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하자 !!

참되고 바르게

역사·정치·경제·과학

소현 세자와 인조

碧空 2011. 10. 10. 23:49

소현세자와 인조

병자호란때 치욕을 격은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원한으로 인해 볼모지 심양에서 서양의 신문물과 청나라의 좋은 점등을 배워온 세자를 학대하고 독살하는 비극을 만들었고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의 반정명분인 대명 사대주의 만 고집한 결과 조선을 수난의 역사로 만들어놓은 시대착오였다. 지금 현실에는 어떤지 되돌아보고 싶은 사건이며, 실용주의와 국제적 감각을 익혀온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후기 조선왕조 중흥의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크다

인조의 반정명분인 명나라를 배신하고 형과 아우를 죽인 폭군 광해군 과연 폭군이었을까? 태종 이방원은 부왕의 후처 소생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왕권에 도전하는 형제들과 추종세력을 제거하였고, 세조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복위를 꾀하든 신하들을 죽였는데 폭군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머니원한 갚겠다고 국법을 어기며 실록을 들추어내 부왕과 관련된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사냥에 지장이 된다하여 백성들의 집을 헐어내고 주색을 즐기기 위하여 전국에서 여인을 징발 하기위해 채홍사를 동원한 연산군과 같은 존재인가? 임진왜란 한달만에 도성을 버리고 밤중에 도망 나간 선조, 경복궁은 왜군이 불태운 것이 아니었다.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선조는 전쟁이 불리하고 다급해지자 광해군을 할 수 없이 세자로 책봉하였고 전란을 수습하고 중국대륙의 정세 변화와 정치상황을 알고 실용주의 외교 정책으로 정국을 안정 시킨 세자를 불신하고 마음이 변하여 정비 인목왕후 김씨 소생의 어린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려다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자 광해군은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며, 선조 사후에도 왕권에 대한 도전이 계속되고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에 대한 숙청은 어느 집권자인들 용납 할수 있었겠는가? 친위부대 강홍립부대를 명나라 요청으로 파병하여 병력에 틍이 생긴틈을 탄 인조 반정은 사감에 의한 역모 행위이며 대륙의 국제정세를 오판하여 조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비극을 초래한다.

1.소현세자 (1612~1645) 의 생애

2.제 16대 인조의 가계도

3.인조시대 정치상황

4.부자간의 이념 갈등

5.인조시대 세계사

참고 예송(禮訟)논쟁 의 전개과정

가.제18대 현종 가계도

나.1차 예송논쟁 조대비(인조계비 장렬왕후) 복상기간 적용

다. 2차 예송논쟁 조대비(효종비 인선왕후) 복상기간 적용

1.소현세자 (1612~1645) 의 생애

선조의 장남으로 13살에 세자에 책봉되고 정묘호란(1627년)시 전주에서 남도민심을 수습하고 이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 하였다.

병자호란(1637년)때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이후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하는 등 외교적 솜씨를 발휘하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소현세자와 해결하려했다. 하지만 조정은 이 같은 활동을 친정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였다.

세자빈은 장사 수완이 있어서 상당한 재물을 모을 수 있었으나 인조가 총애하든 후궁 조소용과 사이가 좋지 않아 소현세자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 시켰다.

심양에서 인질생활 8년 만에 귀국 하였으나 신문명과 천주교를 접하고 청에서 가저온 서양 문물조차 수용하지 않았다.

실용 외교노선을 터득 하고 서양의 신문물을 가져온 아들은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고 귀국 후 2달 만에 병사하였으나 왕손이 죽을 경우 문책 받게 되어 있는 치료를 담당 의관을 전혀 문책하지도 않았고 세자빈도 사약을 받았으며 손자들도 제주도에 귀양 가서 두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러한 정황은 독살을 증명한다고 할수 있다.

소현세자 나이 34살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고 소현묘 에서 고종때 소경원 으로 격상됨.

