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소설/안동랑 과 현부인
안동랑(安東郞)과 현부인(賢夫人)
이 글은 <동상기찬(東廂紀簒)>권2에 실려 있는 <金安國傳>(후에 安東郞傳으로 바뀌었음)의 줄거리입니다. <동상기찬>은 백두용(白斗鏞)이 문양산인(汶陽散人)의 희곡 동상기(東廂記)에 전대의 문헌에서 발췌한 야담을 덧붙여 간행한 책으로서, 모두 6권1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 안동댐의 야경
김안국(金安國)은 판서(判書)에 대제학(大提學) 숙(淑)의 자제다. 그의 3, 4대 선조 적부터 모두 문장과 재망(才望)으로써 대대 문형(文衡)을 잡았다.
안국은 태어나서부터 미목이 수려하고 용모가 훤칠하여서 판서 대감이 애지중지하였다.
"애가 참으로 우리 집 자식이로다."
그런데, 안국이 말을 막 배우자 문자를 가르쳤더니 석 달이 지나도록 하늘 천(天) 따지(地) 두 글자도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저 아이가 용모와 미목이 저만하고서 총명이나 재분이 이다지 멍청할 수 있을까?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재주구멍이 미처 열리지 않았는가. 몇 년 지나서 가르쳐 보리라."
몇 년 후 대감은 안국에게 다시 글을 가르쳤으나 터득하지 못하는 것은 전과 매일반이어서 숙 대감은 마음에 적이 근심이 되었다.
"저 아이가 끝내 이런다면 저 일신의 불행일 뿐 아니라 우리 지체를 떨어뜨리는 일이 이보다 더하리오."
이에 주야로 가르치고 때때로 꾸중도 하면서 글을 깨우칠 도리를 천만가지로 차려 보았으나 종내 글자를 해득하지 못하였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한 해 두해가 흘러서 안국의 나이 어언 14세가 되었다. 대감은 한숨을 쉬며 탄식을 했다.
"나는 저것이 아직 어려서 그러는 줄로만 여겼더니, 이미 14세인데도 저 지경이니 세상에 어디 저런 인간도 다 있을까. 우리 선조의 혁혁하신 명성이 장차 저애 대에 이르러 떨어지겠구나. 조상을 욕되게 하는 자식을 두느니 차라리 자식이 없어 제사를 철하게 되는 편이 나으리라. 사세가 이러하니 도저히 저애를 집에 둘 수 없겠다."
▲ 안동 하회마을 전경
대감은 이렇게 결심하고 안국을 없앨 도리를 찾았으나 차마 죽일 수는 없는 일이고 어딘가로 쫓아 버리고 싶었으나 종적이 곧 탄로 날 것이 염려되어 손을 못 쓰고 있었다.
이때 안국의 동생 안세(安世)는 나이가 5세였다. 용모가 준수한 것은 안국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재질이 총명하기로는 안국보다 약간 나았다. 그래서 안세로 가통을 잇게 하고 싶어도 안국이 있으니 예법에 온당치 못하였다.
그래서 매양 안국을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추방하려고 별렀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때 마침 대감의 종제 청(淸)이 안동(安東) 통판(通判)으로 나가게 되었다. 안동은 서울서 멀리 떨어진 고장으로 부호들이 많았다. 청이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도임할 임시에 대감의 집을 들렀다. 대감이 안국을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저것이 본디 이러이러하단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세 번이나 끓어오르는데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오래 전부터 쫓아 버리기로 작정하였으나 적당히 보낼 곳이 없어하던 차이다. 이제 종제가 안동으로 내려가니 저것을 데리고 가서 아주 안동 백성을 만들어 세인이 알지 못하게 해 주기 바란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부터 이제까지 문장세가(文章世家)에 글 못 하는 자손이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을 내쫓았다는 말은 못 들었소. 안국의 사람됨이 저같이 비범하니 설사 종내 글을 못 하더라도 능히 가업을 이어 선대의 제향을 잘 받들 것이오. 안세가 재주는 있다고 하지만 그릇이 작을뿐더러 차자인 걸 어떻게 안국을 버리고 안세로 세운단 말입니까? 형님의 처사는 윤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청이 반대의 뜻을 밝혔으나, 숙 대감은 청의 손을 잡고 간청하였다.
"종제가 나의 청을 들어 주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네."
청은 몇 번을 거절하다가 마지못하여 승낙하고 말았다.
대감은 안국을 불러 영결(永訣)의 말을 하였다.
"이제부터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 너도 나를 아비로 생각하지 말아라.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는 안 된다. 만일 서울에 나타난다면 살아남지 못하리로다."
▲ 안동 도산서원 전경
청은 안국을 데리고 안동으로 내려가서 부임을 하였다.
안국이 외양이 저만큼 범상치 않고서야 못 가르칠 이치가 있으랴. 내가 반드시 가르쳐 보리라 하였다. 공무의 여가에 틈틈이 안국을 불러서 가르쳤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도록 하늘 천, 따지 두 글자도 깨치지 못하였다.
"어허, 과연 그렇구나. 판서 형님이 쫓아낼 만도 하다,"
조용히 안국을 불러서 물었다.
"안국아, 네가 왜 이러느냐?"
