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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 조희웅

碧空 2013. 5. 25. 09:27

"경주" 하면 천년신라의 문화유적을 보기 위해 우리 국민이라면 몇차례씩 다녀오셨겠지요.

저의 경우에도 여러차례 다녀온 곳이어서 이번에도 또 경주인가? 했습니다만

이번 여행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경주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생각되어

여러분께 소개를 드립니다.


이번에는 조선시대의 명품(名品)인 최부자집과 양동마을을 돌아보았으며,

그동안 군의 주둔지로 통제구역이었던 해안선이 1년반전 관광지로 개방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양남 주상절리 풍경을 관람하게 되었고,
천년 신라문화의 중심이면서 평소에 가보기 어려웠던 남산과 골굴사를 다녀왔다.

즉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불국사,석굴암,첨성대,포석정,왕릉,박물관 등을 제외하고도

볼거리가 많아 경주는 역시 최고의 관광지로구나를 느꼈다.



경주는 잘 아시다시피 신라 천년고도로서 찬란한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 민족문화의 발상지로 천혜의 자연환경과 농.축.수산업이 고루 발달된 도.농 복합도시로서

요즈음은 미래를 열어가는 첨단과학도시로 발전해가고 있다.



특히 동북아의 독창적인 문화가 우리 문화사에서 가장 황금기였던 통일신라문화의

도도한 향기와 정취가 흔적마다 스며들어 있어 그 유연한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는

세계적으로도 자랑스러운 곳으로, 동양의 그리스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인근의 인구는 백만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중국의 장안, 바그다드, 콘스탄티노블, 로마 등과 함께 문화적으로나 지역의 중심역할 등이

세계5대도시로 크게 발전한 곳이라는 해설자의 설명에 이론의 여지가 없겠다.



우리 일행은 경부선을 4시간 반을 달려 첫번째 기착지로 교촌마을을 방문했다.

마을 이름에서 교육기관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신라시대에는 요석궁이 있었다가 조선시대에는 향교와 최부자집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 경주시에서는 교촌마을을 재개발하여 좋은 관광지로 다듬고 있는 중이다.





- 최부자집은 어떻게 400년간 재산을 유지발전시켜 왔는가?



경주 최부자 집은 1대 최진립부터 무려 400년간 만석의 재산을 유지하였는데

이렇게 대를 이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최부자집은 어떻게 조선시대 내내 부자의 대명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최부자집 재산을 기록한 <분재기>에 최씨가문이 어떻게 재산을 관리했는지 나와있다.



수천평에 달하는 농지를 그 생산성에 따라 소작인과 하인들에게도 분배해 주었다.

최씨 집안에서는 옥동과 기별이라고 하는 하인의 제사도 계속 지내고 있다고 한다.

즉, 하인의 공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경할 줄 아는 것이 경주 최부자집의 인격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부(富)의 시작은 '아껴쓰기'다.

최부자집 며느리는 시집오면 3년동안 무명옷만 입어야 했다.

만석군 며느리도 일반인과 다름 없이 힘든 생활을 겪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최부자집은 경주 전체의 모든 계층들을 엮는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 있었고

이것이 바로 그들의 가문이 부를 지속해올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된다.



최부자집 고문서를 보면 노비보다는 토지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부자들은 흉년이나 전란 등 어려운 시기에 값싸게 땅을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650년대 도적이 많이 나돌던 시기에 모든 것을 잃은 최하위계층의 반란이 있었다.

이 때 최국선은 수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고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때부터 최부자집은 철저히 하층민과 공생하는 방향으로 걷게 된다.



이와 같이 오랜동안 유지되어 오던 많은 재산은 지금은 어떤 형태로 있을까? 궁금해진다.

일제시대에 최준 선생께서 독립군 지원자금으로 사용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대구대학(현재의 영남대학)에 전재산을 헌납하여 젊은이들을 교육하는데

썼다고 하니 자연스레 머리가 숙여진다.

