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마지막 금속활자, 정리자(整理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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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마지막 금속활자, 정리자(整理字) |
지금의 생생자와 정리자는 모양이 고르고 반듯하며 나무로 새기거나 금속으로 주조한 것이 정교하여 이전의 위부인자나 한구자와 비교할 때 종이를 물에 축여서 활자 면에 밀착시켜야 하는 불편함과 글자가 비뚤거나 흔들리게 인쇄될 염려가 없다. 인쇄가 간편하고 빠르며 비용과 인력을 줄일 수 있어 그 효율이 중국의 취진판식(聚珍板式)보다 더 나은 편이니, 실로 책을 간행한 이래로 보지 못한 새로운 비법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그것은 글자체가 너무 모나서 부드러운 느낌이 없다는 점이다. 今之生生字整理字, 均齊方正, 刻鑄精工, 視衛夫人韓構諸字, 無濕紙墊排攲斜挑動之患. 擺印𥳑捿, 省費省勞, 比之中國聚珍之式, 反復勝之, 誠刊書以來不發之祕, 悉萃于玆, 而但其字體圭角太露, 頗失圓厚之意, 爲可欠耳.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65 일득록(日得錄) 문학(文學)》 |
1795년 을묘년(乙卯年) 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한 후 화성의 행궁으로 돌아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치렀다. 이 행사를 위해 화성에 정리소(整理所)란 기구를 설치하여 원행(園幸), 즉 현륭원의 행차와 혜경궁의 회갑 잔치에 필요한 사전의 준비와 당일의 의식을 관장하게 하였다. 당시 8일간의 일정을 의궤(儀軌)로 기록한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다. 정조는 이를 인쇄하기 위해 금속활자를 주조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인쇄한 이 책의 이름을 따서 ‘정리자(整理字)’라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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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을묘정리의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보다 앞서 중국에서는 건륭제의 지시에 따라 대규모의 사고전서 편찬사업을 진행함과 아울러 목활자 25만여 자를 제작하여 명나라 때 편찬한 영락대전(永樂大典)에 수록된 주요 문헌들을 무영전(武英殿)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건륭제는 이 목활자본에 ‘활자판’이란 말을 쓰는 것이 우아하지 않다 하여 보배를 모아놓았다는 의미로 ‘취진판(聚珍版)’이란 이름을 하사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이 판본을 ‘무영전취진판서(武英殿聚珍版書)’라 불렀다.
정리자의 자본(字本)으로 사용된 생생자는 이 취진판으로 인쇄한 《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꼴을 사용하여 1792년에 회양목으로 제작한 목활자로 글자체가 넓적하고 딱딱한 인쇄체 모양을 갖추고 있다. 정조는 정리자의 뛰어난 인쇄기술에는 아주 만족했지만 글꼴의 디자인 측면에서는 기존의 부드러운 필기체와 달리 딱딱한 느낌의 인쇄체에 다소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정리자의 주조는 규장각 직제학 이만수(李晩秀)와 규장각 원임 직각 윤행임(尹行恁)이 감독을 맡았다. 1795년 11월 2일에 다섯 개의 도가니를 갖추고 시작한 공역은 이듬해 3월 16일에 큰 활자 16만 자와 작은 활자 14만 자 도합 30만 자를 주조하였다. 여기에는 유철(鍮鐵, 놋쇠) 1,400근, 주철(鑄鐵, 무쇠) 600근, 유납(鍮鑞, 아연) 250근이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정조 14년(1790)에 규장각에 보관된 낡은 활자를 보주(補鑄)하기 위해 일본산 왜동(倭銅) 1,300근과 유철 300근이 들어갔는데, 그때 사용된 재료와 비교하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정리자가 기존의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처럼 구리를 주재료로 만든 동활자가 아니라 유철과 주철의 합금으로 만든 철활자이기 때문이다.