"소질(小姪)이 전에부터 무슨 설화를 들으면 정신이 맑아져 주야를 천언 만언을 들어도 죄다 또록또록 기억이 됩니다. 그런데 문자에 당대에서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해독이 안 될 뿐 아니라 글이란 말만 들어도 금방 정신이 아득하여지고 두통이 먼저 일어납니다. 아저씨께서 죽으라면 저는 죽겠습니다만, 다만 문자에 이르러서는 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청은 별도리가 없을 줄 알고 안국을 책실(冊室-고을 원의 비서격인 직무)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 안동 제비원 석불상
청은 본읍(本邑) 좌수(座首) 이유신(李有臣)이 집이 부유한데 당혼한 딸이 있는 줄 알고, 안국으로 그 집 사위를 삼으려 하였다. 유신을 불러 책실에 낭재(郎材)가 있음을 말하고 혼담을 꺼내었다.
"책실의 낭재라니 누구 댁 낭재이옵니까?"
"바로 우리 판서 종형의 큰 자재라오."
유신이 돌아와서 생각하니 의심이 들었다.
"김대감은 서울의 귀족 아닌가. 대대로 문형(文衡)을 잡아 전국의 양반들이 누구나 우러러보는 터에, 그의 소생 적자(嫡子)라면 안동으로 구혼할 이치가 아니겠느냐. 혹시 서자(庶子)가 아닐까."
다시 나아가 물었더니 고 상국(故 相國) 허연(許捐)의 외손이라 했다.
"서자가 아니라니 그럼 불구이겠지. 봉사일까. 벙어리일까. 아니면 고자일까."
유신이 그래도 의심을 떨칠 수가 없어 안국을 상면하기를 청하였다.
불려나온 안국은 육척 신장에 미목이 그림 같고 음성이 청랑(淸朗)하여 참으로 서울 미소년이 아닌가. 유신은 마음속에 탄복을 하면서도 고자가 아닌지 더욱 미심쩍었다. 묻고도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청은 이 눈치를 차리고 안국에게 명하여 바지를 벗게 하였으나 고자도 아니었다.
유신은 안국이 서자가 아니며 병신도 아닌 줄 알고 더욱 의심이 일어났다.
"종씨 대감은 서울의 귀족이신 터에 저렇게 기특한 자제를 두고 굳이 천리 밖의 안동 땅에 구혼을 하시다니, 무슨 연고인지 궁금하옵니다."
청은 끝까지 숨기다가는 필경 성사가 안 될 줄 생각하고 글을 못 하여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경위를 털어놓았다.
"안동좌수의 딸이 시임 대제학의 아들에게 시집가면 대만족이지 글까지 잘 하기를 바라겠는가. 비록 쫓겨났다지만 내가 거두어 살리면 또 안 될 게 무어 있나."
유신은 속으로 이렇게 치부하고 드디어 허혼(許婚)을 하였다.
청은 유신이 가산이 유여하여 족히 한 근심을 잊게 될 줄 믿었고, 한편으로 문벌도 얌전한 사족임을 탐문하고 과망(過望)함을 기뻐하고, 곧 택일하여 성례를 했다.
얼마 후 청은 안동 통판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갔다. 대감에게 안국이 장가든 말을 하였다.
"잘 되었다, 잘 되었어."
대감은 자기의 뜻대로 된 것을 기뻐했다.
안국은 처가의 별당에 틀어박혀 석 달 동안 호정(戶庭) 밖도 나가지 않았다.
신부가 조용히 물었다.
"대장부가 허구 헌 날 방구석에만 계시다니 답답하지도 않으셔요. 그리고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영광스럽게 할 도리는 문자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두문불출하고 3개월이나 계시도록 글이라곤 전혀 읽으시지 않고 문 밖 출입도 않으시니 웬일이에요?"
"어려서 내가 처음 말을 배우자부터 아버지가 나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4세가 되도록 하늘 천, 따지 두 글자도 깨치지 못 했다오. 아버지는 내가 집안을 망칠 인간이라고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시고 이곳으로 내쫓으면서 종신 부모님의 목전에 보이지 말라 하셨다오. 나는 비단 글자만 깨치지 못할 뿐 아니라 글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두골이 빠개지니 이제부턴 나에게 제발 글에 대한 말은 말아 주오."
신부는 한숨을 쉬고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안국의 장인은 제법 문명(文名)이 있어 향리에서 치는 사람이었고, 두 아들도 다 문장이 넉넉하였지만 안국의 사정을 들었던 까닭에 애당초 글을 가르쳐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러자니 대면하는 일도 드물었다.
며칠 후 신부는 다시 말을 꺼냈다.
"저의 아버지와 오라비들이 모두 글을 잘 하시니 사랑에 나가서 글을 배워 보셔요."
"먼저 내가 글이라는 말만 들어도 두통이 난다고 하지 않았소. 나에게 글말은 다시 꺼내지 말아야 옳거늘 왜 그런 말을 또 한단 말이오?"
안국은 성을 벌컥 내며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신부는 낙심하여 물러났다. 그리고 글말만 꺼내면 상처를 입히는 줄 알고 다시 입을 열지 못하였다.