2.제 16대 인조의 가계도

선조

├─────원종(정원군) 능양군(1596~1649) 55세로 사망

인빈 김씨 ├───── 제16대 인조(능양군) 재위기간:1623.3~1649.5 26년 2개월

인헌왕후 구씨 │ 부인: 3명 자녀: 6남1녀

┌ ─ ────── ┘

│ ┌───소현세자

인렬왕후 한씨 ─ ──────┼───제17대 효종(봉림대군)

│ ├───인평대군

장렬왕후 조씨(자식없음) └───용성대군

│ ┌───승선군

귀인 조씨 (폐출) ── ── ┼─── 익선군

└───효명옹주

3.인조시대 정치상황

-인조반정 1623년

1623년 3월12일 인빈 김씨 소생 능양군은 반정명분으로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하고 과도한 토목 공사를 벌이고 두마음을 품어 오랑케 에게 항복하는 등을 내세워 광해군을 무력으로 축출한 후 실리주의 중립외교로 국제정세 변화에 무사하게 지낼 수 있엇으나 서인과 인조는 친명사대주의 와 청나라를 배척하는 외교로 노선을 변경하면서 조선의 수난을 초래함.

-이괄의난 1624년

반정공신인 이괄이 역모 누명을 쓰자 북방의 군을 동원 19일 만에 한양을 점령 하였으나 3일 천하로 끝났으며 이로 인해 국력이 크게 약화됨.

-정묘호란 1627년

후금은 이괄의 난으로 쇠약해진 조선에 형제의 관계를 맺게 하는등 5가지 요구를 수용하게 하고 화친 함.

-병자호란 1636년

청나라와 형제관계를 폐하고 군신의 관계로 격하 공물을 바치고 명나라를 정벌할 군사 3만명을 요구하자 항전 45일 만에 남한산성에서 나와 선조는 무릅을 끓고 절하며 삼전도에서 청태종 에게 항복하고 청나라에 군신의 예를 다하며 청 태종의 송덕비를 세워야하고 척화파는 사형을 당했으며 청나라의 7항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게 되었다.

-세자 귀국 1645년

정두헌등과 볼모에서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서적 천주교 서적과 서양역법을 가저와 새로운 문화 형성에 기여함.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음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성리 학자를 배출 하였으나 현종 숙종 때에 효종과 조대비(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복상기간을 두고 이들은 예송 논쟁을 만들어 서인과 남인 간에 정권다툼의 파란을 일으킴.

4.부자간의 이념 갈등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친명 사대주의이며 그것으로 광해군을 몰아냈으나 삼전도에서 당한 치욕으로 청에 대한 원한이 깊어 국제정세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였다.

-심양에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부당한 요구를 담판 하는 등 세자가 외교수완을 발휘하자 친정행위로 규정 친명 반정세력과 인조는 반감을 갖게 됨.

-봉림대군은 형을 보호하고 청의내부사정을 파악 본국에 정보를 제공 하는 등 반청 친명사대주의자로 굳어지면서 아버지의 신임을 받음.

-인조가 총애하든 귀인 조씨와 볼모지에서 장사에 밝았던 세자빈과 불화가 관계를 더욱 악화시킴.

-1645년 8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 하였으나 2달 뒤에 와병 3일 만에 죽고 시신은 까맣게 변하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함.

5.인조시대 세계사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서서히 몰락하고 청나라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서구와의 교역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일본문화와 서구문화의 접목이 시도 되고 있는 시기였다.

또한 인도의 무굴제국의 힘이 약화되고 영국의 침탈이 가속화 되었다. 유럽은 30년 종교전쟁시대를 끝냈으며,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증대 시키고 아메리카에 도시를 건설하고 뉴질랜드 등 남태평양을 지역을 침략하였으며, 또 이시기에는 데카르트의『방법서설』, 흡스의『시민론』, 밀턴의『언론자유』, 갈릴레이『천문대화』, 뒤마 피스의『춘희』등이 저작 되었고 파스칼은 유체압력에 대한 “파스칼의 법칙”을 발견했다.

