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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空 2024. 2. 2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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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풀리던 이병철 기운 줬다? 3대 재벌가 낳은 ‘솥바카드 발행 일시2024.01.31

 

 

부자 되는 여행① 솥바위와 이병철 생가 

설 명절이 코앞입니다. 여행도 명절을 탄답니다. 이왕이면 좋은 기운 받는 여행을 궁리하게 되지요. 신년 운세가 궁금한 계절, 일타강사가 ‘부자 되는 여행’ 특강을 준비했습니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인 세상이니 부자 되는 여행이 있다면 만류할 이유가 없겠지요.

경남 의령에 가면 신비한 전설이 깃든 바위가 있습니다. 남강 강물에 섬처럼 떠 있는 바위인데, 다리가 세 개라 하여 솥바위라 불립니다. 한자로는 솥 정(鼎) 자를 써 ‘정암(鼎巖)’이라 합니다. 이 바위에 허무맹랑한 전설 하나가 내려옵니다. 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 안에서 국부(國富) 세 명이 태어난다는 예언입니다. 다리가 세 개니까 국부도 세 명이 나온다는 얘기인데, 당최 뜬금없어 보이는 이 전설은 놀랍게도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솥바위 반경 20리 언저리에서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이 태어났습니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힌 우연입니다.

솥바위 기운을 받았다지만, 부자들의 고향은 다 다릅니다. 이병철 회장은 의령, 구인회 회장은 진주, 조홍제 회장은 함안. 행정구역은 달라도 모두 솥바위를 기준으로 20리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희한한 일입니다. 이 세 부자의 고향 이야기를 설 선물 삼아 전합니다. 이미 소문 난 곳은 하루 1000명이 넘는 인파가 찾아온다지요. ‘부자 되는 여행’ 특강은 2회로 나뉘어 진행합니다. 첫 회는 전설의 진원지 의령 솥바위와 이병철 생가가 있는 장내마을을 다루고, 2회는 LG가와 GS가의 인연이 비롯된 진주 승산마을과 함안 신창마을의 조홍제 생가를 소개합니다. 설날 아침 복조리 거는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근영 디자이너

솥바위 전설 

해 뜬 직후 정암철교에서 내려다본 솥바위와 남강 물줄기. 이 바위를 기준으로 반경 20리 안에서 국부 세 명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내려왔고, 그 전설 그대로 굴지의 대기업 창업주 세 명이 출생했다. 손민호 기자

 의령의 관문에는 지리산의 정기를 품은 남강이 역사의 숨결이 되어 흐르고 있다. 이 남강의 물속에는 솥을 닮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를 솥바위(정암)라 칭하고 마을을 정암이라 했다. 여기에 나루터가 있었는데 이를 정암진이라 한다. 이 솥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8㎞ 안에 부귀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솥바위 앞 안내판의 설명을 옮겨 적었다. 전설에 관한 설명이 너무 두루뭉실하다. 살짝 다른 버전의 전설을 보자. 조선 후기 어느 도인이 솥바위를 보고 남겼다는 예언이다. “이 바위를 기준으로 반경 20리 안에서 나라를 일으키는 큰 부자 세 명이 나올 것이니라.”

안내판에서 굳이 8㎞라고 못 박은 건, 도사님의 20리 예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0리(里)가 4㎞니까 20리가 딱 8㎞다. 부자 숫자를 세 명이라고 특정한 것도 도사님 전설에 더 솔깃하게 한다. 그러나 안내판 설명이든, 도사님 전설이든 전혀 근거가 없다. 보통 이런 유의 전설은 팔도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긴 최치원이나 원효 또는 김삿갓 같은 인물을 인용하는데, 솥바위 도인의 신원은 일절 알려진 바가 없다. 아니, 솥바위 전설에 관한 기록은 어느 역사서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냥 의령에서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 기다리듯이 오랜 세월 그렇게 믿고 살았다는 게 전설의 정체다. 혹시 후세에 끼워 맞춘 허구는 아닐까? 의령군청 강선아 관광진흥팀장이 펄쩍 뛰었다.