신부 이씨는 원래 여자 중의 문장이었다. 시서(詩書) 육예(六藝)의 글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무불통지하였지만 천성이 온유하고 또한 사리의 의당함을 알았던 것이다. 문장은 여자의 종사할 바가 아니라 여기고 속에 넣어 두어 일체 표를 내지 않아서 부모 형제도 문장인 줄을 막연히 몰랐다.
매양 안국이 부친에게 득죄한 것을 슬퍼하여 글을 가르쳐 보고도 싶었지만 여자로서 남편을 가르친다는 것이 예법이 아니고 또한 안국이 글이라면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생각 끝에 이야기를 들려주어 재주가 어떤지 한 번 시험해 보려고 했다.
"사람이 돌부처도 아닌데 어찌 진종일 입을 봉하고 가만히 계실 수 있습니까?"
"말을 하자니 누굴 붙들고 한단 말이오?"
"저와 더불어 옛날 얘기나 하실까요?"
"그래 주오."
이씨는 천황씨(天皇氏) 이래로 역사를 풀어서 이야기하니 안국은 귀를 기울여 듣고 매우 흥미로워 하므로 책 한 권을 다 풀어서 들려 주고 나서
"이런 한담 설화도 따라 하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니 한 번 외어 보셔요." 하니 안국은 들려 준 이야기를 쭉 외는데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
이씨는 내심 매우 대견하였다.
"저이가 탁월한 재주를 지녔는데 무엇인가 질곡(桎梏)이 있어서로구나. 내가 반드시 총명을 살려서 통달하게 만들어야겠다."
이씨는 주야로 이야기를 해 주고 모두 외우게 하였다. 처음 역사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마침내는 성경현전(聖經賢傳)에 이르기까지 천언만어를 들려주었는데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국이 이씨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가 외운 이야기들은 과연 어떠한 것이오?"
"그게 다름 아니고 다 글이랍니다."
안국은 펄쩍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정말 글이란 말이오? 글이 그토록 재미있는 것이라면 내가 왜 머리가 아프단 말이오?"
"글이란 본래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지요. 머리 아플 까닭이 있나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 글이라는 것을 배워 보겠소."
이씨가 이에 사략(史略) 초권을 펼치고 천황씨 이하로 한 자 한 자 짚어 가면서 전에 왼 이야기가 어느 대목의 말인가를 가르쳤다. 그리고 본문을 읽게 하였더니 첫째 권, 둘째 권이 지나서부터는 능히 스스로 이해하는 게 아닌가. 안국은 일평생 깨치지 못하던 것을 그만 일조에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도 소홀히 보낼 수 없다고 낮에는 식사도 잊고 밤에는 취침도 않고 날마다 책자를 모두 해독하였다.
이씨는 다음으로 글을 짓고 글씨를 쓰는 법까지 가르쳤다. 이에 안국이 정신을 집중시켜 짓고 쓰니 사상이 구름처럼 풀리고 묘법이 물결처럼 펼쳐져 단가(短歌)와 장문(長文), 초서(草書)와 해자(楷字)에 두루 구비하게 되었다.
이씨는 바깥 출입을 시키려고 안국을 타일렀다.
"논어(論語)에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하지 않았습니까? 문장과 도덕이 이치가 다르지 않은데, 당신은 십년 동안이나 고립하여 붕우상교(朋友相交)를 못 하셨으니 이제부터라도 사랑에 나가셔서 이택(麗澤)의 유익함을 취함이 어떠하실런지요?"
안국은 드디어 목욕하고 의관을 차리고서 사랑으로 나와 장인에게 인사를 드렸다. 장인은 딸이 글을 잘 하는 줄 전혀 모르는 터에 더구나 안국을 가르쳐 문장이 된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안국이 사랑에 발을 끊은 것이 십여 년이었는데, 제 발로 걸어나와서 절을 하다니 한편 놀랍고 한편 반가웠다.
두 처남도 어리둥절해서 말을 하였다.
"오늘 밤이 웬 밤인고? 김서방이 사랑에 나올 날이 다 있고."
"자네들이 글을 짓는단 말을 듣고 나도 초나 해 볼까 하고 나왔다네."
장인 처남 모두 허허 웃었다.
"전에 못 듣던 말일세. 좌우간 뜻이 가상하니 시험삼아 해 본들 어떻겠나."
글제를 분판(粉板)에 썼다. 안국은 글제를 보고 즉시 붓을 들어 일편의 문장을 지어 놓으니, 그야말로 문사(文辭)는 호방하고 필법은 정교하였다. 모두 대경실색했다.
"이는 옛 문장가의 수법이다. 안국이 이걸 하다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장인은 단걸음에 안으로 들어가서 딸을 불러 물었다.
"얘야, 김서방이 본래 글 못 한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대단한 문장명필이로구나.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
이씨는 아버지 앞에 전후의 일을 아뢰었다. 이에 모두들 탄복해 마지않았다.
이로부터 안국의 문장과 학업은 일취월장해서 비록 영남의 노대가들이라도 그의 웃 길에 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에 나라에서 왕자의 탄생을 경축하는 별시(別試) 과거를 보였다.
이씨가 안국에게 권하였다.