요즈음 조세 피난처에(버진아일랜드)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이상한 짖거리를하는

사회 지도층은 이와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즈를 본 받아야 겠다.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점이 많은 것 같다.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다른 부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진정한 부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최부자집 생활지침인 <가훈 6訓>과 <처세 6然>을 소개한다.



* 가훈 6訓 (집안을 다스리는 교훈)

. 무욕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 공생 :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도덕 :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고 파장 때는 물건을 사지 말라

. 금욕 :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 베품 :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

. 절약 : 최씨 가문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 처세 6然 (자신을 지키는 교훈)

.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는 초연하고

.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는 온유하며

.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으면 고요히 머물고

. 유사감연(有事敢然) : 일이 있을 때면 과감하게 대처하고

. 득의담연(得意譚然) :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고

. 실의태연(失意泰然) : 뜻을 잃었을 때는 태연하라





- 월정교에 깃든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사랑



월정교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전설을 품고 있는

요석궁의 이야기를 알아야 하는데, 삼국유사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원효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을 받칠 기둥을 만들겠다."고 노래하고 다니자

태종무열왕은 이 뜻을 눈치채고 홀로된 요석공주가 있던 요석궁으로 원효를 유인한다.

요석공주를 짝사랑하던 원효는 일부러 월정교에서 뛰어내려 옷을 다 적셨고

옷을 말린다는 핑계로 요석궁에 들어서고 여기에서 신라의 대학자 설총이 태어난다.



왕족이 머물던 월성과 신라의 불국토 남산 사이를 가로지르던 물길이 문천이고

그 둘을 잇는 지붕이 있던 최고급 다리가 바로 월정교다.

길이는 약 60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위에 누각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요석궁은 지금의 경주향교 자리에 있었으며,설총이 신문왕 때 국학을 만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집을 국학자리로 내놓았다.

이후 교육기관은 국학(신라), 향학(고려), 향교(조선)가 되어서 변천되어 왔다.



여기서 원효대사의 성씨가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설총의 아버지이니 당연히 "설"씨이다.

신라시대에는 왕족 3개성(박,석,김) 외에 6개(배,설,손,이,정,최)의 귀족성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인 설씨는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해설자에게 듣고 설희순 선배께서 어깨를 으쓱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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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12523962937160544673/201305091?authkey=Gv1sRgCICF-IjC_YrE6gE#slideshow/5878107461761655842>





- 무덤의 종류



경주에 가면 무덤이 참으로 많다.

또한 무덤의 이름도 가지가지로 불려서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금번 여행에서 들은 무덤을 정리하여 본다.

무덤 이름으로 능(陵), 원(園), 묘(墓), 총(塚), 고분(古墳) 등이 있다.

이는 왕족과 다른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만든 무덤의 명칭이다.



능과 원은 왕족의 무덤으로 왕의 직계에 사용하며,

묘는 기타 빈과 왕자, 공주, 옹주 등의 왕족과 일반인들의 무덤이다.

왕족이 아닌 일반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무덤을 묘라 했다.

'김유신 묘'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외에도 장군총과 무용총, 능산리고분, 안악1호분처럼 총과 분 형태의 무덤도 있다.

총(塚)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벽화 등 특징적인 것이 있어 왕릉으로 추정되어

실명이 확인되는 능과 구분해서 사용하며,

분(墳)은 주인공도 모르고 특징도 없을 때에 붙이는 무덤의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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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12523962937160544673/201305092?authkey=Gv1sRgCKeQru7vmIvfVQ#slideshow/5878093081487335826>





- 양동마을



조선시대 경주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양반마을이다.