“정암이란 지명이 워낙 오래됐습니다. 조선 전기 기록에도 나옵니다. 부귀를 누린다는 대목은 없어도 정암의 기운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전해 옵니다. 정암이 있는 의령의 마을 이름이 정암마을이고 남강 건너편 함안의 마을 이름도 정암마을입니다. 정암은 정말 특별한 곳입니다. 의령 사람은 한 번도 전설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최대한 남강 가까이로 내려와 수면 높이에서 촬영한 솥바위. 잔잔한 남강 물결에 비친 반영이 아름답다. 강물 아래로 다리 세 개가 있다고 하는데 직접 본 사람은 없다. 손민호 기자

사실 정암이라는 이름부터 특별하다. 솥은 예로부터 고귀한 존재였다. 솥 정(鼎) 자를 쓴 정식(鼎食)이라는 단어가 있다. 귀한 사람의 식사 또는 진수성찬을 뜻한다. 밥이 만들어지는 곳이니 솥은 부귀와 영화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솥 정(鼎) 자는 고상한 무언가에게 바쳐졌다. 조선 시대 삼정승의 다른 표현이 정보(鼎輔)였고, 과거 시험에서 최우등으로 급제한 세 사람을 정갑(鼎甲)이라 불렀다. 숫자 ‘3’의 뜻을 담은 단어가 여럿인데도 상대를 높일 때는 굳이 솥에 비유했다.

그럼, 솥바위에 다리가 세 개 있다는 건 사실일까. 이 대목도 분명하지 않다. 봤다는 사람은커녕 기록도 없다. 강명희 의령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지금은 모래가 많이 쌓여 바위 밑을 확인할 수 없지만, 옛날부터 바위 밑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에 이무기가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 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솥바위 전설은 근거가 없다. 그런데도 허투루 넘기기가 어렵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 그대로 현실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경남 내륙 지역 외딴 바위 주변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창업주 세 명이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세상에는 아직도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이른바 솥바위 3대 부자가 기업가로서 명성을 날린 건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의령에서는 팔순 할머니도 솥바위 전설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의령 정암진에서 바라본 솥바위. 바위에서 언뜻 남성의 옆얼굴이 보인다. 솥바위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습을 달리한다. 손민호 기자

그래도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식의 옛날이야기를 무작정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전설의 정확도를 측정했다. 의령군청에 관련 자료가 없어 네이버 지도를 열어 솥바위와 세 명 창업주 생가의 거리를 하나씩 쟀다. 흥미롭게도 삼성 이병철 생가는 7.9㎞, 효성 조홍제 생가는 8.2㎞, LG 구인회 생가는 9.2㎞ 떨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똑 부러지게 20리 안쪽은 아니어도 20리 언저리라고 하면 맞았다.

무엇보다 솥바위는 예사롭지 않게 생겼다. 해 뜬 직후, 강물에 뜬 솥바위에선 신성한 기운마저 감돈다. 팔도강산의 어지간한 명승을 두루 유람했지만, 솥바위처럼 인상적이었던 곳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솥바위는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강변에 내려와 바라보면 강물에 띄운 배 같고, 특정한 각도에서는 남성의 옆얼굴이 보인다. 가장 솥뚜껑 같은 모습을 보려면 솥바위 오른쪽 정암철교 중간까지 나아가 내려다봐야 한다.

의령 정암루. 남강을 내려다보는 누각으로 누각 왼쪽 아래에 솥바위가 있다. 손민호 기자

의령 의병광장에 서 있는 곽재우 장군 동상. 솥바위가 있는 정암진 일대는 곽재우 장군이 처음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전승지다. 정암철교 뒤로 보이는 기와지붕이 정암루고, 정암루 뒤에 솥바위가 있다. 손민호 기자

사실 솥바위 주변 정암진은 의령이 자랑하는 유적지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곳이 여기 솥바위 나루터다. 그 전승(戰勝)의 역사를 기리고자 솥바위 옆에 백마 탄 곽재우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의령군이 솥바위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건 2022년부터다. 그해 10월 부자 축제 콘셉트의 ‘리치리치 페스티벌’을 처음 개최했다. 솥바위는 강물 속에 잠겨 있어 만질 수 없지만, 축제 때는 바위 옆으로 뜬다리를 부설해 바위를 만질 수 있게 했다. 2023년 나흘간 열린 축제엔 16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천하 명당 장내마을

호암 생가 정문 옆 흙벽에 설치된 금속 명패. 글자를 새긴 명패 주변이 색이 바랬고 반질반질하다. 생가를 방문한 관광객이 너도나도 손으로 만져서 생긴 자국이다. 손민호 기자