"이번 별시를 당하여 국중의 글하는 선비들은 다투어 응시한답디다. 대장부로서 아예 글을 못 하면 모르거니와 당신의 문장이 이만큼 성취되셨으니 어찌 좋은 시절을 허송하고, 안동의 촌사람이 되고 말겠습니까? 그리고 아버님이 이곳으로 내쫓으신 이유도 단지 글을 못 했던 때문이었지요. 이제 문장이 대진(大進)하였으니 이 때를 타서 귀성(歸省)하심이 좋을까 합니다."
안국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나 역시 답답하게 여기 오래 있고 싶겠소? 내가 여기 내려올 적에 아버지께서 다시 서울에 올라오면 죽이겠다는 막 말씀을 하셨다오. 내 어찌 죽음이 두려워 안 가겠소마는, 자식을 죽인 아버지가 될 것이 두려운 것이오. 또한 자식 된 자 어버이께 죄를 얻으매 마땅히 문을 닫고 머리를 숙이고 종신 근신해야 도리거늘 어찌 유유히 과장(科場)에 들어가 임금을 섬길 뜻을 두겠소."
"의리야 그렇지요만, 권도(權道)도 쓸데는 써야지요. 이제 당신이 먼저 과거를 보시어서 이름을 금방(金榜)에 올리면 글을 못 하셨던 발명(發明)이 안 되겠습니까? 그런 연후에 부모님 슬하에 나아가시면 어찌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마음이 없으시겠습니까?"
안국은 이씨의 말을 옳게 여기고 즉시 과거 길을 떠났다. 천리 먼 길을 필마단동(匹馬單童)으로 터덜터덜 올라갔다. 간신히 서울에 도착해서 자기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부친을 뵙기가 두려웠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모두 낯이 설어 방황하다가 생각해 보니 들를 곳은 유모의 집뿐이었다.
유모는 안국을 보고 깜짝 놀라 반겼다. 문 밖으로 뛰어나와 손을 잡고 맞아들였다.
"나는 서방님이 벌써 돌아가신 줄 알았다우. 오늘 이렇게 뵐 줄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그런데 대감님께서 만약에 서방님이 오신 줄 아시면 큰 풍파가 납니다. 우선 저 골방에 들어가 남이 모르게 해야 하옵니다."
밤에 유모가 대감댁으로 몰래 찾아가서 안국의 모친에게 아뢰었다.
"안동 서방님이 쇤네의 집에 와 있사옵니다."
모친은 여자인지라 안국을 떠나보낸 이후로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짓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안국이 왔단 말을 들으매 버선발로 달려가 보고 싶었으나 대감이 아실까 두려워 귀엣말로 유모에게 분부하였다.
"대감께서 취침하신 연후에 아무도 모르게 데려오게."
유모가 분부대로 거행하여 모자간에 상봉하게 되었다. 모친이 울먹이며 안국에게 말하였다.
"너와 이별한지 십여 년에 소식이 이승과 저승처럼 돈절하였으니 문 밖에 나가 멀리 떠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매 매양 나의 간장이 끊어졌더니라. 이제 너의 얼굴을 대하니 일변 슬프고 일변 기쁘구나."
안국도 우러러 모친을 바라보니 주름진 얼굴, 흰 머리가 옛날의 자태를 찾을 길이 없었다.
"불초 소자가 아버지께 득죄하고 먼 시골로 쫓겨나 어머니를 상심케 하였으니 이 어찌 자식 된 도라 하겠습니까?"
모자가 서로 눈물 섞인 이야기를 나누는 즈음에 안세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너희 아버지가 만약 네가 온 줄 아시면 필시 너를 죽이려 하실 것이다. 네 동생도 보지 말아야 하겠다." 하고 안국을 방 한구석에 이불을 씌워 두었다.
안세가 방문에 들어와 이불을 덮어쓰고 누운 사람을 발견하고 모친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모친은 숨기기가 어려울 줄 알고 안세를 불러 앉히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네 안동 형이 왔단다."
"옳지, 안동 형이 여기 와 있었구나. 아까 아버지께서 꿈에 안동 형을 보고 두통이 대단하시다기에 어머니께 말씀드리려고 들어오는데, 정말 안동 형이 여기 와 있었구먼."
"안세야, 아버지께서 만약 이 일을 아시면 큰 변이 난다. 사랑에 나가서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안세도 익히 형의 일을 들어서 알고 있는지라, 아버지가 아시면 곧 죽이려 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안국은 모친께 하직하고 유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은 곧 과거를 보는 날이었다. 안국은 과장을 찾아가려 하였으나 십여 년 집을 떠나 있었는지라 서울 지리가 사방이 생소하여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다. 단신으로 올라왔으니 누구 하나 벗하여 갈 사람인들 있겠는가.
서성이고 있을 때 마침 잘 차려입은 한 선비가 과장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저 서방님을 따라가셔요."