양동마을은 한국 최대규모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동성취락(同姓聚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주(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손소와 손중돈, 이언적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했다.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 하촌과 상촌, 남북으로 남촌과 북촌의

4개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집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2010년 7월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물(勿)자 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 명당마을로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집안이

서로 협조와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오랜 역사를 이어온 유서깊은 전통마을로

온갖 귀중한 문화재도 넘쳐난다.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방문했으며,

영화 '취화선', '내 마음의 풍금', '혈의 누', '스캔들' 등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 손씨, 이씨의 선의의 경쟁



수백년간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온 사이지만 학문에서는 선의의 경쟁을 하여

각 집안에서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조선시대는 물론 최근에도 많은 유명인이 이 지역에서 배출됨으로서

가문의 영광을 지키고 있으며,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고장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완 사장(삼성전기출신)께서는 여강 이씨의 후손으로 역시 인품이나 갖춘 학식이 남달라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로 주손과 종손은 말씀하고 있다.





- 삼현(三賢)이 태어날 양동 서백당(書百堂)



경주(월성) 손씨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하는 마을에 입향한 것은

양동민속마을의 입향조라 불리는 조선초기의 무인 양민공 손소 공 때이다.

서백당은 조성 당시 자리를 잡아준 풍수사가 설창산의 혈맥이 응집된 곳이라

세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다고 예언했다 한다.

그리하여 서백당을 ‘삼현출생지지(三賢出生之地)’라고 불렀는데

그 중 두명의 뛰어난 인물이 서백당에서 태어나게 된다.

서백당을 지은 손소의 아들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이다.



우재는 성종2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우참찬 등 40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로 경주 동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회재는 우재의 생질로 성리학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퇴계 이황에 앞서 최초로

이론체계를 세우고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해동부자(海東夫子)라 불리고

동방5현(東方五賢) 중 한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나머지 한명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이곳 출신의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는 의미로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오롯이 배어있다.

종손과 종부 역시 몸을 바로세우고 마음을 청렴하게 하는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풍수가의 예언대로 서백당에서 삼현(三賢) 가운데 두 명의 큰 인물이 배출되었고

회재 선생 이후 경주 손씨 종가인 서백당에서는 한명의 현인을 더 배출할 기회가

남게 되었는데, 이후 남은 한명의 인물이 손씨여야 한다며 손씨 집안에선

며느리가 출산할 때는 방을 내줘도 딸에게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향단, 무첨당에서도 이씨 집안에서도 타 성씨의 출산을 통제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곳 출생의 이씨 선인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요즈음의 젊은 부부는 이곳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허탈해하고 있단다.

이와같은 분위기속에서도 두성씨는 한 마을에서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면서 동거하는

보기 드문 양성(兩姓)마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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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12523962937160544673/201305093?authkey=Gv1sRgCMqOv4Sthd3DBQ#slideshow/5878093186260855010>





- 향단과 무첨당 방문



이지역은 일상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주민들의 불편과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보통은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나 이완 사장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안내가 되어

각각의 종손과 주손으로부터 환대를 받게 되었다.

우리를 안내해주시기 위해 서울에서 동참하여준 이완 사장 덕에

우리의 여행이 더욱 알차게 되었으니 진행자로서 감사를 드린다.

양동마을을 관광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은

"조선시대의 집구경을 잘했으며 다리가 아파 피곤했다."라는 것이 평이란다.

우리 일행은 두곳의 안구석까지 안내 받아 조선시대의 사대부집을 잘 보았으며,

정갈하게 차려주신 감주와 전통과자, 엿을 먹으면서 장시간 이곳에 대한 담소를 할 수 있게되어

여행의 보람을 느끼고 양동마을의 진수를 보게 되었다.

무첨당의 종손 이지락 선생님께서는 부산에서 학교에 봉직하고 계신 분으로

이날 우리 일행을 맞아 주시기 위해 급히 무첨당에 돌아오셨으며,

"양동마을은 사람이 될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는 한마디로

우리 일행들에게 양동마을의 전부를 이해가 되게 해주었다.



* 향단



회재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세운 집으로 원래 99칸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일부는 불타 없어지고 현재 56칸이 보존되어 있다.

전체적인 건물의 배치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건물의 몸체는 월(月)자형이고,

일(一)자형의 행랑채와 칸막이를 둠으로써 용(用)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일반주택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평면구조이므로

한국 주택건축사 연구에 있어서 주목 받고 있는 건물이다.

