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그림
檀園 金弘道의 그림
![]() 풀무에 바람을 넣는 견습생, 달군 쇠를 모루 위에 대주는 사람, 쇠를 모양에 맞게 쇠망치로 내리치는 사람, 다 만든 연장을 숫돌에 가는 사람 등 대장간에서 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즐거운금속음이 들리는 듯하다.
[고기잡이]
[기와잇기]
[길쌈] 당시 서민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화면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베매기를 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하단에는 배짜기를 하는 여인과이를 지켜보는 할머니,
[논갈이] 논을 갈아 한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담배썰기]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이 일을 시킨 주인네들인 것 같다.
[행상] 당시 행상은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물품을 파는 상인을 말하는데 아무래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다보니 행색이 남루하다. 아이를 긴 행려에서 조금이나마 보호하려는 모심을 보이고 있고, 질끈 행전을 묶은 바지차림과 치마를 걷어올려 허리춤에 끈을 묶은 모습에서
[벼타작]
[빨래터] 바람의 화원에서도 이 장면이 묘사되어 나왔다.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편편한 돌판을 빨래판 삼아 방망이를 두들기며 동네 사람들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두 여인, 흐르는 물에 훨훨 빨래를 흔들어 헹구며 짜내는 여인, 감은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여인과 그 옆에서 보채는 아기, 바위 뒤에서 몰래 숨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여인들을 엿보고 있는 한량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 ![]() 방 안에서 돗자리를 짜고 있는 남편과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있는 아내, 그 뒤편에서 책을 펴놓고 글자를 막대기로 짚어가며 글을 읽고 있는 아들. 모두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평범하고 푸근한 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두 페이지에 걸쳐서 실린 작품이다.
金弘道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檀園·丹邱·西湖·高眠居士·醉畵士·輒醉翁이다. 안산시 단원구는 그의 호를 따온 이름이다.
정조 시대 때 문예부흥기의 대표적 화가로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등과 주로 서민들의 일상생활과 서당, 씨름 등을 그린 걸로 유명.
하지만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고, 시도 써서 아들 김양기가 출판한 《단원유묵》이라는 문집도 있다. 생애1745년 영조 21년에 태어났다. 오대조 할아버지가 수문장을 지낸 하급 무관 가문으로, 김홍도의 신분은 중인이었다. 보통의 화원이 집안의 가업을 따르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재능으로 화원의 길에 들어섰다.
결혼한 뒤에 복헌 김응환(金應煥)의 소개로 표암 강세황과 교제하였다. 표암(강세황의 호)은 인물, 화조(꽃과 새), 사군자 모두 능숙한 김홍도를 추천하여 도화서 화원이 되게 했는데, 덕분에 김홍도는 이인문 등의 여러 화가들과 사귀면서 그림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조 시대의 활약상1771년(영조 47년)에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76년에 왕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정조 5년)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서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조는 김홍도와 그의 스승 김응환에게 1788년 금강산의 산수화를, 1789년에는 몰래 일본 지도를 그릴 것을 명하였다.
1789년 김응환이 부산에서 병으로 죽자 김홍도는 대마도로 가서 일본의 지도를 모사해서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림을 그린 방법이 비슷하다고 하여 일본에서 첩보 활동을 하면서 화가로 활동했다는 설이 있다.
1790년에는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1795년에는 연풍현감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다 사임했는데,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 〈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김홍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러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소금장사로 부를 축적한 김한태(김경림)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대신, 경제지원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18세기 상업의 발달로 부유해진 중인 계급은 그들의 경제계에서의 위치 성장에 걸맞는 예술적인 취향을 김홍도처럼 유능한 화가들과 교류함으로써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씁쓸한 노년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한데다가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김한태도 별세하여 그는 후원자를 모두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1805년 질병으로 위독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언제 별세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김양기도 아버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그림의 특징
무동(舞童, 춤추는 아이), 서당, 나룻배, 씨름, 씨름 등을 수록한 풍속화첩을 발표하여 민중의 삶을 다룬 작품활동을 하였다.
평가그는 김응환에게 사사했으나 강렬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한국적인 풍토 감각을 잘 표현했다.
풍속화에서는 해학과 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도 그렸고,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형체의 원근·고저를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화단에 고착된 중국 북화(北畵) 양식을 탈피하여 대담하게 남화 양식을 시도해서 신선한 조형미를 완성했다.
작품작품으로 《신선도병풍》, 《풍속화첩》, 《투견도》, 《소림명월도》 등이 있다. 신선도풍속화(그림을 클릭하면 확대됨니다)
스승들김홍도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는 스승들의 가르침의 힘이 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