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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순례

碧空 2006. 12. 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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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跡 巡禮   
  
史跡 32호  독립문  
 
  
 
  
 갑 오 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 (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 국 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 하 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 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 었 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 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 성하였다.
  
 
  
史跡 121호  서울 사직단  
  
 
  
종묘와 함 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 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  
토지의 신 에 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 치
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 에 지냈다. 나 라 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 년 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 서 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 신 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
  
1940년 정 식 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
  
 
  
史跡  117호  경복궁   
 
  
 
  
 
  
 
  
조선시대 궁 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 다 .
  
1412년 태 종 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 이 곳에서   
임금과 신 하 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 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 군 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 어 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 권 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史跡  122호  창덕궁 (비원포함 )  
 
  
 
  
조선시대 궁 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 복 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 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
  
임진왜란 이 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 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 았 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 다.
  
임금과 신 하 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 누어진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 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 연 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 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史跡 123호  창경궁  
  
 
  
조선시대 궁 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 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 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 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 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 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 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 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궁의 이름을
  
창경원으 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 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 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 다 .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광해군 때 다 시
  
지은 정문 ·
정전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 피 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史跡  124호  덕수궁   
 
  
 
  
조선시대 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 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 로
  
고쳐 부르 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
  
임진왜란 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 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 처 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 (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
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 었는데
  
그 후로 광 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 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 어 버리게 되었다.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 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史跡 125호  
  
  
 
  
종묘는 조 선 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 다 .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
  
세종 때 정 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 전을
  
세워 4대 추 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 고 ,.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 ( 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 신 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史跡 143호  서울 종로 문묘일원  
  
 
  
문묘란 유 교 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 다.
  
문묘는 크 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 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 역 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없 어졌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 진 왜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 다. 대성전 서 우(보물 제141호)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 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史跡  149호  서울 종로 육상궁  
  
 
  
영조의 생 모 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 묘 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 (1882)
  
 화 재 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 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史跡  157호  서울중구 원구단   
  
 
  
원구단은 하 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줄여서 원단이라고도 한다.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 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원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 (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원구제는 중단되었다.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 종 34년(1897)에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 터 이다. 현재 원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 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 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 다. 1913년 일제에 의해 원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
었다
  
  
  
史跡 271호  서울 종로 경희궁지  
  
 
  
원종의 집 터 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 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 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 다 .
  
그러나 민 족 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 고 궁터도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史跡 171호  서울종로 고종즉위 40년칭경 기념비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이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 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 또한 이
비석에 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 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
  
미도 담겨 있다
  
 
  
史跡  213호  서울종로 우정총국   
  
 
  
조선 말기 우편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84년에 설치되어, 그해 10월에 처음으로 우편
  
업무를 시 작 한 곳이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은
폐쇄되었다. 이후 1893년에
  
전우총국 이 라는 이름으로 우편 업무는 다시 이어졌고, 공무아문 역체국, 농상공부 통신부 ,
  
통신원 등 으 로 이어나갔다
  
 
  
 史跡 248호  서울 종로 대한의원
  
  
 
  
서울대학 교 의과대학 내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대한의원 건물이다. 1907년 대한제국
  
정부가 임 금 의 명령에 의해 의정부 직속으로 창경궁의 바깥 정원인 함춘원의 언덕에 지었 다
  
 
  
史跡 253호  서울 중구 구러시아 공사관  
  
 
  
고종 27년 (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 과 지하2층만이 남아있었으나, 1973년에 복구되었다. 한쪽에 탑을 세웠으며,
  
정문은 개 선 문 양식이다.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2월부터
  
1897년 2 월 까지 고종이 세자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 인
  
김홍집 내 각 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 가 결성되었다.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 을
  
했다. 현 재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 이곳에서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
  
 
  
史跡  254호  서울 관악구 구벨기에
영사관   
  
 
  
1903년에 짓 기 시작해서 1905년에 완성한 대한제국시기의 벨기에 영사관 건물이다.
  
광복 후에 는 해군헌병대에서 사용하였다. 1970년 상업은행이 사용하다가 은행측에서
  
그 자리에 건물을 짓기 위하여, 회현동에 있던 공사관 건물을 서울특별시 관악구의
  
남부순환 도 로변에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史跡  257호  운현궁  
  
 
  
운현궁은 흥 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 도
  
하다. 흥 선 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 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 리 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는 안채인 노 락당 이
  
자리잡고 있 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으며,
  
궁궐과 운 현 궁 사이의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해 직통문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
  
 
  
史跡  378호  서울성북구 성락원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1877∼1955) 공이
  
35년간 별 궁 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 연 지형으로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다.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 내린
  
물줄기가 하 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이 있 다.
  
안뜰은 영 벽 지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은 송석과 연못이 있는 지역이다. 서쪽 아래 지역에
  
고여한 늪 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더하여 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史跡 258호  명동 성당  
  
 
  
명동성당 은 코스트(Coste) 신부가 설계하였고 파리선교회의 재정지원을 얻어 건립되었다.
  