안국은 유모의 말대로 선비를 따라갔다. 그 선비는 곧 아우 안세였는데, 뒤를 돌아본 안세는 안동 형이 글도 못 하면서 따라오는 게 부끄럽게 여겨져서 모른 체 하였고, 재상가의 자제들인 동접들이 누구냐고 물으면 모르는 시골 손님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과장에 글제가 걸리는데 책문(策問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는 과제)이었다. 선비들은 저마다 지필묵을 들고 요란을 떨며 다투어 글제를 베껴 오는데, 안국은 빈손으로 나아가 잠깐 글제를 외워 와서 조금 생각한 후에 시지(試紙)를 펼쳤다. 먹을 갈아서 붓대를 놀리며 일필로 답안을 작성한 후 한 번 읽어보고 맨 먼저 제출하고는 과장을 나와서 유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 모습을 본 안세는 속으로 "누가 우리 안동 형이 글을 못 한다 하였던고?" 하며 경탄하였다.
시관(試官)이 심사를 끝내고 보니 장원은 김 숙의 아들 안국이었다. 친구의 자제가 장원을 한 것이 기뻐 축하하려고 숙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전에 당도하기도 전데 신은(新恩-과거에 급제한 사람) 나오라고 재촉하였다. 대감은 안세로 생각하고 기쁨에 넘쳐 방목(榜目)을 보았더니 뜻밖에도 10년 전에 안동으로 쫓아낸 안국이 아닌가.
숙 대감은 노발대발해서 소리쳤다.
"이놈은 안동 구석에 엎드려 있는 것이 제 분수거늘 감히 아비의 명을 어기고 서울로 올라왔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하다. 또 이놈이 급제를 하였다지만 필시 차작차필(借作借筆)이리라. 김 숙의 집안에 차작급제한 놈이 나오다니! 속히 안동 놈을 잡아오너라."
안국은 황망히 달려와서 뜰아래 엎드렸다. 대감은 대노하여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여러 종들을 명하여 중장(重杖)으로 맹타(猛打)하라 하였다.
이때 시관이 들어와서 신은(新恩)이 어디 있느냐고 찾았다.
대감은 이러저러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지금 그 놈을 때려죽이려 하는 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잠깐 그 차작(借作)인지 여부를 시험해 본 연후에 임의대로 처결해도 늦지 않으리이다."
"원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저놈이 나이 14세가 되도록 하늘 천, 따지 두 글자도 못 깨친 하우(下愚)인데 십년 사이에 어떻게 문장을 성취해서 급제를 하겠소? 그럴 이치가 만무하니 시험해보고 말 것도 없소이다. 하인들은 개의치 말고 급히 매를 치라."
시관은 만류할 겨를이 없음을 깨닫고 몸소 마루에서 내려가 안국을 붙들고 올라왔다.
"내가 내 자식을 죽이는데 그대가 왜 나서는가?"
대감은 시관에게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어쓰고 눕는 것이었다.
안국은 부친의 노염이 풀리기 어려운 것을 보고 스스로 죽게 되리라 생각하여 숨을 죽이고 꿇어 엎드렸다.
시관이 안국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여보게, 잠깐 일어나서 나의 물음에 대답하게. 이번 과거의 글제를 기억하겠는가?"
안국은 일어나 앉아 글제를 한 자의 차착도 없이 외우는 것이었다. 대감이 누워서 들어 보니 하늘 천, 따지자도 못 깨치던 위인이 책문의 글제를 쭉 외는 것이 아닌가. 몹시 의아스러웠다.
시관이 다시 물었다.
"이번 자네가 지은 글을 기억하겠는가?"
안국은 또 자기가 지은 책문을 줄줄 외우는 것이었다. 그 문장은 실로 무변대해(無邊大海)에 파도가 일고 천리장도(千里長途)에 준마가 내닫는 형세였다.
대감은 듣기를 다하자 자리애서 일어나 안국의 손을 잡고 부르짖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네가 이런 문장이 되어 오다니. 십여 년 타관의 등잔불 밑에서 서울을 그리는 마음인들 오죽하였겠느냐? 아아! 우리 선조의 혁혁하신 명성이 너에 이르러 다시 떨치는구나. 나의 이제까지 않던 두통 증세가 지금 낭랑한 네 글소리에 가시고 말았구나. 부자불책선(父子不責善)과 역자교지(易子敎之)라는 옛 말씀이 지언이로다."
안국은 무릎을 꿇고 신부 이씨에게 글을 배워 문필에 능통하게 된 경과를 아뢰었다. 대감은 크게 감동하며 기뻐했다.
"하인들은 얼른 가마를 준비하라. 그리고 가서 안동 며느리를 맞아 오너라."
그리고 시관을 돌아보고 감사해하였다.
"어진 벗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문장 아들을 죽일 뻔 하였네."
종제 청이 밖에서 이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안국의 글을 보니 희대의 문장이 아닌가.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다우?"
"제 처가 가르쳤다는구나."
청이 대감을 바라보며 경탄하였다.
"형님, 우리 형제가 평생 가르치지 못한 것을 저애의 처가 가르쳐 놓았습니다. 사내 대장부가 일개 아녀자에 미치지 못하였소이다 그려."
신부 이씨의 신행이 올라오는 날 대감은 크게 잔치를 열어 일가친척과 빈객을 초청하였다.
"나의 큰 자식이 문장이 되어 와서 선조의 유업을 빛내게 된 것은 모두 신부의 공입니다."
모두들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안동 땅에 이런 현부인이 있을 줄 누가 생각했겠는가.