이 정리자는 정조 때 만든 마지막 활자로서 주조와 조판의 기술적 측면에서 과거에 주조된 활자들과는 몇 가지 차별화된 점을 가지고 있다. 정조는 위부인자(衛夫人字)로도 불리는 왕희지체의 임진자(1772)와 정유자(1777) 그리고 숙종대 명필 한구(韓構)의 필체를 자본으로 주조한 한구자(1782)를 순차적으로 만들면서 이들 활자에 문제점이 있음을 파악하였다. 즉 이들 활자가 규격이 고르지 않아 인쇄를 할 때 종이를 물에 약간 축여서 활자 면에 밀착시켜야 하는 불편한 점이 있고, 또 한 판씩 인쇄를 할 때마다 별도로 몇 사람이 달라붙어 활자가 흔들렸는지 찍어 놓은 인쇄물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인쇄에 소요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리자에서는 활자의 재료를 구리에서 유철과 주철의 합금으로 바꾸고 조판할 때 활자 사이에 빈틈이 생겨 활자가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활자 몸통의 크기를 반듯하게 규격화하였다. 또한 한 글자씩 식자(植字)하는 조판법이 아니라 여러 자를 한꺼번에 식자하고 판을 해체할 때도 한꺼번에 빼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활자 재료, 활자 규격, 조판법을 동시에 개량한 것이다. 그 결과 이전 활자에 비해 조판이 훨씬 간단해지고 인쇄 속도도 빨라져서 비용이나 인력이 크게 절감되었다.
조선에서 목판본과 활자본이 동시에 발달한 반면 중국에서는 목판본이 월등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목판본은 활자본에 비해 대량 인쇄가 가능하여 독서인구가 많은 중국에 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1728년에 청나라 무영전에서 간행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구리로 만든 동활자로 인쇄되기도 했지만 이 활자는 무영전에 보관되어 오면서 일부는 관리 소홀로 도둑을 맞아 분실되고 나머지는 건륭제 초기에 통화량의 부족으로 모두 녹여서 동전을 만듦에 따라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김간(金簡, ?~1794)이란 인물에 의해 1774년에 취진판식 목활자가 만들어지게 된다.
김간은 정묘호란 때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에 귀화한 조선인의 후손으로 청나라에서 호부시랑, 공부상서, 이부상서 등의 요직을 거친 인물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 당시에는 부총재관을 맡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조선의 홍양호(洪良浩, 1724~1802), 서호수(徐浩修, 1736~1799) 등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서호수는 임진자와 정유자를 주조한 서명응의 아들이자 1782년에 한구자를 주조한 인물로서 1776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김간과 만났다. 그는 청나라를 통해 천문·수학류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문헌을 수입하여 연구, 보급하는 등 부친 서명응, 아들 서유구와 함께 정조대 학술문화를 이끈 대표적 인물이다.
정조가 자신의 치세 중 마지막으로 만든 활자인 정리자의 기술적 수준을 청나라의 활자와 비교한 것은 취진판식이 비록 목활자이기는 하지만 인쇄의 효율 면에서 당시에 조선에서 사용 중인 금속활자에 비해 뛰어났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강희자전》을 자본으로 삼아 취진판식과 똑같은 생생자란 목활자를 만들고 곧이어 같은 글꼴의 금속활자인 정리자를 주조한 것이리라.
전통시대 도서의 인쇄 방식은 목판본과 활자본으로 나뉜다. 목판본의 경우 각종 서책의 수입을 통해 중국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반면 활자본은 고려말 금속활자를 발명한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인쇄에 사용되어 태종의 계미자(1403)를 시작으로 세종의 갑인자(1434), 세조의 을해자(1455) 등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던 것이 김간이란 조선계 중국인을 통해 취진판 목활자가 만들어지고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 금속활자로는 가장 기술적 진보를 이룩한 정리자가 출현하게 된 것은 인쇄문화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중요한 사건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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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최채기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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