주손 이문환 선생께서는 마을의 원로로 양동마을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일에

큰 공을 세우시어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 무첨당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 선생의 종가로

여강 이씨 대종가의 안채 옆에 따로 세워진 사랑채 건물이다.

내루(內樓)가 앞으로 나와 있어서 평면구조가 'ㄱ'자 모양이다.

이 건물은 상류주택에 속해 있는 사랑채의 연장건물로 손님접대, 쉼터, 책읽기를 즐기는 등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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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12523962937160544673/201305094?authkey=Gv1sRgCOD0vO7nlK-IUA#slideshow/5878093419075165378>





- 안압지(雁鴨池)



신라 별궁 안의 후원(後園)으로 그 안에는 임해전을 비롯한 여러 부속건물과

정원이 있었으며, 삼국통일 직후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문무왕14년(674년)에 완성되었다.

궁 안에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임해전은 931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들의 접대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월지(月池)였으나 연못에 기러기(雁)와 오리(鴨)가 많이 찾아들어

조선시대 때부터 안압지라 불리게 되었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의 포용정책의 상징으로 건물은 고구려식, 연못은 백제식으로 만들어

상대국의 좋은 점을 따른다는 뜻을 표현했다고 한다.

안압지는 한국조경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연못의 원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시에서는 야간 관광으로 안압지의 야경과 신라문화 천년 공연을 추천하고 있다.

좋은 테마로 관광객의 저녁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게하는 좋은 프로그램이다 생각된다.

우리 일행은 피곤한 가운데 잘 꾸며진 안압지의 풍경을 즐겁고 환성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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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12523962937160544673/201305095?authkey=Gv1sRgCP_Q3vKM8ejUYQ#slideshow/5878093573573220178>





- 서울의 어원



서울의 어원 두가지 중 하나는 서라벌이 서울로 변천되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말로,

수도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인 동시에 고유명사로도 사용한다.



또 한가지는 조선초 태조가 서울 도성을 쌓을 자리를 정할 때

눈이 남아있는 선, 즉 설울(雪城)을 따라 도성을 쌓게 했는데

눈울타리인 설울이 변음되어 서울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 경주 남산



경주평야의 주위에는 서쪽에 선도산, 동쪽에 낭산과 명활산, 북쪽에 금강산 등

많은 산들이 성벽처럼 둘러서 있는데 그중에 크고 높은 산이 남산이다.

남산은 높이 약 500m가까운 고위봉과 금오봉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계곡과 산들을 합쳐서 경주 남산이라 부른다.

까치봉이나 황금대 부근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반달형돌칼·돌살촉 등이

발견되고, 오산골 어구에는 고인돌이 남아 있다.

남산은 화강암, 소나무, 솔솔바람을 기본으로 구성되어 한여름에도 그늘과 바람으로

여행객을 시원하게 해주며, 겨울에도 눈내리는 양이 적고 동해 남부의 따듯한 날씨로

등산하기가 좋다고 한다.



또한 암석신앙의 유적인 남산부석·천룡암·큰지바위·상사바위 등이 있으며,

진평왕대(579~632)에 쌓은 남산신성이나 고허성 같은 국방시설의 터도 남아 있다.

남산신성 터 안에는 두곳의 무기창고터와 한 곳의 식량창고터가 남아 있는데

식량창고터의 길이는 100m이며, 지금도 비가 오면 탄화된 쌀알들이 발견된다.

무기창고도 길이 50여m가 넘는 큰 건물이었는데, 모두 밑으로 바람이 통하는

다락식 건물이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과 신라의 종막을 내린 포석정도 이곳에 있다.

그외에 왕릉들도 이곳의 여러군데에 있어 이 산을 신라역사와 유적의 산이라 부른다.

더욱이 6세기초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로는 부처의 산으로 신앙되어

많은 절과 탑이 세워지고 불상들이 조성되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이며,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체를 헤아린다.