참고 예송(禮訟)논쟁 의 전개과정

가. 제18대 현종 가계도

효종 33세로 사망 (1641~1674)

├──────제18대 현종 재위기간 : 1659.5~1674.8)15년3개월

인선왕후 │ 부인: 1명 자녀 1남 3녀

│ ┌───제19대 숙종

명성황후 김씨─────┼───명성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나. 1차 예송논쟁 조대비(인조계비 장렬왕후) 복상기간 적용 문제

-왕실의 전례문제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 문제 였다. 또한 왕위계승 원칙인 종법의 이해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단순한 학문적 논쟁 같으나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문제로 당시 선비에게는 목숨을 거는 중대 사안임.

-소현세자 사후 왕위계승 원칙

인조는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자 세손이 아닌 둘째 아들인 봉림 대군으로 왕위를 잇게한다.

당시 왕위 계승법에 따르면 소현세자 첫째 아들인 첫재 아들(석철)이 왕위를 계승하여야 하나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오감으로 이법을 어겼으며 효종이 재위10년 만에 죽자 조대비의 복상기간이 문제됨.

-주자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죽었을 때 장자는 3년상, 차자 이하의 아들은 기년상(만1년상)을 치러야 합당하나 서인과 남인의 해석이 달랐다.

-서인의 해석(송시열 송준길 등)

효종은 둘째 아들이고 조대비는 어머니로 신하가 아니며 비록왕위를 계승하 였어도 적자

이지만 장자가 아님으로 기년상 주장함.

-남인의 주장 (허적, 윤선도, 소북계 윤휴 등)

효종이 둘째 아들이나 왕위를 계승하였음으로 장자로 대우하여 3년 상을 주장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임.

-종법주의 문제점

송시열의 주장대로면 종법에 따라야 한다면 원래 왕위를 효종이 아닌 소현세자의 아들이 계승해야하는 위험성이 있어 남인의 윤선도는 논리상의 오류를 지적 복상문제로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공격하였으나 서인에 대한 모함이라는 탄핵으로 윤선도는 귀양 조치되고 소현세자 셋째아들 석견도 죽자 1차 예송논쟁은 일단락 됨.

다. 2차 예송논쟁 조대비(효종비 인선왕후) 복상기간 적용 문제

-1674년 정월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기간 문제와 현종이 그해 8월에 죽자 그때까지도 인선왕후의 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다시 복상문제가 거론됨.

가례에 따르면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면 기년상(1년) 차자부로 보면 대공 상(9개월) 국조오례는 큰며느리든 작은 며느리이든 모두 기년 상에 해당함.

-서인의 해석(송시열 송준길 등)

1차 예송 때와 같이 효종을 차자로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공 설(9개월)을 주장함

-남인의 해석

효종이 왕위계승권자로 장자부가 되어 기년 상(1년)을 주장함.

- 서인의 내부갈등에 의한 당의 양분 사태

서인으로서 제1차 예송 때는 송시열의 주장에 동조한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가 남인과 결탁하여 현종은 장자부 기년설을 주장하는 남인편을 들어주고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확정되어 조정은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의 힘이 커졌으나 효종비가 죽은 그해에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들고 나오게 되고 숙종은 송시열을 유배시킴으로서 서인 세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송시열이 유배되자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의 차자 기년설의 정당성을 유생들이 주장 구명운동을 벌이자 이번에는 남인 세력에 밀려 김석주 등은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다시 서인과 결탁 허적, 윤휴 등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는 경신대출척으로 예송은 일단락 되고 숙종은 다시는 예송을 거론 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다.

라. 예송(禮訟) 논쟁의 종결

- 단순한 복상의 논쟁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을 매개로 한 일대 政爭 이었으며 17세기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로서 다스리는 이상 국가 실현 방법을 둘러싼 성리학 이념 논쟁으로 조선 후기 가장 이상적 정치 형태였던 붕당 정치를 대표하는 정치 사건으로, 이후 숙종은 다시는 예론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박영규 저 한권으로 읽는 조선 왕조 실록 웅진 지식하우스 발행

이현희 엮음 이야기 한국사 청아출판사 발행

 

 

 