이제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87)의 생가로 갈 차례다. 호암 생가는 솥바위 동쪽에 있다. 주소는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조선 시대 진주와 대구를 잇는 다리가 있던 마을이라 하여 ‘중다리’로 불리다가 중교리(中橋里)가 됐다고 한다. 의령 사람들은 장내마을이라고 부른다. 마을 전체가 담 안쪽에 있어 담안마을이라고 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장내(墻內)마을이 됐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호암 생가 마을을 느낄 수 있었다. 고깃집이고, 라면집이고 가게 이름에 죄 ‘부자’를 붙였다. 길 이름도 다르다. ‘부자길’도 있고 ‘호암길’도 있다. 1월 25일 오후에 방문했는데, 평일인데도 마을 어귀 주차장에 관광버스 3대가 주차해 있었다. 최해자 의령군 문화관광해설사가 “주말에는 1500명이 넘게 방문한 날도 많다”고 말했다. 솥바위 기운을 받았다는 창업주 생가 마을 세 곳 중 호암 생가 마을이 가장 방문객이 많았고, 가장 번듯한 관광지 같았다.

호암 생가 가는 길. 장내마을에 들어서면 곳곳에서 호암과 관련한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손민호 기자

담 안쪽 마을이라는 뜻의 장내마을. 마을은 조용한데 골목마다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손민호 기자

호암 생가 마을은 언뜻 평범한 시골 마을처럼 보인다. 높은 건물이 안 보이는 대신, 마을 중간에 옹기종기 모인 기와집 여러 채가 눈에 들어온다. 그 기와집 중에 호암 생가가 있다. 흙담 늘어선 골목을 돌아 호암 생가 앞에 다다랐다. 대문 왼쪽 흙벽에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라고 새긴 금속 명패가 걸렸다. 돋을새김한 글자 부분이 손때가 묻어 색이 바랬고 반질반질하다. 진주 승산마을에 있는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의 생가는 대문 문고리가 반질반질하다. 호암 생가는 명패가 바랬고 연암 생가는 문고리가 바랜 건, 호암 생가는 문을 열었고 연암 생가는 문을 닫아놓고 있어서다. 호암 생가는 2007년 11월 개방했다.

호암 생가 곳간 안 모습. 농기구 대부분이 실제 호암 일가가 쓰던 것이라고 한다. 손민호 기자

호암 생가 부엌. 솥단지부터 주걱까지 부엌 살림 대부분도 실제 호암 일가가 쓰던 것이라고 한다. 손민호 기자

정문으로 들어서면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가 나온다. 안채 오른쪽 방에서 호암이 태어났다. 호암생가관리소 이무형 소장에 따르면 호암 생가는 대부분이 원형 그대로 복원돼 있다. 부엌의 식기, 곳간의 농기구, 안채의 살림살이 대부분이 호암 일가가 쓰던 물건들이다. 생가는 호암의 조부가 1851년 지은 집으로, 이후 수차례 증·개축을 거쳤다.

호암 생가. 정문에서 사랑채를 바라보고 촬영했다. 사랑채 뒤에 안채 건물이 있다. 사진에서 살짝 보이는 안채 오른쪽 방에서 호암이 태어났다. 생가 뒤편으로 낮은 산이 담처럼 둘러져 있다. 재물이 알아서 모이는 명당 중 명당이라고 한다. 손민호 기자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 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氣)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터에 혈(穴)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재물이 쌓일 수밖에 없는 명당 중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호암 생가 안내판의 문장을 받아 적었다. 일부 풍수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호암재단이 밝힌 생가의 내력이다. 호암 생가는 호암재단이 관리·운영한다(오전 10시∼오후 5시 개방. 월요일 휴관). 안내판의 설명처럼 호암 생가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재물이 쌓일 수밖에 없는 터라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생가에 들어서면 야트막하고 완만한 산이 생가를 빙 두른 형세가 느껴진다. 마을의 옛 이름 담안마을은, 담이 마을을 에두른 게 아니라 주변 산이 담처럼 마을을 감싸안은 지세를 뜻한다는 해석도 있다.