한마디로 남산은 야외 박물관이라고 보아야겠다.



당초 삼릉에서 용장사까지 종주하는 것을 계획하였으나 안전에 무리가 있다 판단되어

축소관광을 하였고 남산은 맛배기만 보았던 것 같아 아쉬움이 있었으나

처음 몇개의 유물에서 느껴지는 휼륭함에 그저 탄복할 따름이다.



* 삼릉(三陵)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세개의 신라시대 고분으로

남산(南山)의 서쪽에 동서로 세 왕릉이 나란히 있어 ‘삼릉’이라 불리고 있다.

서쪽으로부터 각각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 일행 중 박씨 성을 가진 회원들 8명이 나와

해설자의 안내에 따라 전통방법대로 선조들께 성묘를 하게 되었으니...

조상님도 뵙고 좋은 성묘법도 배우게 되어 일석이조의 보람이 있었다.



8대와 53~54대 왕은 약 700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삼릉에 박씨 성의 왕릉이

한곳에 모여 있다하나 세 왕릉의 확실성은 의문이라는 해설자의 애매한 설명도 있었지만

무에 대수겠는가? 박씨 후손들의 애쓴 모습과 조상 모시기의 효(孝)가 보인다.



* 석조여래좌상



연화대좌 위에 앉아있는 좌불로서 불교에서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의 꽃송이다.

처음부터 노천불로 추정되는 불상은 참된 아름다움은 조화의 미라고 생각한 조상들은

자연미를 파괴하는 일이 없었다.

불상 광배의 안쪽에는 부드러운 넝쿨무늬를 새기고 바깥쪽은 힘있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 마애관음보살입상



뾰족한 기둥바위에서 미소를 머금고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이다.

부처님을 비바람이 치는 노천에 세운 뜻은 산기슭에서 올려다보며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고 하강해주시는 그 감격을 극적인 모습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광배 없이 3m 정도 뒷쪽의 바위를 광배 삼아 보살상을 조각함으로써

방금 하늘에서 하강한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붉은 연지의 입술은 색칠도 아니고 돌을 끼워 맞춘 것도 아닐진데...

저렇게 이상적인 돌을 어떻게 구하여 조화를 맞추었을까? 놀라울 따름이다.



* 선각육존불



경주 남산 삼릉계곡 입구에 있는 선각(線刻 : 선으로 새김)의 마애불상군이다.

불입상이 본존인 삼존상과 불좌상이 본존인 삼존상이 각각 다른 바위에 새겨져 있다.

좌측의 조금 돌출된 바위 면에 새겨진 불입상의 삼존불은

좌우의 두 보살이 무릎을 꿇고 꽃 쟁반을 받쳐들어 꽃 공양을 하는 모습을

대담한 곡선의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삼존 모두 둥근 두광(頭光 :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이 있으며,

본존 불입상은 얼굴이 둥글고 신체도 풍만한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상들은 머리와 몸체에 알맞은 비례감을 보여 준다.

특히 꽃 공양의 보살상은 드물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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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12523962937160544673/201305096?authkey=Gv1sRgCJ7Yy4DwnqyJWg#slideshow/5878093779842039234>





- 주상절리(柱狀節理)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걸을 수 있는 1.7km 구간의 파도소리길이 열렸다.

주상절리하면 제주도 서귀포 해안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는 이 외에 한탄강, 무등산 정상 근처, 가지산의 입석대와

경주 읍천 앞바다에서 볼 수가 있다.

경주 읍천 앞바다는 그동안 군사지역으로 통제가 되어오다가

2년전부터 군부대가 철수하고 숨겨�던 비경을 드러낸 곳이다.