병자호란때 치욕을 격은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원한으로 인해 볼모지 심양에서 서양의 신문물과 청나라의 좋은 점등을 배워온 세자를 학대하고 독살하는 비극을 만들었고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의 반정명분인 대명 사대주의 만 고집한 결과 조선을 수난의 역사로 만들어놓은 시대착오였다. 지금 현실에는 어떤지 되돌아보고 싶은 사건이며, 실용주의와 국제적 감각을 익혀온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후기 조선왕조 중흥의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크다

인조의 반정명분인 명나라를 배신하고 형과 아우를 죽인 폭군 광해군 과연 폭군이었을까? 태종 이방원은 부왕의 후처 소생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왕권에 도전하는 형제들과 추종세력을 제거하였고, 세조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복위를 꾀하든 신하들을 죽였는데 폭군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머니원한 갚겠다고 국법을 어기며 실록을 들추어내 부왕과 관련된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사냥에 지장이 된다하여 백성들의 집을 헐어내고 주색을 즐기기 위하여 전국에서 여인을 징발 하기위해 채홍사를 동원한 연산군과 같은 존재인가? 임진왜란 한달만에 도성을 버리고 밤중에 도망 나간 선조, 경복궁은 왜군이 불태운 것이 아니었다.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선조는 전쟁이 불리하고 다급해지자 광해군을 할 수 없이 세자로 책봉하였고 전란을 수습하고 중국대륙의 정세 변화와 정치상황을 알고 실용주의 외교 정책으로 정국을 안정 시킨 세자를 불신하고 마음이 변하여 정비 인목왕후 김씨 소생의 어린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려다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자 광해군은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며, 선조 사후에도 왕권에 대한 도전이 계속되고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에 대한 숙청은 어느 집권자인들 용납 할수 있었겠는가? 친위부대 강홍립부대를 명나라 요청으로 파병하여 병력에 틍이 생긴틈을 탄 인조 반정은 사감에 의한 역모 행위이며 대륙의 국제정세를 오판하여 조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비극을 초래한다.

1.소현세자 (1612~1645) 의 생애

2.제 16대 인조의 가계도

3.인조시대 정치상황

4.부자간의 이념 갈등

5.인조시대 세계사

참고 예송(禮訟)논쟁 의 전개과정

가.제18대 현종 가계도

나.1차 예송논쟁 조대비(인조계비 장렬왕후) 복상기간 적용

다. 2차 예송논쟁 조대비(효종비 인선왕후) 복상기간 적용

1.소현세자 (1612~1645) 의 생애

선조의 장남으로 13살에 세자에 책봉되고 정묘호란(1627년)시 전주에서 남도민심을 수습하고 이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 하였다.

병자호란(1637년)때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이후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하는 등 외교적 솜씨를 발휘하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소현세자와 해결하려했다. 하지만 조정은 이 같은 활동을 친정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였다.

세자빈은 장사 수완이 있어서 상당한 재물을 모을 수 있었으나 인조가 총애하든 후궁 조소용과 사이가 좋지 않아 소현세자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 시켰다.

심양에서 인질생활 8년 만에 귀국 하였으나 신문명과 천주교를 접하고 청에서 가저온 서양 문물조차 수용하지 않았다.

실용 외교노선을 터득 하고 서양의 신문물을 가져온 아들은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고 귀국 후 2달 만에 병사하였으나 왕손이 죽을 경우 문책 받게 되어 있는 치료를 담당 의관을 전혀 문책하지도 않았고 세자빈도 사약을 받았으며 손자들도 제주도에 귀양 가서 두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러한 정황은 독살을 증명한다고 할수 있다.

소현세자 나이 34살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고 소현묘 에서 고종때 소경원 으로 격상됨.