본래 순교 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 블랑주교가 김 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사들였 다 .
  
그후 1887 년 한국과 프랑스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98년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 의
  
벽돌로 쌓 은 교회이며,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지어졌다. 평면은 십자형이며 본당의 높이는
  
23m, 탑의 높이는 45m이다. 고딕양식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면서 그대로 본떴고,
  
공간의 고 딕 적 느낌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더 강하게 주어졌다.
  
 
  
史跡  256호  서울중구 정동교회  
  
 
  
고종 광무 2 년(1898)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이다
  
본래는 십 자 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175 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史跡  276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Underwood Hall)  
  
  
  
지금의 연 세 대학교, 옛 연희전문학교의 건물로 학관(學館)이라 불러왔다.
  
1921년 짓 기 시작해 1924년 완성된 돌로 지은 4층 건물로서 아펜젤러관과 함께
연세 대학교에
  
두 번째로 세워졌다.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인 언더우드(한국이름 원두우) 박사의 업적과
  
인격을 영 원 히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형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지은 것이다.언더우드 목사 의
  
장남인 원 한 경 교수가 초 석을 놓았 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史跡  278호  구서울대학교 본관   
  
 
  
일제시대 인 1931년에 준공된 옛 경성제국대학의 본관으로, 1945년 이후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 용되었다. 서울대학교가 1972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문화예술진흥원 청사 로
  
사용되고 있 다. 경성제국대학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이상재 선생을 대표로 한
  
조선민립 대 학 기성회가 결성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하고
  
예과(豫科 ) 를 모집하여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개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
  
본관은 벽 돌 로 쌓은 3층 건물로써 우리나라 건축계의 선구자인 박길룡씨가 설계했고 ,
  
공사는 일 본 인 회사 미야까와구미가 맡았다. 평면은 장방형이며 지붕의 모습은 세련되고 우아 하다.
  
 
  
  史跡 279호  서울 종로구공업전습소 본관
  
  
 
  
대한제국 순 종 융희 2년(1908)에 건립된 이 건물은 본래 기계시험소가 있던 터에다
  
1906년 공 업 전습소가 생김에 따라 그 본관으로 지은 것이다. 광복 후 국립공업시험원 본관 이
  
되었고, 지 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 본부로 쓰이고 있다. 2층의 목조건물로 벽은 독일식
  
비늘판을 붙 였으며 외형은 르네상스 양식을 모방했다. 구한말 탁지부가 설계한 몇 안되는
  
현존건물 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史跡 280호  한국은행 본관  
  
 
  
본 건물은 1910년대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건물이다. 일본의 제일은행 경성지점이었 으 나
  
옛 조선은 행 이 설립되기까지 중앙은행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은 행
  
본관이 되 었 다. 지하1층 지상3층의 철골 콘크리트 구조로 외벽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붙였 다 .
  
일본사람 이 설계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내부가 불에 타서 1956년에 보수하였다. 그 후 1987년
  
신관을 건 물 의 뒤쪽에 건립하고, 이 건물은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 용
  
하고 있다 . 전체적으로 르네상스시대 성 건축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정교하고 우아한 건물 이 다.
  
 
  
史跡  283호  중앙고등학교 동관   
  
 
  
 1923 년 10월에 준공한 2층 붉은 벽돌집으로, 1934년에 불에 탄 옛 본관의 왼쪽에 지어
  
서관과 쌍 을 이루고 있다. 건물구조는 T자형으로 서관과 동일하며 1920년대의 순수 민간인 이
  
세운 사립 학 교 건물로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건물이다. 우리나라 20세기 전기 건축양 식의
  
기념비적 건 물이다. 또 한 3·1운동 이후 조선 소년군 창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을
  
시작한 곳 이 기도 하다
  
 
  
史跡 284호  서울역사   
  
 
  
1922∼ 1925 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재가 혼합된 벽돌식 역 건물이다.
  
1층은 르 네 상스 궁전건축 기법으로 처리하고, 1층 윗부분과 2층은 붉은 벽돌로 쌓고,
  
부분적으 로 화강석을 장식하여 마감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여객전용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 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史跡  285호  고려대학교 본관  
  
 
  
고려대학 교 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경영을 맡았던
김성수가 933년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에 완 성한 본관건물로 박동진이 설계하였다. 3층(중앙탑은 6층)이며 화강석을
  
주재료로 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되어 있다. 평면 H자형이며, 중앙에는 넓은 홀이 있 다 .
  
건물 현관 의 두 돌기둥에는 학교의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 상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 후문 의
  
돌기둥에 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건축 당시에는 내·외부가 호화스럽고 웅장하여,
  
국내의 학 교 건축물로서는 유례가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
  
 
  史跡 286 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학 교 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도서관 건물이다 .
  
1935년에 공 사를 시작하여 1937년에 완성한 5층 건물로 설계는 본관을 설계한 박동진이 하 였 다.





사적 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