이씨는 시가에 와서도 시부모를 효도로 모시고, 부인의 도리에 극진하면서도 일찍이 자신의 공치사를 하는 법이 없어 시부모의 더욱 두터운 사랑을 받았다.
안국의 문명(文名)과 재망(才望)이 날로 떨쳤으니 처음에 한림(翰林)·옥당(玉堂)으로부터 마침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한다.
<漢文小說 "安東郞" 原文>
金安國者 判書大提學淑之子也 自淑以三代 皆以文章才望 世典文衡 安國始生 眉目淸揚 容貌峻茂 淑愛重曰 此眞吾家子弟也 逮夫能言 父敎以文字 三月而不能解天地二字 父怪而疑之曰 此兒之容貌眉目 如是婉然 而何聰明才分之如蒙昧也 其或年之幼而才未及顯發也 稍待數年敎之 及期而更敎 則又如是不解 父心甚悶然曰 此兒終若如是 則不但爲渠 身之不幸 墜落家聲 莫大於此也 乃晝夜敎訓 時時警責 凡所以解之之道 千萬其方 而終未能解天地二字 如是者 一月二月 一年二年 安國之年 已十四矣 淑痛?流涕而言曰 吾意其年幼而然矣 今已十四而終始如此 世間豈有如許等人物耶 吾先祖赫赫然聲名 此物將滅之 與其有?先之子 寧無子而絶祀 且吾輒見此物則忿火衝心 頭面自痛 勢不容畜家中也 乃謀所以去之之方 然不忍殺 又欲逐去某所 則恐其?跡之見露也 姑令勿見於目前而已矣
先時 所小子安世 年已五歲矣 容貌之俊秀 雖不及安國 而才?穎悟 差勝於安國 欲以此爲嗣 而安國在焉 則於禮不倫矣 每擬逐去無聞之所而 不得矣 會從弟淸通判安東 安東遠邑也 與京師相隔 其中 又多富人焉 淸辭肅將赴焉 過訪淑 淑乃以安國 托之曰 此兒素行 如此如此 欲殺之心 一日三出 而猶有所不忍 逐去之計 長時有之 而無處焉送之 今君好作安東伯 願率此兒去 永爲安東之氓而無使世人知之也 淸辭而慰之曰 兄何出此言也 自古及今 文章之家 不文之子何限 而未聞有放逐之說 今兄肯爲之乎 且此兒作人 如是非凡 假令終不識文字 必能保家業承先祀 安世雖才 其器小 且次子也 何可以此而易彼也 兄之此擧 卽是悖常之擧也 逐辭而起 淑執手迫之曰 君若不聽 吾欲無生 淸辭不能得 乃許之 淑召安國 永訣曰自今以性 吾不以汝爲子 汝亦勿以我爲父 無復上來京師 來卽殺之
淸旣赴任 意謂安國之容貌眉目 如此不凡 豈有不可敎之理 吾且訓敎之 乃以簿牒之間 召而敎之 三月而果不能解天地二字 淸歎曰 有是哉 判書兄之放逐也 乃從容問其故曰 何爲其然也 安國曰 侄自前 若聞閒雜說話則精神自明 晝夜千萬言 一聽而盡誦 至於文字 不惟不能解也 輒聽文之一說則精神自眩 頭痛又作 淑主殺之則死耳矣 至於文字 實無可奈何 淸知其末如之何也 命還冊室 無復敎矣
淸聞本邑座首李有臣之家富而且有女 欲以安國贅之 云有冊室郎子而招有臣言之 有臣曰 敢問冊室郎子 誰家郎子也 淸曰卽吾判書從兄長子也 有臣退而竊自疑曰 金淑京畢貴族也 世典文衡 通國士族 莫不景仰 若是所生嫡子 必無求婚於安東之理 無乃其庶子乎 就淸詰之 乃故相國許捐之外孫也 有臣 又竊自疑曰 此非庶子則必是病人也 盲者耶 啞者耶 不然 宦者也 復以詰之 淸之其疑病人也 招安國出來 身長八尺餘 眉目如畵 聲音爽朗眞京華美男子也 有臣心竊奇之 然猶未知宦之與否 欲將言而未能發 淸料度其意 命安國脫袴 則又非宦也 有臣旣知其非庶子 而又見其非病人 又生疑訝 問于淸曰 從氏大監 京華貴族 生子如此其奇 而必欲求婚於安東千里之外者 敢問其故何也 淸 度其畢竟諱之 事不可成也 遂直以其不文放逐之事告之 有臣 心自計較曰 以安東座首之女 嫁得時任大提學之子 斯亦滿足 又安敢望其能文 且其雖見逐 吾當率育 亦何有妨 遂許婚 淸旣知其家産殷富 足以忘憂 且探其門閥爲士族 大喜過望 卽令擇日成婚 居無何 淸罷官歸京 語淑以安國婚姻之說 淑喜適中其計 謝曰 善處善處矣
