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교법의 전수에 대하여 혜능스님은 과거 칠불(석가세존이 제7대) 및 달마대사(제35대)를 거쳐
육조 혜능대사(제40대)에 이르렀다고 단경에서 밝혔다.
돈교법이 중요한 이유는 일체의 중생이 자신의 마음만 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위대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석가세존이 2,6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이 이 우주에서 가장 존귀하고 자기 자신이 바로
부처님 이라고 가르쳤지만 세월이 흘러 이러한 믿음이 쇠퇴해 가는 시기에 다시금 중국에서 달마의
예견대로 다섯 번째 꽃으로 피어나 무수한 열매를 맺은 육조 혜능대사의 위대함에 감사를 드린다.
인터넷 다음 블로그 <느린걸음 //blog.daum.net/1024511/4227102>에서 원문은 copy를 하였다.
그러나 내 나름 일부분을 발췌하였다.
“진여는 생각의 본체[體]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用]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이 글귀에 문득 느끼면 어찌 깨달음이 멀다고 하리오. 우리의 자성은 허공과 같아서
<생각하는 허공임>을 느끼면 물들래야 물들 수 없어서 항상 청정함이다.
육조스님의 “모든 만법이 내가 있어 존재한다.”는 말씀과, 백봉 김기추 거사님의
“살아도 내가 살고 죽어도 내가 죽는다.”는 말씀처럼 지금 당장의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마음이
자신의 본래면목임을 알아야 한다. 밖에서 부처를 구하지 말지이다.
-------------------------------------------------------------------
1.서언(序言)
혜능(慧能)대사(638-713)가 대범사(大梵寺) 강당의 높은 법좌(法座)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시니, 그 때 법좌 아래에는 스님·비구니·
도교인(道敎人)·속인 등, 일 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韶州) 자사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儒家)의 선비 몇몇 사람들이 대사(大師)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摩訶般若波羅蜜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하였고, 자사는 이윽고 문인 법해(法海)로 하여금 설법 내용을 모아 기록하게 하였으며, 후대에 널리 행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함께 이 종지(宗旨)를 이어받아서 서로서로 전수케 한지라, 의지하여 믿는 바가 있어서 이에 받들어 이어받게 하기 위하여 이 <단경(壇經)>을 설하였다
2.정혜(定慧)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3.일행삼매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淨名經)-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直心是道場直心是淨土]'라고 하였느니라.
4.무념, 무상, 무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
[無相]으로 본체(體)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없다" 함은 두 모양[二相]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眞如)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體]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用]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유마경(維摩經)>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
5.좌선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
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니라.
6.선정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7.삼신불(三身佛)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지음[自修自作]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스스로 행함[自行]이 부처님의 행위[佛行]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 이니라[自作自成佛道]."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밝아 사무쳐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法身)이라
이름 하느니라.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空寂]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곧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自性)의 화신(化身)이라 하느니라.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 하여
보신(報身)이라고 하느니라.
8.마하반야바라밀
마하(摩訶)란 큰 것이다. 마음의 한량이 넓고 커서 허공(虛空)과 같으나 빈 마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 곧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느니라.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一月星辰)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自性)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자성이 만법(萬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큰 실행[摩訶行]이니라.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般若行)이라고 하느니라. 반야는 형상(形像)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此岸)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억덕(彼岸)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卽煩惱是菩提],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이니라.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로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五陰)의 번뇌와 진로(塵勞)를 쳐부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 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成佛)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定)과 혜(慧)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정·혜(戒定惠)로 삼느니라.
곧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나니,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9.내가 있어 일체가 존재
"모든 경서(經書) 및 문자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과 십이부(十二部)의 경전이 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나니, 지혜(智慧)의 성품에 연유(緣由)한 까닭으로 능히 세운 것이니라. 만약 내가 없다면 지혜 있는 사람과 모든 만법(萬法)이 본래(本來) 없을 것이다[無].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요, 일체 경서가 사람으로 말미암아 '있음'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10.무념법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六賊)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나가게 하나 육진(六塵)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인 무념행(無念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邊見)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頓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11.복과 공덕
절을 짓고 보시(布施)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고 복밭(福田)에 있지 않으니라.
