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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왕릉 가는 길 - 연재를 시작하면서

碧空 2009. 6. 23. 12:58

안녕하십니까?

'신라왕릉 가는 길' 연재를 시작하면서 먼저 인사드립니다.

계림 정찬두라고 합니다.

산내음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앞으로 신라왕릉을 답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산라왕릉은 당대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의 총체적 양상이 반영되어 있는 조영물입니다.

따라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신라왕릉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곧 신라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왕릉에 대한 연구는 충분치 못하여

그 성과 역시 아직 만족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약 50여회에 걸쳐서 신라왕릉이 보여준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경주지역의 전칭왕릉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경주일원에는 992년동안 신라를 경영한 56왕 가운데 제51대 진성여왕과 제56대 경순왕을 제외한

나머지 54왕과 많은 수의 왕비능이 상정되나,

현재는 36기의 전칭왕릉과 유일하게 시조비인 알영의 능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보다 다수였을 왕족과 귀족의 묘는 9기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가 고려에 귀부하던 935년 이전까지 대부분의 능묘는

실전되지 않은 상태로 왕실과 후손들에 의해 보호 및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가 개경을 중심으로 건국하게 되자

신라 왕도로 유지되던 경주는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경순왕과 군신은 물론, 그동안 신라 왕경을 지탱하여왔던 정치경제적 배경 등이 개경으로 이동함에 따라

경주지역은 그야말로 모든 분야에서 공황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통일신라의 왕족과 관련된 건물,

17만 8천 9백 36호로 상징되던 왕경인들의 경제적 지원아래 운영된 수많은 사찰,

왕릉 및 귀족들의 묘 등은 일시에 관리부재 상태에 놓이게 되어 자연스럽게 퇴락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신라의 능묘는 능비나 묘비의 불비로 인하여 대부분 전승과정을 지키지 못하여

조선전기까지 많은 신라 능묘 가운데 왕릉 11기와 김유신묘 1기만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고려시대 500년 동안 신라의 능묘는 관리부재 상태를 면치 못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인 18세기에 이르러 왕릉 20기와 김후직묘가 추가로 지정됩니다.

이어 19세기 이후 다시 왕릉 5기와 묘 7기로 12기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새로운 능묘의 증가가 문헌상의 고증이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게시판에서의 신라왕릉 답사는

신라왕릉이 지니고 있는 문헌상 또는 고고학적인 문제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으로 주 1회 정도로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능으로 전하는 오릉부터 답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림 정찬두 올림

출처 : 한국전통문화진흥원
글쓴이 : 계림 정찬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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