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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친필 서한에 얽힌 이야기들

碧空 2009. 2. 16. 11:40

‘생각없는 늙은이’의 반격 - 정조 독살설에 대한

 
정조(正祖)가 신하에게 은밀히 보낸 서찰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화제만발입니다. 불에 태워라, 찢어버려라, 세초(洗草)하라는 분부를 거역한 ‘생각없는 늙은이’ 덕에 왕의 친필 편지들이 2백여 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됐으니 흥미로운 일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짓입니다. 기껏 복기하듯 다 죽은 바둑돌을 다시 놓아 볼 따름이지요. 그러나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추측은 어디서나 활발합니다. 확연치 않은 역사의 앞과 뒤, 빈틈을 채워가는 작업이니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럴싸하게 맞춰나가던 추측들이 예기치 않은 돌발사건에 의해 어이없이 빗나갈 때입니다. 정조의 독살설이 바로 그런 경우를 맞고 있습니다. 기울어져가는 이씨 왕조를 일으켜 보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사실상 마지막 왕의 일이기에 세간의 관심도 무척 높습니다.

사실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어버이라고 허풍스레 말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정보에 가장 어두운 것이 왕이요, 제 몸 하나 지키기 쉽지 않은 게 황제입니다. 구중궁궐에 갇혔으니 세상 민심을 헤아리기 어렵고 내부에서 앙심을 품은 적에겐 더욱 속수무책입니다.

고대 로마는 왕정으로 시작돼 공화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 사후 그 후광을 입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정이 시작됩니다. 절대 권력을 쥔 로마 황제, 놀랍게도 그들 가운데 천수를 누린 경우는 반이 될까 말까합니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의 「로마사」에 의하면) 아우구스투수의 의붓아들로 3대 황제에 오른 갈리쿠스는 원로원을 능욕하고 누이와 혼음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친위대에 피살됐습니다. 갈리쿠스 제거에 앞장섰던 4대 클라우디우스 역시 재위 중 돌연사해서 피살 의혹이 일었습니다. 대화재와 그리스도교 박해로 유명한 5대 네로도 방탕과 향락에 젖어 파멸합니다. 궁중으로 난입한 성난 시민들에 쫓기던 그는 자결할 용기조차 없어 근위병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6대 갈바 피살, 7대 오토 자살, 8대 비텔리우스 피살, 11대 도미티아누스 피살...이렇게 해서 로마는 동서로 쪼개질 때까지 40여명의 황제들 중 절반 이상이 비명에 갔습니다.

베이징의 9,999칸짜리 황궁 자금성 앞뜰에는 나무를 못 심게 했다고 합니다.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쉬 감시하기 위해섭니다. 내부에는 거세한 내시와 여인들만을 두었습니다. 모두가 황제의 생명 보전을 위한 조처입니다. 그러다가 황명을 사칭한 환관들이 전횡을 일삼고 득세한 여인들이 나라살림을 거덜내곤 했습니다. 안전할 줄만 알았던 황제도 암살 위협 속에 떨고 지내야 했습니다. 웬만큼 똑똑하고 강단 있기 전에는 황제 노릇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참담한 광경을 보아야 했던 정조는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한 능행(陵幸)을 구실로 100회씩이나 궁 밖을 행차하며 그래도 나라 사정을 알뜰히 챙긴 편입니다. 지극한 효성, 백성에 대한 관심, 학문에 대한 열정, 제도 개혁의 의지 등 재위 24년 동안의 행적을 보면 조선 왕조에서 몇 안 되는 현군(賢君)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골수에 든 병처럼 깊어진 당파 싸움과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소인배들의 저항에 왕이라도 제 뜻을 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래저래 척을 진 인사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실록이나 승정원일지 등 공식 기록으로 보아서는 돌연했던 그의 죽음이 독살의 의혹과 추측의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독살설은 최근 소설과 영화, TV 드라마 등에 의해 증폭되며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판에 뜻밖에도 독살의 주모자쯤으로만 생각되어온 신하와 정조가 죽기 직전까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연서(戀書)처럼 편지를 주고받았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정조의 개혁정책을 가로막고 왕의 제거에 앞장선 줄만 알았던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沈煥之)가 알고 보니 가장 은밀하고도 믿음직한 조력자였던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심환지 자신의 진정이 아니라 정조의 어찰(御札)로. 정조가 ‘생각없는 늙은이’라고 타박하며 그렇게나 없애라고 신신당부했던 편지로 심환지는 결국 정조 독살설을 뒤엎는 사고를 친 셈입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나 「레미제라블」같은 픽션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극적인 반전이 아닙니까.

왕은 주변 신하들 가운데 더러 ‘호로자식(胡種子)’이라느니, ‘사람꼴을 갖추지 못했다’고 흉을 보기도 하고 ‘욕 한 사발(一鉢辱說)’, ‘마누라장의(抹樓下長衣)’ 등 우스개도 서슴지 않아 편지를 받은 신하에게 친근감을 보입니다. 혹자는 그런 글귀로 보아 정조가 도덕군자는 아닌 것 같다고 재미있어합니다. 그러나 군신관계라 해도 사신에 굳이 왕의 체통을 고집하지 않은 데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정조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일을 사전에 가장 반대편에 선 신하에게 은밀히 제안토록 사인을 보냅니다. 그렇게 해서 반대의지도 꺾고 협력에 대한 보상도 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입니다. 정조 어찰을 계기로 우리 정가에서는 반대파를 다독여주고 협상하는 정조와 같은 통 큰 정치가 아쉽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러나 역시 세간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독살설인가 봅니다. 지난 9일 정조 어찰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된 자리에서 취재진이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 독살설의 진위였습니다. 원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질문에 난처해했다지만 연구자들은 “적어도 이번 어찰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독살설이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답변했답니다.

독살설을 처음부터 부정해온 사람들에겐 크게 환영할 답변입니다. 그러나 소설이나 대중적인 역사서를 통해 정조의 독살설을 제기해온 이들은 완전히 수긍하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단지 은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해서 가까운 사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겁니다.

한쪽은 정조와 가장 심각하게 대립하던, 그래서 독살 의혹의 주역으로 추측되던 인물이 사실은 왕이 죽기 전까지 흉금을 털어놓고 국사를 논하던 충복이었다고 해석합니다. 다른 한쪽은 그런 신하에게 정조가 속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번 정조의 어찰이 모든 의혹을 일소하는 ‘독살설 논란’의 완결편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된 편지들은 독살설에도, 그 반대 견해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며 역사에 대한 추측을 더욱 흥미롭게 합니다.

조심스러운 건 역사의 추측에 기반해 단정 짓듯 쓰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오해입니다. 발상을 뒤엎는 추측이나 해석이니만큼 더 센세이셔널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 ‘정조는 독살되었다’, ‘신윤복은 남장여자다’, ‘이순신과 원균은 어릴 적 친구다’ 라는 허구가 역사적 사실로 잘못 인식될 우려가 큰 것입니다.

역사소설이 작가적 정신에 의한 연구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흥미거리로 만들어진다면 같은 역사를 공유한 사람들에게 너무 무책임한 해악이요 독이 될 것입니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의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해서도 근거가 희박한 지나친 억측과 허구는 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