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천상에 올라가 마야 부인에게 설법한 뒤 상카시아로 내려오는 모습을 담은 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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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붓다의 자취는 심우도(尋牛圖)의 소 발자국이었다. 8대 성지마다 찍힌 은유와 비유와 직설의 발자국. 거기에 담긴 뜻을 깨칠 때마다 순례객들은 한 걸음씩 나아갔다. 처음엔 꼬리, 다음엔 뒷발, 다음엔 앞발, 그리고 누군가는 머리와 뿔까지 잡았을 터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소를 찾을 때 소를 놓아라.” 역설적이다. 혹자는 “말장난”이라며 화를 낸다. 그러나 붓다의 나침반에는 오차가 없다. 그는 이미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상카시아에 있는 아소카 석주의 코끼리상. | |
그랬더니 물음이 올라왔다. ‘붓다는 진정 어디에 있을까.’ 룸비니의 연못가에, 쉬라바스티의 경행터에, 보드가야의 금강좌에, 쿠시나가르의 열반상에 있을까. 붓다는 어디에 있나. 2500년 전, 인도의 장구한 역사 속에 있나. 붓다는 과연 어디에 있나. 철커덩 철커덩, 열차는 그런 물음을 안고 하염없이 달렸다. ‘삐~익! 삐~익!’ 간혹 기적이 울었다.
◆말이 없는 아소카 석주=밤새 9시간을 달렸다. 아침이었다. 툰드라 역에 내려 아그라로 갔다. 상카시아는 거기서 4시간30분 거리였다. 버스는 시골길을 달렸다. 들녘은 꽃과 풀들로 가득했다. 한적한 풍경을 지나 상카시아에 도착했다. 유적지는 황량했다. 아소카 석주만 말없이 서 있었다. 석주 머리에는 코끼리상이 있었다. ‘이곳은 유적지이며,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는 인도 정부의 초라한 안내판이 보였다. 뒤편에는 스투파(탑)로 보이는 큼직한 불교 유적이 흙더미에 덮여 있었다. 유적 위에는 엉뚱하게도 작은 힌두교 사당이 세워져 있었다. 세월이 무상했다. 1600년 전, 이곳에는 대가람이 있었다. 무려 1000명의 승려가 여기서 생활했다고 한다. 중국의 현장 법사도, 신라의 승려 혜초도 이곳을 방문했다.
예부터 상카시아는 하늘과 땅을 잇는 곳이었다. 붓다 이전에도 많은 부처가 하늘에서 하강할 때 여기로 왔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하늘과 땅, 사람은 본래 하나다. 덩어리 없는 한 물건이고, 꽃잎 없는 한 송이 꽃(世界一花)이다. 그러니 하늘 속에 땅이 있고, 땅 속에 사람이 있고, 사람 속에 하늘이 있다.
그걸 우리가 막았다. “김××, 박OO라는 내가 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내가 존재한다” “나는 나를 위해 산다”며 세워 놓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我相)와 애착, 그 어긋난 정체성이 하늘과 나 사이를 막아버렸다. 그래서 수행을 하고, 그래서 기도를 한다. 막힌 통로를 뚫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통로가 막혀 있다”는 착각을 뚫기 위해서다. 붓다는 그 착각을 뚫었다. 그리고 하늘과 땅, 이 우주와 하나가 됐다. 그래서 붓다가 하늘의 소리를 내고, 붓다가 땅의 소리를 낸다.
무슨 뜻일까. 붓다는 왜 성지순례를 권했을까. 눈을 감았다. 바람이 시원했다. 그랬다. 붓다의 생애, 그건 한 장의 지도였다. 붓다는 단순한 순례, 형식적인 경배를 권한 게 아니었다. 그건 여래의 지도(삶)에 당신의 지도(삶)를 포개보라는 메시지였다. 출가를 할 건가, 말 건가의 문제가 아니다. 인도에 갈 건가, 말 건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나’를 허물 건가, 말 건가의 문제다.
붓다는 종종 자신을 ‘여래(如來)’라고 불렀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타타가타(Tathagata)’다. ‘이와 같이 온 분’ 혹은 ‘이와 같이 간 분’이란 뜻이다. 그래서 ‘여래(如來)’라고 불러도 좋고, ‘여거(如去)’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神)의 이름을 부르듯이 ‘여래’를 부른다.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이름에는 여래가 없다. 나를 허문 곳, 거기에 여래가 있다.
순례객들이 아소카 석주 앞에서 ‘반야심경’을 읊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한 자씩 의미를 되짚었다. 가자, 가자,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가서, 깨달음을 얻자. 그랬다. 피안의 언덕이야말로 붓다 8대 성지, 그 기나긴 순례길의 종점이었다. 붓다는 지금도 말한다. “그 언덕은 따로 있지도, 멀리 있지도 않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상카시아(인도) 글·사진=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