경주시에서는 '파도소리길'이라 명명하여 주변을 정비하니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제주도의 것이 규모는 크나 대부분 수직으로 형태가 단조로운 것에 비해

경주 읍천 앞바다의 주상절리는 위로 솟은 것, 기울어진 것, 부채꼴, 누워 있는 것,

꽃봉우리 모양 등 다양한 형태로서 어느 조각가의 작품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자연의 오묘함이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아래 사진을 클릭하시면 관련 사진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picasaweb.google.com/112523962937160544673/201305097?authkey=Gv1sRgCNC1htXa9efkQQ#slideshow/5878093998950335746>





- 한국의 소림사, 골굴사와 선무도



중국 소림사에 소림무술이 있다면 한국 골굴사(骨屈寺)에는 선무도(禪武道)가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원, 선무도의 요람, 마애여래불의 보물과 함께

경주에서 가볼만한 곳이라 하는데 대부분의 회원들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골굴사는 신라불교 초창기인 6세기에 만들어진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찰로서,

경주 시내에서 감포로 가는 길에 '달을 머금은 산'이란 뜻의 함월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동굴군으로 형성된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이다.

인도사람 광유선인 일행이 이곳에 석굴을 파서 가람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찰 안쪽에 회색빛의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바로 석굴이 모여있는 곳이다.

바위 꼭대기에 마애여래불좌상(보물581호)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12개의 동굴이 있다.

각 동굴마다 부처가 모셔져 있어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다.



골굴사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불교전통무술인 선무도의 총본산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선무도는 '위파사나'라고도 불리는 불교의 전통수행법으로 선요가, 명상, 선기공, 선무술

등을 포함하고 있다.

선무도대학과 화랑사관학교에는 스님들의 수행공간이 있으며, 운이 좋은 경우 스님들의

수련 모습을 볼 수 있다하나 당일은 교육프로그램이 없다는 해설자의 말에 아쉬웠다.



이곳의 관음당은 원효대사께서 입적하신 곳이라 하고 동아보살 진도견으로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 동아보살 진도견



골굴사에 도착하면 주차장 옆으로 육중한 포대화상(달마대사)과

사찰과 어울리지 않게 진도개의 상이 있다.

개 상은 지상파 3개 방송과 외국 TV까지 방영되어 유명세를 떨친 동아보살 공덕기상이다.

동아보살은 이 절에서 기른 개인데 1990년도에 태어나 일체 고기를 먹지 않고

강아지 때부터 새벽예불에 참석했고, 기도객들과 함께 참선과 탑돌이를 따라했다.

20여차례 강아지 분양으로 많은 돈을 절에 보시하기도 했으며,

죽는 날(2010년) 아침까지 새벽예불에 참석한 영물로서 그 영혼을 기리고저 세운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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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12523962937160544673/201305098?authkey=Gv1sRgCJXUyLuPi73HXg#slideshow/5878094248539628578>





우리 일행의 이번 경주여행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게된

푸근한 여행이었다고 생각된다.

전통 관광지을 돌아보는 대신에 우리 선조들의 숨결과 예술혼이 깃들어 숨쉬는 곳들을 돌아볼

수 있어서 우리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 의미있는 여행이었다고 생각된다.



보통 경상도 하면 먹거리가 신통치 못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교동쌈밥(054-858-2990), 운수대통(054-535-2568), 문무대왕릉 앞의 태평양횟집(054-771-8853) 등

먹거리 또한 푸짐하고 맛깔스러웠다고 자평하여 본다.

숙소인 K-호텔(전 교육문화회관 054-745-8100)도 보문단지의 타 고급호텔 못지 않았으며

관광지라서 비용이 다른 지역보다 20% 정도 비싸고 경주빵 추가 준비로 예산을 초과한 점과

요석궁 자리는 지금도 음식점 "요석궁"이 있어 경주 최고의 음식점으로 뽐내고 있는데,

사전예약에서 선약에 밀려 명문 음식점으로 모시지 못하게 되어 회원들께 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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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casaweb.google.com/112523962937160544673/201305099?authkey=Gv1sRgCNyija-fhcqqHg#slideshow/5878092951485488354>





우리 국내 문화탐방은 회원님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으로 날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조병오 드림



배경음악은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가수 조용필과 싸이의 최신 히트곡입니다.

메시지의 내용과 맞지 않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한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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