2.제 16대 인조의 가계도

선조

├─────원종(정원군) 능양군(1596~1649) 55세로 사망

인빈 김씨 ├───── 제16대 인조(능양군) 재위기간:1623.3~1649.5 26년 2개월

인헌왕후 구씨 │ 부인: 3명 자녀: 6남1녀

┌ ─ ────── ┘

│ ┌───소현세자

인렬왕후 한씨 ─ ──────┼───제17대 효종(봉림대군)

│ ├───인평대군

장렬왕후 조씨(자식없음) └───용성대군

│ ┌───승선군

귀인 조씨 (폐출) ── ── ┼─── 익선군

└───효명옹주

3.인조시대 정치상황

-인조반정 1623년

1623년 3월12일 인빈 김씨 소생 능양군은 반정명분으로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하고 과도한 토목 공사를 벌이고 두마음을 품어 오랑케 에게 항복하는 등을 내세워 광해군을 무력으로 축출한 후 실리주의 중립외교로 국제정세 변화에 무사하게 지낼 수 있엇으나 서인과 인조는 친명사대주의 와 청나라를 배척하는 외교로 노선을 변경하면서 조선의 수난을 초래함.

-이괄의난 1624년

반정공신인 이괄이 역모 누명을 쓰자 북방의 군을 동원 19일 만에 한양을 점령 하였으나 3일 천하로 끝났으며 이로 인해 국력이 크게 약화됨.

-정묘호란 1627년

후금은 이괄의 난으로 쇠약해진 조선에 형제의 관계를 맺게 하는등 5가지 요구를 수용하게 하고 화친 함.

-병자호란 1636년

청나라와 형제관계를 폐하고 군신의 관계로 격하 공물을 바치고 명나라를 정벌할 군사 3만명을 요구하자 항전 45일 만에 남한산성에서 나와 선조는 무릅을 끓고 절하며 삼전도에서 청태종 에게 항복하고 청나라에 군신의 예를 다하며 청 태종의 송덕비를 세워야하고 척화파는 사형을 당했으며 청나라의 7항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게 되었다.

-세자 귀국 1645년

정두헌등과 볼모에서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서적 천주교 서적과 서양역법을 가저와 새로운 문화 형성에 기여함.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음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성리 학자를 배출 하였으나 현종 숙종 때에 효종과 조대비(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복상기간을 두고 이들은 예송 논쟁을 만들어 서인과 남인 간에 정권다툼의 파란을 일으킴.

4.부자간의 이념 갈등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친명 사대주의이며 그것으로 광해군을 몰아냈으나 삼전도에서 당한 치욕으로 청에 대한 원한이 깊어 국제정세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였다.

-심양에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부당한 요구를 담판 하는 등 세자가 외교수완을 발휘하자 친정행위로 규정 친명 반정세력과 인조는 반감을 갖게 됨.

-봉림대군은 형을 보호하고 청의내부사정을 파악 본국에 정보를 제공 하는 등 반청 친명사대주의자로 굳어지면서 아버지의 신임을 받음.

-인조가 총애하든 귀인 조씨와 볼모지에서 장사에 밝았던 세자빈과 불화가 관계를 더욱 악화시킴.

-1645년 8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 하였으나 2달 뒤에 와병 3일 만에 죽고 시신은 까맣게 변하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함.

5.인조시대 세계사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서서히 몰락하고 청나라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서구와의 교역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일본문화와 서구문화의 접목이 시도 되고 있는 시기였다.

또한 인도의 무굴제국의 힘이 약화되고 영국의 침탈이 가속화 되었다. 유럽은 30년 종교전쟁시대를 끝냈으며,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증대 시키고 아메리카에 도시를 건설하고 뉴질랜드 등 남태평양을 지역을 침략하였으며, 또 이시기에는 데카르트의『방법서설』, 흡스의『시민론』, 밀턴의『언론자유』, 갈릴레이『천문대화』, 뒤마 피스의『춘희』등이 저작 되었고 파스칼은 유체압력에 대한 “파스칼의 법칙”을 발견했다.

참고 예송(禮訟)논쟁 의 전개과정

가. 제18대 현종 가계도

효종 33세로 사망 (1641~1674)

├──────제18대 현종 재위기간 : 1659.5~1674.8)15년3개월

인선왕후 │ 부인: 1명 자녀 1남 3녀

│ ┌───제19대 숙종

명성황후 김씨─────┼───명성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나. 1차 예송논쟁 조대비(인조계비 장렬왕후) 복상기간 적용 문제

-왕실의 전례문제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 문제 였다. 또한 왕위계승 원칙인 종법의 이해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단순한 학문적 논쟁 같으나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문제로 당시 선비에게는 목숨을 거는 중대 사안임.

