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하자 !!

참되고 바르게

역사·정치·경제·과학

" 서울은 항구다. "

碧空 2008. 12. 26. 19:38
 

 서울은 항구다

까닭 없이 쪼들리는 세밑의 심사도 달랠 겸 유쾌한 상상을 한번 해 볼까 한다. 다름 아닌, 서울은 항구(港口)일 수 있다는 것, 아니 ‘서울은 항구였다’는 것. 한강에 증기선이 처음 출현한 해는 1888년이었고, 곧 이어 독일·미국·청나라 상선들이 서로 위용을 뽐내며 등장했다. 조선시대 수운(水運)의 중심이었던 한강을 타고 바다가 한양 도성으로 진입했고, 내륙의 산들이 송파진으로 치달았다. 마포와 서강에는 미곡·젓갈·생선·건어물을 실은 배들로 넘쳤고, 뚝섬·광나루·서빙고나루에는 작은 목선들이 목재·시탄·채소·가축을 쉴 새 없이 실어 날랐던 게 바로 100년 전의 풍경이다. 규모가 제법 컸던 증기선들은 용산호·제강호·순명호 등 토종 명칭을 달고 운항했다. 각 나루에는 대소상(大小商)들이 시장을 열어 각종 물자를 쏟아냈다. 서울은 영락없이 항도였던 것이다(박은숙 『시장의 역사』).

서울을 항구에서 내륙 도시로 바꾼 요인은 두 가지다. 1900년 경인선이 완공되자 철도시대가 개막된 것과 군사분계선을 한강 하구에 겹쳐 그었던 53년 정전협정이 그것이다. 철마(鐵馬)는 선박의 쇠퇴를 가져왔긴 해도 군사분계선처럼 한강에서 바다를 떼내 아예 봉쇄해 버리지는 않았다. 정전협상 때, 군사분계선을 장산곶까지만 올렸더라도 바다의 문명이 서울로 흘러들어왔을 터이고, ‘목포는 항구다’를 불렀던 이난영의 소금기 어린 노래가 서울을 두고도 울려 퍼졌을 것이다. 가령 “양화진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밤섬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그리운 내 고향 서울은 항구다. 똑딱선 운다” 같은 애달픈 노래가 밤거리 찻집, 술집에 모인 사람들 마음을 적시고 한강 여객선이 괜스레 고동을 울려댔을 것이다.

서울이 바다의 문명을 잃어버린 것은 큰 손실이다. 바다는 인류에게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다. 수평선 너머 꿈틀거리는 신비의 문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탐험의 길로 유혹했는가. 해류를 타고 출몰한 이양선과 이방인들은 내지(內地)의 잠자는 상상력을 얼마나 소스라치게 일깨웠는가. 항구는 바다의 상상력이 진입하고 내지의 결핍증이 외부로 증폭하는 노즐이다. 그렇기에, 역사상 세계를 주름잡았던 거점 도시들은 대부분 항도였다. 암스테르담·런던·보스턴·뉴욕을 거쳐 LA까지, 바다는 이 도시들의 국제경쟁력을 부추기는 거대한 선동가였다. 바다는 생각과 인식을 틀에 가두지 않는다. 바다는 필요한 곳과 소통하도록 길을 열어준다. 서울이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자 서울을 근거지로 한 한국인의 ‘마음의 습관’에는 연결성·유동성·유연성·진취성 같은 바다문명의 본질이 사라졌다.

‘녹색뉴딜’로 명명된 ‘4대 강 정비사업’이 정부가 기획한 대로 침체일로에 있는 지방경기를 촉진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지역 거점도시들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기를 희망한다. 충주·대구·안동·공주·나주·함평에 당장 8300억원을 쏟아 붓고, 내년 한 해 동안 14조원을 투입한다고 하니 금융위기 한파를 조금이라도 몰아내는 데 효과가 클 것이다. 더 중대한 효과는 그런 지역 거점도시들이 겪을 성격 변화에서 나온다. 폐쇄적 내륙도시에서 개방적 해양도시로의 변신이 가져올 문명사적 발전의 유발효과는 당장 23조원으로 추산된 생산효과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바다문명과의 접속을 어찌 돈으로 추산할 수 있으랴.

마침, 중국과 대만은 양안 분단 59년 만에 쌍방향 뱃길을 열어 통상(通商)·통항(通航)·통우(通郵)의 삼통시대를 개막했다. 무쌍한 교역 파트너가 된 대륙의 63개 항구와 대만의 11개 항구가 짜낼 촘촘한 네트워크는 조만간 일본열도의 서쪽 항구도시들을 가담시켜 매우 단단한 동아시아 해상 교역 체계를 이룰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내륙 거점도시들이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인천·군산·목포·여수·부산 등 남서해안에 위치한 기왕의 항구도시들은 물론이거니와 내륙 도시들도 항로와 해로가 서로 엮어 짜는 다국적 문명 체계에 주도적 임무를 행사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항구여야 한다. 상하이와 홍콩은 이미 항구이고, 도쿄와 오사카도 이미 항구다. 상하이·도쿄와의 경쟁에서 서울이 뒤처진 것도 바다를 잃고 난 이후였다.

그래서, 4대 강 정비사업의 주목적을 하천 정비로부터 ‘바다 네트워크’ 또는 ‘해양도시’ 구축으로 바꾸면 좋을 것이다. 바다의 상상력과 진취력을 품을 기반을 창출하는 문명사적 사업이라는 말이다. 잃어버린 바다를 서울에 접속시키는 일, 그래서, 후손들이 주저 없이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은 항구다”라고.

송호근 서울대·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