자기의 법성(法性)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見性)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고 곧음이 곧 덕(德)이니라.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內見佛性 外行恭敬].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12.청정한 내 마음이 서방정토
"대중은 정신 차리고 들어라.
세상 사람의 자기 색신(色身)은 성(城)이요 눈·귀·코·혀·몸(眼耳鼻舌身)은 곧 성의 문(門)이니
밖으로 다섯 문이 있고 안으로 뜻(意)의 문이 있다. 마음은 곧 땅이요 성품은 곧 왕이니,
성품이 있으면 왕이 있고, 성품이 가매 왕은 없느니라. 성품이 있으매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매 몸과 마음이 무너지느니라.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佛是自性作], 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
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다.
자비(慈悲)는 곧 관음(觀音)이요 희사(喜捨)는 세지(勢至)라고 부르며,
능히 깨끗함은 석가(釋迦)요 평등하고 곧음은 미륵(彌勒)이니라.
인아상(人我相)은 수미요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랑(波浪)이요, 독한 마음은
악한용이며, 진로(塵勞)는 고기와 자라요, 허망함은 곧 귀신이며, 삼독(三毒)은 곧 지옥이요, 어리석음은 곧 짐승이며, 십선(十善)은 천당이니라.
인아상이 없으면 수미산이 저절로 거꾸러지고 삿된 마음을 없애면 바닷물이 마르며,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없어지고 독해를 제거하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느니라.
자기 마음의 땅 위에 깨달은 성품의 부처가 큰 지혜를 놓아서 그 광명이 비추어
여섯 문[眼耳鼻舌身意]이 청정하게 되고 욕계(欲界)의 모든 여섯 하늘[六天]들을 비추어
부수고, 아래로 비추어 삼독을 제거하면 지옥(地獄)이 일시에 사라지라고 안팎으로 사무쳐 밝으면
서쪽 나라[西方靜土]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닦지 아니하고 어찌 피안(彼岸)에 이르겠는가."
13.계정혜
"너는 나의 말을 듣고서 나의 소견을 보라. 마음의 땅[心地]에 그릇됨이 없는 것(無非)이
자성의 계(戒)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無亂]이 자성의 정(定)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無癡]이 자성의 혜(惠)이니라."
14.법화경의 일승법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의 근기(根氣)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승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 불승(佛乘)뿐이라'고 하셨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空寂]하여 삿된 견해를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리라.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兩邊)을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相]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空)에 집착한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난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15.소승, 중승, 대승, 최상승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나누어 법에 사승(四乘)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욈은 소승(小乘)이요, 법을 깨쳐 뜻을 앎은 중승(中乘)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은 대승(大乘)이요 일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고 일만 가지 행을 갖추어 일체를 떠남이 없으되
오직 법의 모양을 떠나고 짓되, 얻은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最上乘)이니라.
승(乘)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16.삼십육대법
생각을 하면 곧 식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진을 본다.
이것이 삼육은 십팔이니라(3*6=18).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 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 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요,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이니라.
작용은 무엇들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對法)으로 말미암느니라.
유정·무정의 대법인 어(語)·언(言)과 법(法)·상(相)에 열 두 가지 대법이 있고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데 열 아홉 가지의 대법이 있어서
모두 서른 여섯 가지 대법을 이루니라. 이 삼십육 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하고 출입에
곧 양변을 떠난다.
어떻게 자성이 기용하는가?
삼십육 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 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相離相),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에서 공을 떠난다(空離空).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써 변화하여 어둡고, 어둠으로써 밝음이 나타나나니 오고 감이 서로 인연한 것이다. 삼십육 대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17.자성진불해탈송, 열반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문인들은 잘 있거라.
