태인

학사루(學士褸)-함양

벽송정(碧松亭)-고령

홍류동(紅流洞)-해인사

맥도(麥島)-보령

 

향교(鄕校)

서울 성균관, 대성전 외 234개 향교에 위패가 모셔지고 있다.

 

참고 : 한국고전번역원

         경주최씨 대종회

         고운국제교류사업회

         daum/naver 백과사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