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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碧空 2009. 7. 16. 17:41

:: 경주김씨(慶州金氏) ::
 
▣ 유래
  경주김씨는 신라 왕실의 삼성(박,석,김) 가운데 하나다. 시조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왕(신라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경주김씨는 경순왕의 아들 9형제 중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 : 영분공파)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 : 대안군파)을 1세조로 하는 계통이 대표적이며, 조상에 대한 계통은 확실하지 않으나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는 김장유(金將有 : 판도판서공파), 김인관(金仁琯 : 태사공파), 김순웅(金順雄 : 대장군공파)을 1세조로 하는 계통 등 크게 5파로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 개의 지파(支派)가 생겨났다.
그후 후손들이 번성함에 따라 현달한 인물이나 살고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분관되어 나갔다.
 
▣ 인물
  영분공파 파조인 김명종은 경순왕이 나라를 빼앗긴 후 고려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세손 김의진(金義珍)은 유학(儒學)의 종주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12세손 김인경(金仁鏡)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으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시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김명종의 6세손 김예겸(金禮謙)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김예겸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고려 사학(私學)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 문종 때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하고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김의진의 증손자 김영고(金永固)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김영고의 아들 김인경(金仁鏡)은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종 때 조충(趙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대안군파 파조인 김은열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을 거쳐 대안군에 봉군되고 그의 후손들이 여러 본관으로 분관되었다.
김은열의 8세손 김봉모(金鳳毛)는 외국어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 :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 벼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 일에는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보았다.
김봉모의 아들 김태서(金台瑞)는 고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특히 그의 아들 김약선(金若先 : 공부시랑), 김기손(金起孫 : 평장사), 김경손(金慶孫 : 추밀원 부사) 3형제가 유명했다.

판도판서공파 파조 김장유는 고려말에 정국이 혼란하자 충청도 보은 땅에 은둔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장유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 김효정(金孝貞)의 아들인 조선 중종 때의 명신 김정(金淨)이 뛰어났다. 그는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 때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서른 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나가 있을때 그의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 이항(李沆)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 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 찍었으며 우정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서 하명하는 듯한 글투였다. 이에 김정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를 써 넣었다.
"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 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여 편지 쓸 즈음에 옛 벗 생각
을 했는가."
이 시에 앙심을 품은 이항은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정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다. 그외에도 그가 제주도로 귀양가다가 해남 바닷가 노송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약을 받을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

태사공파 파조 김인관은 고려 예종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다.
김인관의 9세손 김자수(金自粹)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안동에 은둔하였다.
그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김세필(世弼)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옥중에서 입던 피묻은 옷을 가지고 나와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화를 당하여도 오히려 위에 성군(聖君)이 계셨기 때문에 다행히 살게 되었지만, 지금 임금께서는 나이가 겨우 십여 살이고 간신들이 꼭 너를 죽이려 하니, 네가 어찌 죽음을 면할 것이냐"하였다.
한편 김자수(金自粹)의 9세손 김홍익(金弘翼)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하였고, 아우 김홍욱(金弘郁)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 때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김홍욱의 손자 김흥경(金興慶)은 영조 때의 상신(相臣)이었고,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은 영조 때의 부마(駙馬 :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참찬(參贊) 이주의 손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학문에 있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書藝)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켜 특히 예서와 행서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호장(戶長) 위영(魏英)의 증손 김부필(金富弼), 김부일(金富佾 : 수태위를 역임), 김부식(金富軾), 김부의(金富儀 : 지추밀원사를 역임)가 유명했다.
고려 문종과 의종대에 걸쳐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유명한 김부식(金富軾)은 인종이 즉위하자 왕실외척임을 빙자하여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李資謙)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게 하였고,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1145년(고려 인종 23년) 왕명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여 바치는 등 이름난 문장가(文章家)로 송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대장군파 파조 김순웅은 고려 초에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병판공파 파조 김덕재(金德載)는 김은열의 12세손으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보좌공신(補佐功臣)에 책록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함경도 정평에서 은둔하였다.

장사랑공파 파조 김존일(金存一)은 김은열의 16세손으로 고려말에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이렇게 역사를 수놓은 경주김씨는 한말에 와서도 그 가통을 이어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고종 때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김영작(金永爵)의 아들 김홍집(金弘集)은 한말 외세와 개화의 틈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인물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정집(金鼎集)의 아들 김창희(金昌熙)는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으며, 김철희(金喆熙)는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재직중 1885년(고종 22년) 황해도 토산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여 승녕부 종장(承寧府從長)을 지낸 김춘희(金春熙)와 자산으로 도서관을 설립한 김인정(金仁貞), 중국 원세개(袁世凱 :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옥새를 새겼던 서예고문 김태석(金台錫),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한 김영제(金寧濟), 청성곡(淸聲曲)의 명수 김계선(金桂善)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김용원(金庸源)과 김도태(金道泰)는 조국의 자유수호와 광복을 위하여 몸바쳤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천령(金千齡, 1469 己丑生) : 문과(文科) 연산군2년(149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정(金淨, 1486 丙午生) : 문과(文科) 중종2년(1507)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만균(金萬鈞, 1486 丙午生) : 문과(文科) 중종23년(1528)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경원(金慶元, 1528 戊子生) : 문과(文科) 명종8년(1553)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종일(金宗一, 1597 丁酉生) : 문과(文科) 인조3년(1625)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노영(金魯永, 1747 丁卯生) : 문과(文科) 영조50년(1774)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영삼(金永三,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헌종5년(1839)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작(金綽,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태종14년(1414) 식년시 을과(乙科)
 김구(金鉤,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태종16년(1416) 친시 을과(乙科)
 김미(金楣,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예종1년(1469) 추장시 을과(乙科)
등 모두 1218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203명, 무과 277명, 사마시 542명, 역과 82명, 의과 36명, 음양과 34명, 율과 6명, 주학 38명)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김씨는
1985년에는 총 361,189가구 1,523,469명,
2000년에는 총 542,018가구 1,736,79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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