安國 舍於有臣之貳室 三月不出戶庭 其妻從容問曰 大丈夫久蟄房中 能無鬱鬱乎 且立身揚名 以顯父母之道 莫過於文字 而今夫子之處此室 三月于玆玆矣 未嘗讀書 亦未嘗出門者何也 安國蹙額而答曰 始吾能言時 父親敎以文字 于今十四而終未能解天地二字故 以爲亡家之物 欲殺而不忍故 放逐于此地 使終身不復見於父母之目前 我實罪人也 何面目仰見天日乎 且吾不惟不解文字 聽到文之一言 則頭骨欲碎 自今以往 請無復言文字於吾耳邊 其妻歎息而退 元來有臣頗以文名 稱於鄕里 其二子亦皆能文 然素聞安國之事故 初不生敎文之意 亦未嘗就見焉 其妻悶其夫之年長而無所爲也 一日 復語其夫曰 妾之父兄 皆能文學 願夫子出就外舍試學焉 安國怒叱曰 向吾旣謂聞文疾首之說 則宜不復向我說文 而今又妄發者何也 因疾首而臥 妻憮然而退 知其傷於文 而無復言矣
元來李氏 女中之文章也 詩書六藝之文 諸子百家之語 無不通習 然天性溫柔 又達事理之宜義 故以爲文章必非女子之所可從事也 自知而已 未嘗開口語人故 雖父母兄弟 亦未知其能文章矣 每恨安國之得罪於父 思欲解敎文字 然女子旣無敎丈夫文字之禮 且安國之惡聽文字說如是 則可謂無可奈何也 欲以言說諷諭 以試其才稟之如何也 復問安國曰 人非石佛與木偶則終日閉口而無所言說可乎 安國曰 雖欲言之 誰與言之 妻曰請與妾 論說古語可乎 安國曰 固所願也 妻乃自天皇氏以下 解其言以語之 安國潛心仄聽 輒稱其言之善 因盡解一卷而語之 乃曰雖如此閑說話 不可隨卽忘却 請更爲妾還誦之 安國曰諾 遂盡誦其言 而無所遺謬 妻心甚奇之曰 此乃卓越之才 而有所梏焉者也 吾必因其所明者而達之也 遂晝夜與語 使皆還誦 始自史記諸說 終於聖經賢傳 千言萬語 無不能誦
一日 安國忽問其妻曰 今吾與君 所誦說者 果何等說也 妻曰此果無他也 乃所謂文也 安國極驚且訝曰 信乎其文耶 所謂文者 若是其滋味 則吾何疾首之有 妻曰所謂文者 本如是滋味也 夫何疾首之有 安國曰然則自今以往 願學前日所謂文字者也 妻乃持史略初卷 自天皇氏以下 字字指之曰 向所誦某說某說之謂也 遂使讀之於前 一卷二卷之外 皆能自解 安國以爲平生所未覺者 一朝而覺之 不可斯須忽怠也 晝以忘食 夜以忘寢 日日讀之 又日讀之 不惟盡讀其所語誦之書 充棟之簡冊 亦皆解讀 妻又以敎屬文寫字之法 安國乃潛心積慮 且做且書 精思疊出 妙法層生 短歌長文草書正字 無不備解
妻又欲使其出門而無由 乃引而諷之曰 語云德不孤必有隣 文章道德 其理不殊 今夫子孤居十年 未有隣朋 自今以往 請出處外舍 以受麗澤之益如何 安國遂沐浴衣冠 出拜於有臣 元來有臣 素昧其女之能文 豈料敎安國成文章之事乎 且安國之不出 其間已十餘年矣 始忽來拜於前 半驚半喜 其二子亦甚驚怪 問言曰今夕何夕 金郞出門 安國曰聞君做文之說 願草而來 有臣以下 皆?笑之曰 昔未聽也 然意則可嘉 試之何妨 乃書題於粉板 安國覽卽成篇 揮筆以進 文辭?勇 筆法精捷 皆失色驚歎曰 此古作者手段 而安國能之 此誠大變也 有臣顚倒入內 招問其女曰 金郞之不解文字 吾素所聞者 而今忽做出文章名筆 此何等變也 女於是?陳其前後之狀 衆皆歎服不已焉
自是 安國之文章才業 日就月將 雖嶺南之老師宿儒 無能出其右者 是時朝廷 以太子之誕降 稱慶設科 擇日頒諭 李氏謂其夫曰 方今慶科當前 東方之以儒爲名者 莫不蓄銳將赴 大丈夫不文則己 今夫子之文章 如是有成烏可虛送好時 永作安東之氓也 且父母之放逐此地者 但以不文之故也 今則文辭 異於前日 願夫子及此時 好以爲歸寧 安國歎息流涕而答曰 吾豈欲鬱鬱久居此乎 始吾之來此 父親永訣之曰 汝若更來京師 殺之也 豈其惡死而不往哉 惟恐父親有殺子之名也 吾雖欲歸寧可得乎 且爲人子者 得罪於其父 則宜閉戶編首 以自終身 烏可晏然入科場 以冀事君之心 妻曰大義則誠然矣 豈無權道之可行乎 今夫子先入科場 得掛名於金榜 則此足爲發明不文之道也 然後歸寧父母 豈無喜赦之心哉