호암 생가 오른쪽 산자락에 선 암벽. 쌀가마니를 차곡차곡 쌓은 모습이다. 손민호 기자

호암 생가 오른쪽 암벽에 있는 두꺼비 바위. 특정 각도에 따라 울퉁불퉁한 바위가 두꺼비 머리로 보인다. 보이시는가? 일단 두꺼비가 보여야 재물이 모인다고 한다. 손민호 기자

최해자 해설사에 따르면 “호암 생가는 우리나라에서 풍수 한다는 사람 중에 안 와 본 사람이 없는 천하 명당”이다. 집이 들어선 터도 기운이 좋지만, 안채 오른편에 벽처럼 선 바위 또한 심상치 않다. 암석층이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쌓인 모습은 쌀가마니를 쌓은 것처럼 보이고, 특정 각도에서 바라보면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 중 하나가 두꺼비 머리의 형상을 띈다. 두꺼비 바위는 볼수록 두꺼비처럼 보인다.

소년 이병철 

문산정. 어린 호암이 다녔던 서당으로 호암의 할아버지가 세웠다. 호암 생가에서 약 1.5㎞ 떨어져 있는데 산을 넘어야 한다. 서당 뒤편으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손민호 기자

경주 이씨 집안이 장내마을에 정착한 건 조선 중기 연산군 시대였다. 호암은 선친 이찬우(1874∼1957)의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 권씨가 36세에 막내아들을 봤으니 늦둥이였다. 호암의 집안은 천석꾼이었다. 호암의 조부 이홍석(1838∼97)이 집안을 일으켰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 출중하다는 말을 별로 듣지 못하였다. 다만 유별나게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한문 공부는 『천자문』부터 시작했는데, 흔히 두서너 달이면 뗀다는 『천자문』에 나는 1년 남짓 걸렸다. 그래도 5년 가까운 서당 공부에 보람이 있어 『통감』이나 『논어』도 통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부는 시원치 못했던 것 같다. “문산 선생의 손자가 이래서야…” 하는 훈장의 훈계를 듣는 일도 가끔 있었다. 

호암 자서전인『호암자전』에서 인용했다. 호암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호암은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셈에는 자신이 있었다. 서울 수성보통학교 유학 시절, 전체 50명 가운데 35등에서 40등을 했던 호암은 조선어와 일본어는 100점 만점에 60∼70점을 받았지만 산술(수학) 성적만은 상위권을 유지했다. 인용문에서 ‘문산 선생’은 호암의 조부 이홍석이다. 이홍석은 장내마을에서 1.5㎞ 떨어진 산자락에 문산정(文山亭)이라는 서당을 지었고, 손자 호암이 다섯 살부터 서당을 다녔다. 직접 가본 문산정은 산중 별장 같았다. 서당 뒤편 산자락에서 오솔길 흔적이 보였다.

호암의 청소년 시절. 1927년 촬영했으니 17세 때 모습이다. 왼쪽 팔짱 낀 청년이 호암이다. 사진 호암재단

어린 호암이 『논어』를 통독했다는 사실은 훗날 삼성의 경영이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호암은 『논어』 말씀 중에서 특히 ‘언필신 행필과(言必信 行必果)’를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말에는 반드시 신용이 있어야 하고 행동은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뜻. 신의를 중시하는 삼성의 경영이념은 댕기 머리 소년 호암의 서당 시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의령 호암 생가 마을 부자광장 바닥에 새겨진 호암의 문장. 여행을 해야 큰 사람이 되나 보다. 손민호 기자

장내마을 한쪽에 조성된 부자광장에 호암 말씀을 새긴 바닥돌이 있다. ‘여행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쫓겨서 자기를 잃기 쉽다.’ 여행기자로서는 반갑고 고마운 문장이지만, 호암이 남긴 하고 많은 문장 중에서 하필이면 이 문장을 새겨 넣은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알아보니 사연이 있었다.

호암이 평생 성공 가도를 달린 것 같지만, 20대 청년 호암은 요즘 말로 ‘루저’였다. 부모를 겨우 설득해 떠난 일본 유학 생활은 건강 때문에 1년여 만에 중단해야 했고, 4년 넘는 방황 끝에 시작한 사업은 줄줄이 망했다. 정미소, 운수업 그리고 부동산 사업까지 호암은 다 말아먹었다. 시쳇말로 ‘영혼까지 털린’ 호암의 다음 행동이 뜻밖에도 여행이었다. 호암은 1937년 약 6개월간 서울·평양·대구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심신을 추스르고 새 사업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호암은 열두 살이 되던 2012년 3월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에 들어간다. 서당에서의 한학 공부로는 한계를 느껴서였다. 진주에서 호암은 LG 창업자 구인회와 같은 학년이 된다. 인연은 이렇게 이어진다. 호암의 진주 유학생활은 ‘부자 되는 여행’ 2편에서 다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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