-소현세자 사후 왕위계승 원칙

인조는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자 세손이 아닌 둘째 아들인 봉림 대군으로 왕위를 잇게한다.

당시 왕위 계승법에 따르면 소현세자 첫째 아들인 첫재 아들(석철)이 왕위를 계승하여야 하나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오감으로 이법을 어겼으며 효종이 재위10년 만에 죽자 조대비의 복상기간이 문제됨.

-주자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죽었을 때 장자는 3년상, 차자 이하의 아들은 기년상(만1년상)을 치러야 합당하나 서인과 남인의 해석이 달랐다.

-서인의 해석(송시열 송준길 등)

효종은 둘째 아들이고 조대비는 어머니로 신하가 아니며 비록왕위를 계승하 였어도 적자

이지만 장자가 아님으로 기년상 주장함.

-남인의 주장 (허적, 윤선도, 소북계 윤휴 등)

효종이 둘째 아들이나 왕위를 계승하였음으로 장자로 대우하여 3년 상을 주장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임.

-종법주의 문제점

송시열의 주장대로면 종법에 따라야 한다면 원래 왕위를 효종이 아닌 소현세자의 아들이 계승해야하는 위험성이 있어 남인의 윤선도는 논리상의 오류를 지적 복상문제로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공격하였으나 서인에 대한 모함이라는 탄핵으로 윤선도는 귀양 조치되고 소현세자 셋째아들 석견도 죽자 1차 예송논쟁은 일단락 됨.

다. 2차 예송논쟁 조대비(효종비 인선왕후) 복상기간 적용 문제

-1674년 정월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복상기간 문제와 현종이 그해 8월에 죽자 그때까지도 인선왕후의 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다시 복상문제가 거론됨.

가례에 따르면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면 기년상(1년) 차자부로 보면 대공 상(9개월) 국조오례는 큰며느리든 작은 며느리이든 모두 기년 상에 해당함.

-서인의 해석(송시열 송준길 등)

1차 예송 때와 같이 효종을 차자로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공 설(9개월)을 주장함

-남인의 해석

효종이 왕위계승권자로 장자부가 되어 기년 상(1년)을 주장함.

- 서인의 내부갈등에 의한 당의 양분 사태

서인으로서 제1차 예송 때는 송시열의 주장에 동조한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가 남인과 결탁하여 현종은 장자부 기년설을 주장하는 남인편을 들어주고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확정되어 조정은 제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의 힘이 커졌으나 효종비가 죽은 그해에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들고 나오게 되고 숙종은 송시열을 유배시킴으로서 서인 세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송시열이 유배되자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의 차자 기년설의 정당성을 유생들이 주장 구명운동을 벌이자 이번에는 남인 세력에 밀려 김석주 등은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다시 서인과 결탁 허적, 윤휴 등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는 경신대출척으로 예송은 일단락 되고 숙종은 다시는 예송을 거론 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다.

라. 예송(禮訟) 논쟁의 종결

- 단순한 복상의 논쟁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을 매개로 한 일대 政爭 이었으며 17세기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로서 다스리는 이상 국가 실현 방법을 둘러싼 성리학 이념 논쟁으로 조선 후기 가장 이상적 정치 형태였던 붕당 정치를 대표하는 정치 사건으로, 이후 숙종은 다시는 예론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박영규 저 한권으로 읽는 조선 왕조 실록 웅진 지식하우스 발행

이현희 엮음 이야기 한국사 청아출판사 발행

 

 

 

'역사·정치·경제·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각 지방 명칭  (0) 2011.10.21
미주 동문 초청행사  (0) 2011.10.20
조선왕조 계보  (0) 2011.10.04
고구려 유적지 탐사  (0) 2011.10.01
4대강 그후  (0) 2011.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