安國遂以爲然 卽日治發 千里長程 馬一奴一 間關跋涉 僅得至京 於是欲歸其家 則恐見其父 欲向他處 則皆是素昧 歎息彷徨 嗚呼曷歸 此想彼想 可棲者只其乳母家矣 乃策馬尋到 乳母望見其來 驚喜出門 携手迎入曰 意謂郎子己作泉下之人矣 豈料今者更得相逢也 然相公若知郎子之來 必出大事 請入處洞房 無使他人見之也 至夜乳母潛往告于夫人曰 安東郎子來往小的之家矣 夫人女子也 自送安國之後 無日不泣思焉 聞其來慾顚倒出迎 而恐相公知覺 乃密謂乳母曰 相公就寢後 潛與之俱來 乳母知其命 母子始得相見 夫人泣謂安國曰 自吾別汝 于今十年 消息存亡 如隔死生出門遙望遠雲 每斷寸腸 今見汝面 悲喜交至 安國仰看夫人 蒼顔白髮 非復舊時容矣 亦感激流涕曰 小子不肖 得罪父親 久放遐鄕 今母悲思 此何人子之道也 方與泣話之際 窓外有曳履之聲 夫人知安世入來 潛謂安國曰 汝之父親 若知汝來 必欲殺汝 無使汝弟見汝也 遂使蒙被而臥之於後 安世入門見之曰 彼蒙被臥者誰也 夫人知其終難掩跡 命坐安世而低聲謂言曰 此果汝安東兄安國也 安世拍掌驚笑曰 有是哉 安東兄之在此也 俄者父主 以夢見安東兄之故 今方大?疾首 將以告白於母主矣 有是哉 安東兄之在此也 夫人? 紮! ! ! ! ?샀?! ! ! 翕?汝之父親 若知此事 必生大變 汝出去 愼勿出口也 元來安世素聞安國之事故 亦料其父之知卽殺之 終未敢告之
安國拜辭夫人 壽出於乳母家 是曉卽設科日也 安國擬欲赴擧 然十年離家 今始入京 四方何處 科場何所 單獨一身 誰與爲共 方才??之際 有一小郞 方且盛備入場 乳母曰郎子可潛隨其後 安國如其言 卽其弟安世也 得至場中 一接皆是宰相之子 安世恥其兄之不文而從來 或有問者 不稱其兄而終曰鄕客云 及其懸題 則乃策問題也 相擧筆硯 擾亂奔走 爭先謄題 安國乃空手進去 看卽誦來 背坐小思 遂解券 磨墨揮毫吏一番讀了 躬自先呈 安世心自驚服曰 孰謂安東兄不文也 門開 遂舍於乳母家
考官坼榜 壯元卽金淑之子安國也 喜其知友之子居魁 趣駕來賀 未及門前 催新來之出立 淑意其安世之爲也 喜見榜目 則乃十年前放逐安東之安國 遽驚發怒曰 這漢蟄伏安東 固其分也 乃敢逆父命 來入京師 罪當萬死 且渠雖爲及第 必是借作 安有金淑家人 借作及第者乎 因大擬搏殺 疾呼家?曰 速捉安東漢來 安國蒼黃來?於庭下 淑大怒 不問一言 急命衆? 持重杖來打 此際考官入來曰 新來何在 淑曰方擬打殺也 考官驚問曰 是何言也 淑曰 如此如此 考官曰 雖然暫試其借作與否然後 可任意處之也 淑冷笑曰 甚矣 君言之迂也 彼漢行年十四 終不解天地二字 十年之間 安能做成科文 作爲及第也哉 必無其理 何待試焉 急令杖之 考官挽不能得 親下堂携入 淑怒罵考官曰 我殺我子 君何爲者也 且吾目前輒見其漢 頭面自痛 今又然矣 因蒙被而臥 安國見其父 怒色難解 自分必死 屛息?伏 考官曰暫起對問 因問今日科題 君能記憶否 安國起坐誦對 無一字差錯 淑臥聽而意謂難解一字者 能誦策問題 誠極殊常也 疑訝之際 考官又問曰 今日所做 亦能記憶否 安國誦對無遺 其文若無邊大海 波瀾自作 千里長途 騏驥逸騁
淑聽畢 起執安國之手曰 夢耶眞耶 汝何以成文章乎 可惜十年之隔面殊方夜燈 豈堪望京之懷 ??可歎 吾先祖赫赫之聲 於是焉振矣 吾前日疾首之症 至今快?於一誦淸和聲 父子不責善 易子敎之之說 到今可明矣 安國?陳其能文之始終 淑抵掌大喜曰?업僕速速治轎 去邀安東婦來 又謝考官曰 ?非賢友 幾殺吾文章兒
淸 自外聽得此報 顚倒來賀 取見安國之文 則稀世之文章也 孰使之然也 乃其妻之所敎也 淸顧淑歎賞曰 吾兄弟 平生所未敎者 其妻能敎之 可以堂堂大丈夫 反不及一兒女子乎 李氏旣歸 淑大會宗族賓客 語之曰 吾兒之作成文章 以光先祖之遺業者 皆吾新婦之功也 衆皆稱羨 豈意安東 有如是之婦 李氏自入壻家 事舅姑盡孝 甚執婦道 未嘗以功 有自伐之色 父母愈益愛之
安國之文名才望 日以益盛 始自翰林玉堂 終至大提學 (東廂紀纂 卷二