내가 게송 하나를 남기리니 '자성진불해탈송(自性眞佛解脫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뒷세상에 미혹한 사람이 이 게송의 뜻을 들으면 곧 자기의 마음, 자기 성품의 참 부처를
보리라. 너희에게 이 게송을 주면서 내 너희와 작별하리라."
게송(偈頌)을 말씀하셨다.
진여(眞如)의 깨끗한 성품(淨性)이 참 부처(眞佛)요
삿된 견해의 삼독(三毒)이 곧 참 마군(魔軍)이니라.
삿된 생각 가진 사람은 마군이가 집에 있고,
바른 생각 가진 사람은 부처가 곧 찾아오는도다.
성품 가운데서 삿된 생각인 삼독(三毒)이 나나니,
곧 마왕(魔王)이 와서 집에 살고
바른 생각이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면
마군이 변하여 부처되나니, 참되어 거짓이 없도다.
화신(化身)과 보신(報身)과 정신(淨身)이여,
세 몸이 원래로 한 몸이니
만약 자신에게서 스스로 보는 것을 얻는다면
곧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한 씨앗이니라.
본래 화신으로부터 깨끗한 성품 나는지라.
깨끗한 성품은 항상 화신 속에 있고
성품이 화신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행하게 하면
장차 원만하여 참됨이 다 함 없도다.
음욕(淫慾)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이니,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다.
다만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五慾]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성품을 보나니, 그것이 곧 참[眞我]이로다.
만약 금생에 돈교(頓敎)의 법문을 깨치면
곧 눈앞에 세존(世尊)을 보려니와
만약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고 할진대는
어느 곳에서 참됨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도다.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 있다면
그 참됨 있음이 곧 성불(成佛)하는 씨앗이니라.
스스로 참됨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부처를 찾으면,
가서 찾음이 모두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돈교의 법문을 이제 남겼나니
세상 사람을 구제하고 모름지기 스스로 닦으라.
이제 세간(世間)의 도를 배우는 이에게 알리노니,
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크게 부질없으리로다.
대사께서 게송(偈頌)을 말씀해 마치시고 드디어 문인들에게 알리셨다.
"너희들은 잘 있거라.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세상의 인정(人情)으로 슬피 울거나, 사람들의 조문과 돈과 비단을 받지 말며,
상복을 입지 말라. 성인의 법이 아니며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내가 살아 있던 날과 한가지로 일시에 단정히 앉아서 움직임[動]도 없고 고요함[靜]도 없으며,
남[生]도 없고 없어짐[滅]도 없으며, 감[去]도 없고 옴[來]도 없으며, 옳음[眞]도 없고
그름[詐]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어서 탄연히 적정(寂靜)하면 이것이 큰 도(道)이니라.
내가 떠난 뒤에 오직 법(法)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던 날과 한가지일 것이나,
내가 만약 세상에 있더라도 너희가 가르치는 법을 어기면 내가 있은들 이익이 없느니라."
대사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밤 삼경에 이르러 문득 돌아가시니, 대사의 세수(世壽)는
일흔 여섯이었다.
18.후기(後記)
이 <단경(壇經)>은 상좌인 법해(法海)스님이 모은 것이다.
법해스님이 돌아가니 같이 배운 도제(道締)스님에게 부촉하였고,
도제스님이 돌아가니 문인 오진(悟眞) 스님에게 부촉하였는데,
오진스님은 영남 조계산 법흥사에서 지금 이 법을 전수하니라.
만약 이 법을 부촉 할 진대는 모름지기 상근기의 지혜라야 하며, 마음으로 불법을 믿어 큰 자비를
세우고 이 경을 지니고 읽어 의지를 삼아 이어받아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종교·사상·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금강선원 사찰순례_2009 (0) | 2009.12.17 |
---|---|
臨死 체험 14단계 /죽음의 의미 (0) | 2009.12.17 |
통일교 이야기 (0) | 2009.11.23 |
[스크랩] 추졸산 위봉사(완주) (0) | 2009.11.20 |
용주사 (0) | 2009.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